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적인 세계 천착으로부터 현실에 몸둘 바를 괴로워하는 고통으로 옮겨온 그는 세 번째 시집 『물 속의 푸른 방』에서 다시 아름다운 꿈의 탐구자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다. 그는 추하고 불순한 현실의 저 바깥 혹은 그 깊숙이에, 순결하고 명징한 세계가 있음을 꿈꾸며, 그 꿈을 캐내는 것, 또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 시인의 몫임을 확신하며 그 몫을 자신의 운명으로 수락한다. 그 모습은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이지만, 우리는 이 혼탁한 나날의 진부하다는 진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의 그 같은 추구는 더욱 귀중해진다.
[시인의 산문]
부드러운 힘 안으로 안으며 무르익어, 건드리면 부서질 듯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알 같은 시, 결코 구부러지지 않는 그런 시를, 빈 듯 그득하고 속이 차서 터질 것만 같은…… 곡식과 양념을 곳간 가득 채우고 심지가 바로 박힌 그런 말들의 마을, 그 한가운데서 눈보라 뒤집어 뜨고도 중심을 잡고 있는, 일회용 반창고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 개울에 흘러가는 물소리 같은 시를, 이땅에 뿌리내리고 하늘로 발돋움하는, 어둠이 아니라 어두울수록 더욱 영롱한, 마음 가난한 이웃과 서러운 내 누이의 창에 조그마한 촛불이 되어주는 시, 그런 시 한 편을 쓸 수 있었으면. 들꽃처럼 호젓이 학처럼 고고하게, 하지만 다정하고 낮게 스며드는, 없어도 그만, 있으면 한없이 그윽한 시를 쓸 수만 있다면…… 발바닥까지 하늘로 밀어올려주는, 어둠을 흔들어 깨우며 불빛이 되는, 이윽고는 나의 따뜻한 무덤이 되어줄 그런 시 한 편을 빚을 수만 있다면, 유리알의 시를……
– 「유리알의 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