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 소설집

최윤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9년 12월 14일 | ISBN 9788932011295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12쪽 | 가격 7,000원

책소개

아름답고도 슬픈 삶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매혹적인 최윤의 신작 소설집. 고혹적이며 유니크한 작가만의 문체와 독창적인 주제 의식이 독자들을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작가의 말]

언뜻 보아버린
침묵의 평화로운 지대를 향해
몸은 자꾸,
자꾸 쓰라고 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이 책의 모든 주인들께 감사를 표하며……
1999년 12월, 최윤

[해설] 나날의 전쟁: 일상의 역사 만들기
정과리

최윤의 소설은 한국 소설사에서 조용하고도 의욕적으로 이어져 온 어떤 소수 문학의 흐름에 맥이 닿아 있다. 이상(李箱)으로부터 시작해, 박태원·최인훈·이청준·조세희·이인성…… 그리고 백민석으로 이어지는 그 소수 문학의 흐름은 전통적 소설 양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려는 간헐적인, 그러나 꾸준한 시도들의 연속을 가리킨다. 전통적 소설 양식과 이 새로운 시도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자리로서는 이 글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이 시도들이 문학사적으로는 현실이 아니라 언어가 곧 문학의 주제라는 것에 대한 각성이자 실천이고, 정신사적으로는 근대 너머로 가려는 고단한 몸짓을 이룬다는 점은 지적해두기로 하자. 이 지적은 이 소수 문학의 흐름이 한국 문학의 생산과 수용의 장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의 일단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제3세계가 그러하듯이 한국의 문화 공간 역시, 중세와 근대와 현대라는 3중의 시간대를 한꺼번에 겪어 치르는 한편으로, 근대적인 것이 강력한 지배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근대의 전형적 인물로서의 문제적 개인을 창조해낸 최인훈의 『광장』이 애독의 영광을 누린 데 비해 같은 작가의 『회색인』과 『서유기』가 소위 ‘난해성’의 딱지 아래 몰이해의 항아리 속에 봉인되어온 사태의 원인을 짐작하게 해준다.

최윤의 소설이 전통적 소설 양식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물과 사실의 불투명성에 의해 드러난다. 이미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최윤 소설의 주체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주인공, 즉 뚜렷한 성격과 행동 양태를 가지고 있는 그런 개인이 아니다. 가령, 김용희는 최윤의 인물들은 “정보를 모으면 모을수록 [……]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존재”(「아틀란티스는 없다」, 『문학과사회』, 1997년 겨울, p. 1680)가 되어버린다고 말하고 있는데, 실로 인물들은 현존으로서가 아니라 차라리 부재로서 존재한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그녀’는 아주 오래된 기억 저편에 있는 듯이 지시되고 추적된다. 「회색 눈사람」의 첫 문장은 “거의 이십 년 전의 그 시기가 조명 속의 무대처럼 환하게 떠올랐다”(「회색 눈사람」,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1992, p. 33)이다. 이 모두(冒頭)는 사건과 회상 사이에는 “거의 이십 년”이라는 어두컴컴한 망각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미리 알리는 기능을 한다. 독자는 사건을 부재의 형태로 만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모호성은 단순히 작품의 앞자리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알 수 없는 사태의 속을 살펴 들어가 그 진상을 추적하고 의미를 길어올리는 과정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모호성의 안개는 결코 걷히지 않고, “힘겨운 추적”들은 그저 중단될 뿐이다. 다만 남는 것은 범죄 수사관들이 ‘정황 증거’라고 부를 어떤 불투명한 흔적들일 뿐이다. 그 흔적들을 작가는 게다가 즐기기까지 한다. 「파편자전: 사물이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방식」의 화자는 인물 ‘E’의 “목적없는 헤맴과 이동의 우연한 흔적들”(283)을 죽 나열하고는 “E가 때때로 좋아하는 것은 바로 사물의 우연,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 물리적 투명성이”라고 말한다.

한데, 최윤의 소설은 비교적 독자와의 소통에 성공한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한국 소설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이 행운은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아마도 그 이전에는, 단편에서의 산발적인 반향들을 제외한다면, 조세희와 이청준의 경우가 거의 유이할 것이다. 그러나, 이청준 소설의 광범위한 수용은 그의 지적 탐구의 면을 따라서가 아니라 한국적 정한의 세계라는 고전적 단면을 따라서이고, 조세희 소설은 동화적 상상력에 힘입어 주제와 형식에 있어 두루 명징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대학가의 필독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혹은 ‘대체역사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그 기법상의 새로움만큼이나 민족주의라는 아주 오래된 한국인의 정열에 호소함으로써 독서의 장에 안착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조세희의 「시간 여행」이나,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와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이 의욕적인 형태적 혁신을 꾀함으로써 다수의 독자를 만나는 데 실패한 것은 그것이 주제와 형태에 있어서 두루 재래의 고정관념을 함께 넘어서려 했기 때문이랄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호성으로 가득 찬 최윤의 소설이 비교적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왜인가? 그의 소설이 독자 일반의 기대를 적정한 수준에서 채워줄 어떤 유인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다양한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마침 활동을 개시한 90년대가 모호성을 즐기게 된 시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념의 붕괴, 소비 풍속의 전반적 확산, 그리고 새로운 문명 사회가 우연성에 부여한 활동적 기능 및 의미는 세계의 혼란을 그 자체로서 느슨한 바쿠스적 혼돈으로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부추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파편자전: 사물이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방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작가의 특이한 사물 취향 및 언어놀이(가장 대표적인 예: 작가는 자신의 영문 성[姓]의 철자를 쪼개 각 장의 인물로 삼는다)는 작품 전체에 야릇한 나른함의 분위기를 배어들게 하면서, 장식적 개인성을 즐기는 여피족의 취향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90년대적 정황과 최윤의 소설은 그리 행복하게 조우하지 않는다. 90년대적 현상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개인의 와해가 진행되는 과정 그 자체가 개인에 대한 요구를 더욱 맹렬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90년대식 베스트 셀러들이 두루 인물들을 지극히 ‘사적인’ 의미망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은 이와 연관이 있다. 그에 비하면 최윤의 소설들이 직접 대면하고 있는 정황은 사적이라기보다 사회적이다.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가르는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에 사적 유대의 공동체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그가 생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적 유대의 공간은 금세 허망한 꿈으로 허물어지고, 그 붕괴를 통해 공적 공황(恐慌)의 상태를 곧바로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전쟁들: 집을 무서워하는 아이」의 ‘나’와 ‘규수,’ 둘만의 공간은 그들과 함께 “팬 플루트”를 배웠고 볼리비아로의 이주를 꿈꾸던 “K씨 부부”의 참혹한 자살과 혼자 남은 아이에 의해 “무섭게 조용”한 악몽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전쟁들: 숲속의 빈터」에서의 ‘나’ ‘민구’ ‘화란’으로 구성된 사사로운 공간은 곧바로 그 공간의 전면에 놓인 숲속의 빈터에 출몰하는 광인에 의해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 광인의 뒷편에는 한 마을을 공포와 환멸의 늪으로 몰아넣었던 총기 난사 사건이라는 파국적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창밖은 푸르름」에서의 “자살 클럽,” 「하나코는 없다」에서의 동창 모임 등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물방울 음악」의 “그룹 ‘미시킨’”이나 「전쟁들: 그늘 속 여인의 목선」에서의 옛 친구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경우에는 사적 유대가 그 자체로서 공적 지위 혹은 기능을 한다. 아내의 죽음과 병행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그룹 ‘미시킨’”의 추억은 그대로 지금, 이곳에서의 “공동 생활”(138)에 대한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고, 군인의 탈영 뉴스와 병행되어 기술되는, “승산없는 전쟁 불구자와 어디론가 잠적한 한 여인”(164)에 대한 추억은 그 친구 어머니의 이탈이 단순한 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사회적 재앙과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최윤의 소설들은 그 소재에 있어서 90년대적이라기보다 차라리 80년대적이다. 운동권·광주·분단 등 7, 80년대를 지배해온 핵심적 문제들이 여전히 최윤의 소설을 움직이는 중심 문제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뜻 보아 90년대식의 사적 모호성에 감싸여 있는 듯이 보이는 최윤의 소설은, 실상 그런 척함으로써 독자들을 유인하는 한편, 동시에 그 사적 모호성의 세계를 사회적 공황의 한복판에 집어넣음으로써, 모호성의 나른함을 즐기려 하는 독자들의 의식의 울타리를 깨뜨리고 단박에 악몽과도 같은 사회적 삶과 직접 대면케 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종종 그의 소설이 그 가득한 모호성 그 자체로서 하나의 압축, 다시 말해, 역사의 축약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데뷔작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임철우가 다섯 권짜리 장편을 통해 겨우 복원하였던 광주 항쟁의 역사를 한 어린 여자 아이의 불행 속에 암시적으로 축약해놓은 작품이다. 그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며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져주었던 「회색 눈사람」 역시 일개 지하 조직의 사건이라기보다는 6,70년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 전체를 암시한다. 하나의 우연한 사건을 통해 역사 전체에 반향하는 것, 그것을 위해 동원된 수법은 저 옛날 상징주의자들의 모토였던 암시와 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그 사건은 그 자체로서 세상 전체의 문제들을 압축시켜놓은, 따라서 세상의 모든 층위와 영역들을 향해 힘있게 그 의미를 방사하는 핵심 의미소로 기능한다. 그러니까 부재로서 실존하는 인물의 존재태, 사건들의 끝없는 모호함은 강력한 시적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의미의 결여 혹은 인간적인 것의 박탈을 향해 있다기보다 의미의 무한을 향해 있는 것이며, 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의미의 무한은 그 정수, 즉 가장 축약된 형태에서조차 결여의 양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회색 눈사람」의 ‘화자’가 20년 전의 사건을 독자에게 이야기한 후, “나는 늘 그 시기에 대한 짧은 보고서 형식의 글을 쓰고 싶어했다”(『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p. 71)고 말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아, 길고도 긴 길의 우울한 초겨울 풍경이라니! 사방은 술병 바닥 두꺼운 유리의 짙은 색깔처럼 흐렸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 보고서를 쓰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화자의 마음속에 파묻힌 채로 사라진 것인가? 그러나 독자는 그 이야기를 이미 읽지 않았는가? 화자는 그것을 보고서의 형식으로 쓸 수 없다는 얘기까지 포함하여 몽땅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이야기되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었을 뿐이다. 즉, 보고서의 형식으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으로 이야기된 것이다. 소설의 형식으로라는 진술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소설의 내부에서는 그 이야기는 발설되지 않았지만, 소설 바깥으로는 발설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내부의 결여를 통해 바깥으로 충만한 의미를 방사한 것이다. 다음, 소설의 형식으로 씌어진 것은 보고서와 다른 내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거의 이십 년 전의 그 시기가 조명 속의 무대처럼 환하게 떠올랐다. 그 시기를 연상할 때면 내 머릿속은 온통 청록색으로 뒤덮인 어두운 구도가 잡힌다. 그렇지만 어두운 구도의 한쪽에 쳐진 창문의 저쪽에서 새어들어오는 따뜻한 빛이 있는 것도 같다. 그것은 혼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픔이었다. 그것이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삶의 단계에 정말 완성이라는 것은 있기라도 한 것인가. 아, 그때…… 하고 가볍게 일축해버릴 수 없는 과거의 시기가 있다. 짧은 시기지만 일생을 두고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시기. 그래도 일상의 반복의 힘은 강한 것이어서 많은 시간 그 청록색의 구도 위에도 눈비가 내리고 꽃이 지고 피면서 서서히 둔감한 상처처럼 더께가 내려앉아 있었던 모양이다”(앞의 책, p. 33).

무엇이 달라졌는가? 우선, 보고서와 달리 소설은 짧지 않다. 그것은 “아, 그때…… 하고 가볍게 일축해버릴 수 없는 과거”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긴 이야기이고, 그것이 길다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길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짧을 수가 없다는 것까지도 말하기 때문에 길다는 것을 뜻한다. 후자마저 포함한다는 것은, 소설의 이야기는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그 자신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이야기, 따라서 “일생을 두고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아닌 소설은 그래서 ‘혼란’이고 ‘미완성’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스스로의 결핍을, 즉 대자성(對自性; pour soi)을 내적 형식으로 갖는다. 다음, 보고서에서 적으려고 했던 ‘희망’이 소설에서는 ‘아픔’으로 바뀌었다. 소설은 희망의 청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이고, 세월이 지나면서 “더께가 내려 앉”는 상처이다. 그리고 이 아픔과 저 미완성은 하나로 뒤엉킨다. 왜냐하면, 저 아픔은 미완성이라서 아픔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것은 상처를 지운다. 미완성되는 것만이 상처에 더께가 내려앉게 하여 그 아픔을 한없게 한다.

그러니까, 최윤의 소설은 역사의 축약이자, 동시에, 역사의 결여이다. 합쳐 말하면, 소설은 영원히 미완되는 역사이다. 전자의 통로를 통해 작가는 소설을 시로 둔갑시킨다. 묘사와 진술의 복합체가 암시와 환기의 덩어리로 변모한다. 후자를 통해 작가는 이야기의 욕망을 극대화시킨다. 셰에라자드가 죽음을 담보로 끌고 간 『천일야화』가 그 모형을 제공하듯이 소설은 진짜 ‘네버엔딩 스토리’이다. 그리고 그 두 특징은 하나로 뭉친다. 암시와 환기는 그 자체로서 사실성을 마이너스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다. 본래 시에서 그것은 사실성 자체의 ‘무화’를 위해 기능한다. 사실을 항구적 부재로 지시하고 그것을 정서적 기호로 대체한다. 그러나 소설에 그것이 전용될 때 시적인 것은 거꾸로 사실성을 결정적인 부재가 아니라 영원한 유예로 만든다. 소설 속의 시는 산유화가 아니라 소쩍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애초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최윤 소설이 전통적 소설 양식을 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용면이 넓다는 것 말이다. 그것을 앞에서는 취향을 이용해 취향을 배반하는 전략으로서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좀더 다르게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것을 취향 이전에 필연적인 요구에 따르는 것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번의 작품집은 얼핏 역사 전체에 반향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는 전 작품집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한국인의 역사적 주제들이 표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번 작품집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반복이다. 도처에서 ‘반복’이라는 어사가 출몰한다. 아무렇게나 보기를 뽑아보자.

그리고는 매일 엇비슷한, 의례적 일상의 반복이었다. (136)

아내가 죽은 지 수개월이 돼가는 지금도 내게 여전히 생생한 곤혹감을 전달하는 그들의 습관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139)

보아도 보아도 똑같은, 끝도 없이 재방영되는 연속극 (149)

나는 그런 반복적인 삶의 흔적을 이날 아침 새롭게 바라본다. (167)

취기는 곧 우리의 육체를 무감각하게 마비시켜버려, 두려움 대신에, 아주 어둡고 감미로운 미로 속에 던져넣는다는 것을 반복 경험하면서 우리는 마비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184)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는 추레하게 벗겨진 늙은 육체가 자행하는 반복적인 움직임. (240)

그때나 이때나 우리는 여관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싫어한다.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성인 만화에서도 사람들이 질릴 정도로 그 일을 하러 여관에 가니까. (240)

이 반복의 한없는 반복됨을 보면서 어떻게 이 소설집의 주제가 반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리고 이 반복은 무엇보다도 “의례적 일상” “보아도 보아도 똑같은, 끝도 없이 재방영되는” 것, 사람들을 아주 질리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무의미의 한없는 연속이다. 일상은 그 무의미의 미만함에 의해서 어떤 역사로도 발돋음하지 못하고 어떤 사건으로도 변신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잠재태의 방식으로서나마 삶의 약동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존재 결여조차 발생하지 않는다. 결여의 형식으로 세상의 바깥을 향해 방출될 의미도 없다. 이 일상에 대해서 많은 소설들은 탈출을 꿈꾸어왔다. 일상이 그 자체로 역사가 된 경우는 발자크와 스탕달의 시대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일상은 언제나 지리멸렬에 불과한 것이다(지나가는 길에 덧붙이자면, 언젠가 다시 한번 일상이 무반성적인 상태로서도 바로 역사가 될 때가 올 것이다. 바로 문명사의 대전환이 일어날 때. 혹은 생명의 교체가 일어날 때, 즉 복제 생명의 루시Lucie가, 쥘리앵 소렐이, 라스티냐크가 태어날 때). 그렇다면, 우리의 작가는 이 지긋지긋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그리도 지겹도록 일상을 반복해 보여주는 것인가?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 이 모순된 대답에 우리의 의문에 대한 단서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인물들이 실제로 끊임없이 탈출을 꿈꾼다는 것을 뜻한다. 보라, ‘나’와 ‘민구’는 “우리를 아무도 모르는 동네로 이사하”(187)기로 하는 것이다. 「창밖은 푸르름」의 ‘모르트’ ‘데스’ ‘데드’ ‘토드’ ‘하데스’는 자살 클럽을 결성하고 암호를 애용한다. 「하나코는 없다」의 ‘나’는 아내와 “격렬하고도 길게 계속”된 “불화”와 그러고도 계속된, “부부 동반으로 친척을 방문하고, 모임에 참가하”는 “세상에 대한 연극,” 그리고 “극이 끝나면 다시 냉전에 들어가는 나날들”이 없었더라도, “몰래 도망치듯이 엉성하게 채워진 여행 가방을 들고 출장을 떠났을까. [……] 만약 그랬더라도 그는 하나코의 소식을 기억해냈을까”(19). 아니다. 인물들은 누구나 이 반복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안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아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 탈출이 파국으로 귀결함을 또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 작품들의 제목이 ‘전쟁’이라는 단어를 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섬뜩한 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실로, 볼리비아로 이주하려는 K씨 부부는 자살하고, 숲속의 빈터의 환각 뒤에는 제대 군인이 자행한 살상극이 있었고, 자살 클럽의 ‘토드’는 정말 자살하고 다른 회원들은 서로 모른체한 채 먼 발치에서 빈소를 살피고 돌아간다. 「하나코는 없다」의 친구들은 “술병을 벽에 던”지며, “거친 몸싸움과 깨어져 나가는 유리 조각과 서로에게 짖어대는 고함”으로 “취기를 가장”하며 자기들이 암호처럼 부른 ‘하나코’를 억지로 일으켜세워 노래부르게 하고, “전반적인 광란의 웃음” 속에서 “하나코와 그 친구는 [……] 여전히 웃으면서, 한밤중의 역겨운 찬바람을 방 안으로 밀어넣으면서 방문을 열었고, 이미 그사이 몇 배로 두터워진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39∼40). 그러니까,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충동의 표현으로서의 ‘가장된 취기’는 “광란의 웃음”을 거쳐, 그 탈출의 상징적 표지(하나코)를 마침내 망가뜨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창밖은 푸르름」에서의 ‘나’는 밤의 산보에서 “푸르게 젖어 있는 거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영안실처럼’이라고 중얼거”(263)리는 것이다. 탈출에 대한 미지근하거나 경련적인 충동은 이미 재앙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생의 열림 혹은 도약을 환기시키는 푸르름의 이미지는 곧바로 죽음과 유령들을 환기시키는 음산한 이미지로 변모한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그 자체로서 재앙이고 파국이다. 여기까지 와서 독자는 대답을 한꺼번에 얻는다. 우선, 최윤 소설의 수용에 대해. 최윤 소설이 독자와 만나는 면은 단지 소비 풍속과 우연성에의 탐닉이 삶의 바닥에 자욱이 깔린 90년대적 정황에 대한 사람들의 장식적 취향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차라리 이념의 몰락과 소비 풍속의 전반화와 정보화 문명이 추동하는 평준화와 중성화의 과정 속에서 모든 삶이 똑같아지고 무의미해진 사태로부터 벗어나려는 산만하고도 충동적인, 그리고 절실한 욕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동적이고 산만한 욕구를 드러내는 가운데 작가는 그것에 재앙을 뒤집어씌운다는 것.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독자의 취향을 이용해 그것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독자의 욕구를 따라가면서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텍스트 내적 결론이 함께 도출된다. 일상은 지긋지긋하고 탈출은 파국이라면 일상으로 돌아가 일상과 싸우는 길밖에는 어떤 길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반복의 지긋지긋함을 극복하자면, 그 역시 반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전언 중의 하나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저 구체적이며 적나라한 일상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다가가는 것을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168)다는 것이다. 그 방해의 원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한다 하더라도, 일상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명제는 이것이 일상과의 싸움이고 동시에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뜻한다. 일상은 단지 반복이고 사태에 불과하지만, 일상과의 싸움은 역사가 아닌가? 과연, “이런 건조한 보고서 형식의 말이 그녀가 꼭 하고 싶다는 말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말의 껍질이라고 생각한다”(135)는 「물방울 음악」의 한 구절은 이번의 작품집 역시 짧지 않은 긴 (역사를 가진) 소설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역사는 무엇보다도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쪽(일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한결같은 일상도 실은 아주 오랜 기획과 조직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 수정을 위한 기계적인 절차를 거치며 ‘규수’가 ‘반복’해 읽는 신문은 바로 끔찍한 살상이 컴퓨터 게임처럼 간단한 부호와 버튼의 조작으로 일사불란하게 처리된 ‘걸프전’의 기사를 싣고 있었던 것이며, 그 전쟁에서 “오전 1시쯤 인근 호텔에서 잠들어 있다가 비행기가 뜨는 굉음에 놀라 공군 기지로 몰려든 기자들에게 미 공군의 레이 데이비스 대령은 ‘이제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라고 나직이 말”(182)하고 있는 것이다. 대령은 역사의 시작을 ‘나직이’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래 기획되고 조직적으로 진행될 프로젝트이며 당연한 진행이고 결코 흥분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프로젝트가 일상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다.

일상과의 싸움은 그 자체로서 역사와 싸우는 역사이다. 여기에 와서야, 표제작인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의 기이한 알레고리가 이해될 수 있다. 알레고리의 의미는 명백하다. 우선, 이것은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이 잉태한 열세 가지의 환몽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의미이다. 다음, 그 환몽들은 그러나 일상성의 조직적 구성 속에 통합되거나 혹은 완벽하게 버려진다는 것. 두 가지 경우 모두 환몽의 본래적 의도는 제거된다. 이것이 두번째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움직임은 주체(바이와 파랑손)와 사건(『바람국화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책자에 기록된 것)과 대상(바람국화) 전체의 소멸로 귀착한다는 것이 세번째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뿐인가? 일상의 흐름 속으로 환원되지 않은 나머지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 나머지 의미는, 그 소멸·부재를 지켜보는 행위에서 나온다. ‘바이’와 ‘파랑손’이 해변가에서 사라질 때 누군가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반을 틀어놓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처음부터 숨어 있던 이 외의 다른 누구일 수 없다. 즉, 첫 문장부터 글쓰기의 펜을 끌고 간 이, 따라서, 바람국화의 탄생에서부터 소멸까지뿐만 아니라 세상이 그것을 조작하고 버리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탈출의 주체와 대상과 사건이 몽땅 소멸하는 내력을 기술한 이이다. 그 기술은 언뜻 오직 묘사로 일관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일상의 조작에 맞서서 거기에 싸움 혹은 전쟁의 의미를 부여하며 다시 꾸미는 구성의 글쓰기이다. 그 기술에 음악이 동반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음악이란 「파편자전: 사물이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방식」에서의 “C의 몸 안에서 이미 적혈구나 백혈구로 변한 지 오래”된(270) “유성기 바늘” 그리고 “옛날 축음기의 소리관을 닮”(289)은 “물 램프”가 흘려보내는 새로운 언어, 이 “램프에서 나오는 물은 모두 빛이다”(287)라는 언어의 왜곡을 통해 강하게 환기되는 그런 희한한 언어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방어하며 조이고 덮은 공통적인 기능”으로 일상에 맞서는 율동과 리듬을 가진 언어이다.

이 언어를 만드는 자, 그것이 일상과의 싸움의 역사를 가능케 한다면, 그 역사는 단순히 시간적 역사일 수만은 없다. 작가가 이번 작품집에서 역사적 주제로부터 일상으로부터 내려왔다면, 지금까지의 분석에 근거해 볼 때, 그것은 그 어떤 기관원이 주장하듯이 역사가 종말을 맞이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자체에 역사성의 무게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거꾸로 말해 역사가 정치성뿐만 아니라(지하 조직, 남로당, 광주와 같은 사건이 갖는) 일상적 구체성을 갖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내면화된 역사, 우리의 사유와 행동의 원천이 되는, 살과 피로서의 역사 말이다. 물론 90년대 이후 굵직한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역사는 점차로 희미해졌다. 소위 ‘큰 이야기’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그 자체와의 정직한 대면과 그것의 수용이 중요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큰 정치적 역사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끄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파편적인 것이 다였다. 그녀와 나와의 가느다란 인연의 끈은. 그때 모였던 다른 친구들과도 이 정도의 파편적인 연결의 끈은 있었다”(127) 혹은 “내가 밤 산책을 하는 동안 그는 기껏해야 수십 개의 퍼즐 조각을 맞추었을 뿐이다. 여기저기 모아진 덩이들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형상을 드러내지 못한 채 고립된 섬으로 놓여 있다”(266)라는 진술들이 그대로 가리키듯이 일상성은 실지로 파편의 형태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들은 그대로 악몽화하거나 일상의 조직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령, 「전쟁: 숲속의 빈터」에서 수음하는 남자를 보는 첫 공포의 순간 ‘나’의 모습을 보자.

그러나 한순간 서서히 온 몸의 피가 어디론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이완의 상태로 빠져들어갔다. (204)

나는 “조립 옷장의 쇳대”를 “움켜잡고 있는 상태로” 무기력의 이완 상태로 빠져들어갔다. 공포의 대상 앞에서 기운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사태의 진원을 다 알고 난 후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집을 가꾸는 걸 포기하는 삶을 한참 산 후에 문득 예전에 그토록 열심으로 만들려고 애썼던 목욕탕에 몸을 담그는 모습은 어떤가?

알맞게 따뜻한 욕조의 물 속에서 우리 몸은 오랜만에 이완되었다. 우리는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우리는 전나무 심는 데 열심일 거야, 그렇지? (153)

탈출의 욕망은 여기에서 사소한 심심파적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최초의 공포 속에서 ‘나’를 끔찍한 상태 속에 얼어붙게 했던 무기력한 이완은 여기에 와서 아주 자연스런 몸의 상태가 된다. 그 이완 속에서 ‘우리’는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린다. 전나무 심는 건 이제 더 이상 어떤 강렬한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의 역사는 일상의 무의미가 내면화된 역사이다. 거기에 저항하는 싸움의 역사는 그 내면화된 일상 자체를 변형시키는 작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어디에도 근거할 곳이 없으므로. 그러나 작가가 그 변형의 구체적인 방법론과 생활 태도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조금씩 실천해야 할 문제이다. 다만, 작가도 무언가를 하기는 한다.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앞에서 최윤 소설의 수용면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는 독자의 욕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욕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그것의 심연을 꿰뚫어본다고 말했다. 그 심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는 것, 그것이 작가의 할 일인 것이다. 그 할 일는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의 역사를 만든다. 일상사의 조직적 수립 과정과 그 조직적 일상 속으로의 느린 편입 과정과 모든 탈출 욕구의 파국적 종결 혹은 소멸의 과정 전체를 본다. 그 과정은 엄격하게 보면 시간적 길이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과정들은 각각 고유한 성층을 가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만드는 역사는 공간적 중첩의 역사, 이야기로서 하자면 시간적 길이를 가지지만, 사건으로서 보자면 복합적 지층을 이루는 중첩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과연, 작품집의 구성은 그 복합적 지층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짜인 것으로 보인다. 애초의 구상에 의하면 맨 앞에 일상 곧 역사를 알레고리로 지시하는 소설이 있다. 그리고 중간쯤에 파편화된 ‘주체’의 부유하는 그러나 선택을 모색하는 태도 및 의식이 파편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파편들은 이상한 음악에 의해 이어져서 3중의 방향으로 반향한다. 첫번째 반향지는 「전쟁들: 집을 무서워하는 아이」 「전쟁들: 숲속의 빈터」이다. 두번째 반향지는 「물방울 음악」 「전쟁들: 그늘 속 여인의 목선」이다. 세번째 반향지는 「창밖은 푸르름」 「하나코는 없다」이다. 알레고리의 소설에서는 일상으로서의 역사가 수립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번째 반향지에서는 그 일상의 역사적 수립에 의해 모든 탈출 욕망이 재앙이 되거나 그 스스로 일상 속으로 편입되어가는 계기를 보여준다. 두번째 반향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적으로 출몰하는 탈출 욕망의 엄연한 존재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반복(일상)에 대항하는 반복의 방법론이 출현한다. “그녀의 시선은 자꾸 여인에게로 되돌아온다”(150)고 말할 때의 반복, 즉 어떤 “모호한 사건,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고 삶의 말끔한 질서를 의심하게 만드는 그 사건의”(164) 어떤 징표에 대한 되풀이되는 인식을 말한다. 그 인식은 “문득문득 타성의 두꺼워진 각질을 뚫고 (우리를) 깨우러 온다. 처음에는 별다른 불편함을 만들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의식의 문을 두드리고 방문하다가,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계기로 무섭게 다가온다. 일테면 한 여인의 목덜미의 완벽한 포물 곡선으로부터”(164).

여기에도 반복이 있다. 그러니 반복이 곧 일상이라는 등식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여기에서의 반복은 일상이 아니라 일상화이다. 그리고, 일상화란 일상과의 투쟁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일상성과의 싸움을 체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어떻게 체화할 수 있는가? 세번째 반향지는 일상으로부터 유래하는 무서운 파국 혹은 무기력한 편입은 바로 탈출 욕망에 시달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 자행된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층이다. 일상의 주체는 걸프전의 대령도 제대 군인도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탈출하고자 악쓰는 우리이다. 그것이 「하나코는 없다」가 감동적으로 들려주는 전언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파편화된 삶의 퍼즐을 영원히 맞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몫으로 여전히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완벽한 답은 될 수 없지만, 어쨌든 주체에게 일상 속에서 사는 삶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것을 살아낼 기운까지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일상의 노예

목차

작가의 말

하나코는 없다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물방울 음악
전쟁들: 그늘 속 여인의 목선
전쟁들: 집을 무서워하는 아이
전쟁들: 숲속의 빈터
창밖은 푸르름
파편자전: 사물이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방식

<해설> 나날의 전쟁: 일상의 역사 만들기/정과리

작가 소개

최윤 지음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프로방스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 월간 『문학사상』에 허윤석의 단편을 중심으로 쓴 평론 「소설의 의미 구조 분석」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88년 『문학과사회』에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발표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아름답고 절제된 문체의 다양한 변주를 보이고 있는 작품 세계로 문단의 높은 평가와 독자들의 사랑을 동시에 이끌어내고 있다. 소설집으로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속삭임, 속삭임』, 장편소설로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겨울, 아틀란티스』, 그리고 산문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 등이 있다. 1992년 「회색 눈사람」으로 동인문학상을,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현재 서강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이문열·이청준 등 우리 문학을 프랑스에 소개하는 뛰어난 번역가로도 활동하여, 공동 번역한 최인훈의 『광장』으로 1994년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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