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89년 5월 30일 | ISBN 9788932003979

사양 신46판 176x248mm · 159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시집에서 기형도는 일상 속에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시 세계는 우울한 유년 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며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공간 속에 펼쳐 보인다.

[시인의 산문]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분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 詩作 메모 (1988.11)

작가 소개

기형도 지음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했으며 19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문화부·편집부 등에서 근무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독창적이며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1989년 3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이 있다.

독자 리뷰(4)

독자 리뷰 남기기

5 + 5 =

  1. 장기성
    2003.05.08 오전 12:00

    이 시를 읽으면 시간 여행이라도 하듯이 나의 유년 시절로 이동하게 된다. 난 유난히 엄마를 따라 다녔었다. 엄마가 나를 두고 외출이라고 했을 때는 난 대문 위 담장에 올라가 엄마를 기다린다. 이 시에서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엄마를 기다리는 소박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나 역시 담장 위에 올라가 보다 멀리 보면서 엄마를 좀 더 일찍 보고 싶은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
    이런 기억은 유년 시절에 보다 간절하게 느껴진다. 엄마의 존재가 그만큼 거대하게 느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오는 어버이 날에는 바쁘더라도 집에 전화 한통 해서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 겠다.

  2. madmajor
    2003.04.29 오전 12:00

    …………한자를 잘모르겟는데
    책전체에 나온 한자들 나온 파일은 없나요?

  3. daegalee
    2000.06.08 오전 12:00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대학입학. 새내기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던 때에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선배님 한분이 이책을 주셨이죠. 손때가 곱게 뭍은 시집. 저도 언젠가 이런 시집을 갇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집만큼 손에 들고 손때뭍혀가며 읽어나갈 시집은 드믈더군요.
    ‘빈집’- 이 시, 건방지게 말합니다. ‘빈집’은 기형도의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입니다. ‘갇힘의 시학’-저는 기형도를 말할때 늘 이렇게 말하고는 하지요. 그의 시안에는 어려운 유년과 사랑이 갇혀 있습니다. 이 두가지 세계만으로 기형도는 이리 훌륭한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고. 아쉽게도 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단지 ‘갇힘’만으로는 이룰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갇히면서도 움지이는 바람과 같이 아버지의 ‘풍’과 같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러면서도 움직인 그 자리에는 늘 함께하는 어려움. 이 어려움에는 전망이 없습니다 김현선생님께서는 ‘그로테스크 시학’ 이라고 말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요 그 누가 기형도 처럼 극단적이겠습니까 거기에서 저는 희망을 얻습니다. ‘적어도’ 나는 이처럼 어렵지는 않다고. 이게 바로 카타르시스라는 것일까요. 저는 황동규시인보다 더 극적인 시는 바로 기형도라고 생각합니다.
    ‘기형도’-행복을 찾아 떠났으나 언제난 불행을 먼저 찾은.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삶을 누릴려고 했던. 기형도. 이름마저 ‘시인’다운 것은 무엇의 힘일까요?

    감히 기형도를 말했습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년과 사랑을 벗어난 시를 쓰고 있을지. 아직도 아픔을 헤메이고 있을지.
    역사보다더. 사람의 본질을 아파한 시인. 기형도. 오늘밤. 그를 다시 꺼내 읽어보렵니다.

  4. 익명
    1999.12.08 오전 12:00

    서평을 써놓으시지 않으셨군요. 혹, 부러 비워두는 편이 낫다고들 생각하신 거라면 죄송하지만. 음, 짧은 낱말이라도 남기고 가고 싶어서 들어와봤습니다.

    제게 이 시집은 까다로운 애인같더군요. 제 기분을 쉽게 맞춰주지도, 제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지도 않고 언제나 자기의 느낌과 생각 안에 잠겨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런 애인.

    제가 말이 없어졌을 때, 세상이 더없이 시시해졌을 때, 자꾸만 창 없는 골방에 기어들어가고 싶을 때, 이 애인은 살며시 다가와 제 옆에 앉더군요. 그리고는 자기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예민한 아가미로 이 거친 세상을 숨쉬면서 겪었던 신산한 고통과 두려움과 절망 같은 것을 나직한 목소리로 밤새워 들려주었습니다. 그 때 제게는 이 애인 하나 밖에 없었지요. 저는 다른 사람이 찾을 수 없는 깊고 깊은 굴 속에 들어와있었으니까요.
    제가 그 깊은 곳에서 나와 다시 세상에 섰을 때, 세상의 공기를 다시 마시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소리높여 외치고, 제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을 때. 애인은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제 곁에 없었습니다. 그가 왔을 때처럼 갈때도,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한 올 없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광장에 있을 때, 제 애인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저는 이미 너무 바빠져 있었고, 그 나직한 목소리에 귀기울이기에는 주변의 소리가 너무 커다랬지요. 간간히 한숨이 섞이는 쓸쓸한 빛깔의 그 이야기는 광장의 사람들에게는 비난받아 마땅할 사치의 일종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애인을 비난하는 저의 동료들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지요. 애인에 대한 믿음과 기댐은 제게도 벌써 낡은 것이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헤아릴 수 없이 흘러 지금 저는 밀실도, 광장도 아닌 어떤 잘생긴 문지방위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잠시 다리를 쉬고 이쪽 저쪽을 살피고 있는 중이지요. 아,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가 저쪽에 저 가까운 곳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습니다. 밀실에 가 있을 줄 알았던 그가 이 곳에, 남들이 ‘경계’라고 부르는 곳에, 남들이 조금은 멸시하고 조금은 두려워하는 이 곳에 있었을 줄이야. 조금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이렇게 있었을 줄이야. 믿을 수가 없군요.
    예, 저는 이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볼 참입니다. 그동안, 춥지는 않았냐고. 싱거운 인사부터 시작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