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날의 삽화

박완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2년 5월 2일 | ISBN 9788932013312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26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구체적이고 친근한 소시민적 일상사의 여러 모습들을 자기 반성적인 시선으로 감싸안고 있는 이 소설은, 비판과 애정의 어느 한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는 작가의 균형잡힌 시각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 소시민적 삶의 한 충실한 풍속도를 이룸과 동시에 계층적 세대적 한계를 넘어 현대적 삶의 일반적 풍속도를 이루는 폭넓은 의미의 자장을 획득해낸다.

박완서의 소설들은 늙음의 과정을 작별의 아름다운 의식(儀式)으로 바꿔놓고자 하는 감동적인 노인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집의 제목에 ‘저문 날’이 들어간 것은 그것이 인생의 황혼기를 의미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우리 사회가 노령 인구의 증가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면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 최근의 박완서의 소설들은 거기에 대한 응답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보편적인 문제의 새로운 제기이면서, 동시에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의 모색이고, 아름다운 작별을 가능하게 하는 늙음의 철학적 수용이다.
―김치수의 해설 「젊음과 늙음의 아름다운 의식」에서

실상 오늘날 소시민적 삶의 양태란 한정된 계층의 범주를 넘어서, 현대적 삶의 일반적인 풍속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점에서 박완서의 문학이 그리고 있는 소시민적인 삶의 꼴은 박완서의 문학이 지닌 계층적・세대적 한계를 넘어서는 폭넓은 의미의 자장을 거느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박완서가 그리는 저무는 세대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무기력한 이기주의에 의해 한없이 작아져가는 우리 자신의 왜소한 모습과 부딪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박완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부딪혀 끊임없이 갈등하고 분개하는 소시민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아닌 것이다.
―박혜경의 해설 「저문 날의 삽화, 혹은 소시민적 삶의 풍속도」에서

<신판 해설>
젊음과 늙음의 아름다운 의식
_김치수

1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은 대부분의 경우 반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고 아침식사를 하면 일터로 나가 일을 하고 저녁이면 집에 와서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자리에 눕는다. 그사이 일이 생기면 친구들과 만나 의논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결하다 보면 일주일이 흘러간다. 이렇게 일상적 삶을 요약하면 사람이 사는 것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반세기도 훨씬 전에 어떤 작가는 ‘기상, 전차,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의 일, 점심, 전차, 네 시간의 일, 저녁식사, 취침, 그리고 월 화 수 목 금 토 똑같은 리듬으로’라는 말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을 절망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산업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개인의 삶이 얼마나 기계화되어 버리고 개성을 잃어버리고 자동화되어 가고 있는지 낮지만 뚜렷한 목소리로 상기시킨다. 그러나 개개인이 살고 있는 삶을 보다 면밀하게 관찰해보면 마치 사람의 얼굴 모습 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것처럼, 그리고 그들의 지문 하나하나가 다른 것처럼 각자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도 이처럼 단순하게 요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작품은 개인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 하나하나가 어떻게 다르고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소설은 동일한 시대나 사건을 체험한 집단적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개인은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성장 과정이나 타고난 성격에 의해 하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한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주장은 자신이 잘못 볼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얼핏 보면 신념이 강한 사람 같지만 사실은 가장 경계해야 할 독선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제시되는 개인의 삶은 그것이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전제로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삶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앙드레 지드 같은 작가가 자신의 소설이 ‘더 계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쓴 것은 소설 속의 삶의 성격을 규정하는 적절한 말이다. 소설은 ‘인생의 한 단면’이며 ‘사회의 한 단면’이다. 내가 본 바로는 이렇지만 다른 사람이 본 바로는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한 단면’이다. 그 단면을 통해서 내가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삶을 보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소설이다. 박완서의 소설집 제목에 ‘삽화’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도 ‘단면’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완서의 삽화는 수많은 인생의 단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적 삶의 단순한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읽어가는 동안 그것이 주는 감동은 어느 순간 작가의 소설적 장치가 일상의 늪에 감추어진 깊은 진실에 도달하게 하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

2
이 작품집에 수록된 거의 모든 소설은 대부분 가족 관계를 그 중심 모티브로 삼고 있다. 거의 모든 작품이 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과 그것을 중심으로 한 가족 관계를 다루고 있다. 첫번째 작품인 「로열 박스」는 젊은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관계를, 「素描」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초대」에는 사업하는 남편과 신혼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그 부인의 관계를, 「저문 날의 揷話 1」은 60대에 접어든 어머니와 입양해서 기른 아들의 관계를, 「저문 날의 揷話 2」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둔 어머니와 옛날의 제자로서 운동권의 남편을 둔 가연의 관계를, 「저문 날의 揷話 3」은 60대에 접어든 여자와 어렸을 때부터 가정부였던 ‘만수네’의 관계를, 「저문 날의 揷話 4」는 퇴직한 은행원과 그 조카들의 관계를, 「저문 날의 揷話 5」는 은퇴한 공직자와 그 아들과의 관계를, 「家」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관계를, 「우황청심환」은 은퇴한 은행원과 그 6촌 형제들과의 관계를, 「엄마의 말뚝 3」은 소설가인 딸과 그 어머니의 관계를,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암으로 죽은 남편과 그 부인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점에서 모두 가족 관계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제외된 두 편의 작품은 시골 출신의 가난한 젊은 여자가 생활비와 아파트를 제공하는 ‘아빠’와 기이한 동거 생활을 하는 「霧中」, 625 때 처형당한 소설가이며 스승인 ‘송사목’ 선생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소설가와 그 가족 이야기인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이다. 그것은 작가의 관심이 적어도 이 작품집에서는 가족 관계 혹은 가정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준다. 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기까지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마련이고 그 결과 하나의 가정을 이룩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작중인물들의 현재의 삶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의 과거로 되돌아갔다가, 그것이 현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밝혀주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소설은 일상적 삶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일상성의 끝없는 반복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일상성이 가지고 있는 소모적인 요소가 우리의 삶의 내면을 끊임없이 갉아먹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죽음의 위협 속에 빠트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에는 젊은이가 화자로 되어 있는 작품이 몇 편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이 든 노인이 화자로 등장하거나 그 노인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작품들이다. 그 노인들은 60 전후의 나이를 먹은 사람으로서 이 작품들이 처음 씌어졌을 때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연령의 사람이다. 표제 작품 가운데 제일 먼저 발표된 작품은 화자가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남편을 둔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시작은 그녀가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못하고 ‘의심’과 ‘미움’과 ‘속임’이라는 추상적이고 일반론적인 표현만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고해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음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중산층의 가정 주부로서 평생을 결벽증과 완벽주의로 일관해온 사람답게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자신의 분수를 착실하게 지켜온 그녀가 자신의 고해 내용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녀답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를 의심하고 있는지 말하고 싶지 않으며,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지 고백하지 않고, 누구를 왜 속이는지 말하지 못한다. 딸만 셋을 둔 그녀는 젊은 시절에 남편의 친구가 죽어서 고아가 된 아이들 가운데 막내인 영택을 양자로 삼아 길러오다가 그 아이가 성장하여 남편과 진짜 부자 사이처럼 잘 지내는 것을 보고 남편과 영택 사이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남편이 영택의 진짜 아버지일지도 모르고, 영택이 남편의 친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그녀로 하여금 두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고 그 둘 사이를 이간질시키고자 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영택이는 당신 아들이죠”라고 윽박지르면서 영택에게는 어머니로서 다정하게 대하는 속임수를 쓴다. 교활하고 용의주도한 그녀의 행동은 영택이가 친구들과 함께 지하실 방에서 불온 서적을 읽고 불온 문서를 만든 사실을 알림으로써 남편으로 하여금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소리와 함께 당장 나가라는 호통을 치게 하고 두 사람 사이가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다. 그 때문에 그녀는 손자들에게 TV에서 대학생들이 농성하는 장면과 연행되는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그런데 바로 그 행동이 영천에 살던 그녀의 어린 시절의 묻혀 있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어린 시절 용수를 씌워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는 죄수들을 그녀의 부모가 보지 못하게 했지만, 그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도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일제 시대에 지배자들이 독립운동을 악으로 규정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군사 정권 아래서 불순한 것으로 규정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신부님에게 고해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영택이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공무원 생활을 하는 자신의 남편의 신분에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고, 평온한 자신의 일상생활을 깨트릴 가능성이 있는 것은 비록 자신이 아들로서 키워온 영택이마저 버릴 수 있게 만든다. 그녀는 고아가 된 영택이를 자신의 아들처럼 키웠지만,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이기주의에서는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객관적 판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아와 타자라고 하는 배타적 선택과 혈연적 관계가 적극적으로 작용한다. 그녀는 그 사실을 고해하지 못한 것 때문에 신부님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스스로를 수긍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일상적 삶이 진실을 가장한 위선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그런 점에서 그녀 자신이 내면적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저문 날의 삽화 2」에서는 운동권에 가담했다가 수사기관으로부터 모진 고통을 받아 정신질환을 앓고 요양원에 입원한 아들을 찾아간 어머니가 나온다. 그녀는 30이 가까워진 아들이 하루 빨리 완쾌하여 사회에 복귀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때 아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에 목숨을 걸고 싶어했고 그때 그의 젊음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던가” 감탄을 하고 “이상 대신 공포가 차지한 아들의 초라한 모습이 내 마음을 무두질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가 앞의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할 만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어머니’는 운동권에 가담한 아들의 젊음을 아름답게 보는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와 사회에 복귀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앞의 작품에서 운동권에 가담한 영택이를 집에서 나가게 한 것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태도이다. 이러한 차이를 혈연 관계의 유무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혈연을 토대로 한 가족이기주의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인생의 한 단면’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두 작품의 화자는 서로 다른 사람으로 각자의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두번째 작품에서 화자는 자신이 국어 교사로 있었던 과거의 제자 ‘가연’이 운동권 남편으로 인해서 겪고 있는 고통을 알게 되자 그녀를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주고자 노력한다. 화자는 가연의 남편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면서 자신의 아들도 가슴에 화염병을 품고 살고 있다고 이해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래서 그녀는 ‘황폐를 처바르고 사는’ 가연을 이해하고 동류의식을 느끼며 일상적 연대감마저 갖는다. 그 때문에 그녀는 옛 제자와 음식을 나누고 그녀가 자립할 수 있도록 교사 자리를 구해주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가연의 남편의 여성관에 대해서도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판검사나 의사가 당연하게 받는 처가 덕을 왜 운동권 인사는 감지덕지 비굴하게 받느냐”고 항변하는 그의 남성우월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더구나 담뱃불로 가연의 허벅지를 지지는 행위는 그의 운동 자체가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사람이 가정 안에서는 남성우월주의에 의해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일삼는 것은 싸우면서 닮는다는 또 다른 권위주의의 지배를 의미한다. 마치 판검사나 의사가 처가의 덕을 받는 것이 자연스런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운동권 인사도 자연스럽게 처가의 덕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억압의 대상이었던 여자가 억압의 주체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억압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화자가 가연의 남편을 비난하자 가연은 오히려 자신의 남편을 비호한다. 그것은 투쟁의 대상이 너무나 크고 강해서 그것과 싸우다 지친 남편이 자학적인 행동으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심리적 측면을 이해하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부부 관계가 사제 관계를 비롯한 다른 어떤 관계보다 강하다는 일상적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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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날의 삽화 3」은 30여 년을 은행원으로 살아온 남편이 은퇴한 다음 안락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일상적 삶에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았던 ‘분녀’가 끼어든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인 ‘나’는 도자기를 하는 딸 하나를 제외하고는 자식들도 분가시켜 편안한 생활을 한다. 화자는 어린 시절 자기 집 안잠자기의 딸 분녀를 주종 관계로 생각하며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분녀는 주인집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고자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극빈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6・25 때 남편을 비명에 잃고 어렵게 살았지만 아들 만수마저 감옥살이를 하고 있어서 혼자서 손자를 돌보며 생계 유지에 급급해하는 길거리의 노점상을 한다. 화자는 우연히 만난 그녀를 친절하게 대하고 화자를 친정붙이처럼 생각하는 그녀를 동정하여 돈을 보내며 서울에 한번 오라는 인사편지를 한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손자들을 이끌고 서울 집에 와서 번잡을 떨게 되자 화자는 이를 귀찮게 여기고 빨리 떠나게 하고 싶어한다. “그만큼 해주었으면 오늘쯤 떠나는 게 예절이었다”고 느끼는 것은 화자가 성장기에 분녀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가족이란 제도적이고 관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운명처럼 혈연으로 묶여지지 않는다면 성립되기 어려운 관계이다. 비록 혈연 관계로 묶여 있다고 하더라도 함께 살아오지 않은 사람은 가족이라는 편안한 관계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마련이다. 은퇴하고 “남들이 말하는 소위 복 많은 부부”로서 평온한 말년을 보내고자 하는 주인공에게 삶의 간섭을 받는 일체의 사건이나 인물이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단순한 소시민적 이기주의라고 말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삶을 차별화할 수밖에 없는 노년기의 자기 정리의 방법이다. 지나온 삶에 대한 조용한 관찰을 통해서 자신에게 닥쳐왔던 고난의 순간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왔는가, 또 내면으로부터 오고 있는 죽음의 끝없는 위협을 의식화시키고 그것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었는지 반성한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직이나 직장에서 은퇴한 주인공들 부부의 삶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남들이 말하는 소위 복 많은 부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큰 감동이 없을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복 많은 부부’라는 것은 그들이 큰 어려움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왔으며 한을 남길 만큼 이루지 못한 것도 없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 속에서 과거에 엄청난 사건을 겪었고 현재에도 끝없는 문제에 부딪쳐야 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처럼 평탄한 삶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큰 뜻을 가지고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거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단순한 월급쟁이들은 대부분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부과된 일에만 충실하고자 한다. 그들은 변화의 물결에 자신이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간접적인 체험자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과 적극적으로 부딪치고 대항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깊은 절망에 빠지거나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의 보편적 현상 가운데 하나로 수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피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다음에 주어지는 상황에 충실함으로써 생존의 방법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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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문 날의 삽화」 연작에는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그것은 독재적인 군사정권 아래서 거기에 저항하는 젊은이의 희생이 상처로서 나타나고 있다. 「저문 날의 삽화 1」에서는 양자로 키운 ‘영택이’가 대학생이 된 뒤에 운동권에 가담함으로써 화자의 남편으로부터 “못된 놈 같으니라구, 이게 고작 너를 길러주고 공부시켜준 은인한테 할 짓이냐, 천하에 배은망덕한 놈, 썩 나가지 못할까, 꼴도 보기 싫다”라는 질책을 받는다. 공무원 신분인 남편이 운동권 아들을 둔 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까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군사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는 것을 정말로 나쁘게 생각한 것일까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작중인물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다. 「저문 날의 삽화 2」에서 화자의 아들은 운동권에 가담했다가 수사 기관의 고문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그로 인해서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 화자는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만든 수사관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 완쾌하여 요양원을 벗어나기만 바라고 있다. ‘사회에 복귀’한다는 표현은 사회에서 쫓겨난 것을 전제로 한다. 화자는 그가 쫓겨나기 전에 행한 일이 정당한 일인지 아닌지 묻지 않고 그가 완치되어 사회에 복귀하는 것만을 관심으로 갖고 있다. 그것은 화자가 사회에 대한 의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보편적인 ‘어머니’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 화자가 옛 제자 가연의 남편에 대해서 보인 태도도 비슷하다. 가연의 살림을 도와주던 친정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도와줄 수 없게 되자 화자는 가연에게 교사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생계를 해결하게 한다. 화자가 가연에게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은 가연의 남편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도’ 운동권에 가담했었다는 것을 밝히고 난 다음 음식도 나누어 먹고 가연의 취직 자리도 마련해주는 것으로 입증된다.「저문 날의 삽화 5」에서 공무원으로 은퇴한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 서울을 벗어난 교외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아무런 탈 없이 건강한 몸으로 정년을 맞이하고 자식들을 분가시키고 조금 외롭지만 두 내외만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고 있다. 숲과 나무를 보며 자연 속에 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 그들은 각자가 자신의 방을 갖는 행복도 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이 사는 곳이 그린벨트에서 풀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곳으로 더 멀리 이사갈 생각을 한다. 자식들이 자주 오지 못해도 마음에 거리끼지 않을 것이고 녹지에서 자연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어느 날 아내가 자기 방에서 하는 유일한 기도가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의 아내에게는 평생 낫지 않는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친정에서 경험한 죽음의 아픔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폭격으로 죽었고, 그녀의 오빠는 6・25 때 국군으로 전사하였다. 그녀가 적어도 자기 가족들이 “태어난 순서대로 죽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은 가정을 행복하게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마지막 염원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 날 사돈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아들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아들 내외 중 하나는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것은 아픔이나 상처가 없는 인생이란 없다고 하는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그것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아들 내외가 자동차를 사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사실을 부모인 자신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그들은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저문 날의 삽화 4」에서 은퇴한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 성묘를 가면서 택시를 타고 가서, 마이카 족인 조카들이 아저씨인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데 섭섭한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사촌 동생이 죽은 뒤에 5촌 조카 관수의 등록금을 두 학기나 마련해준 사실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성묘 가는 길에도 자동차를 저희끼리만 타고 온 관수에 대해서 주인공은 섭섭함을 토로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자신도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사서 몰고 다닌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다른 운전자들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자신의 교통위반 범칙금을 아내가 몰래 납부하는 것도 모른다. 주인공은 중고차로 고속도로에 나갔다가 고장이 나서 아내와 함께 밀고 가면서 젊은 시절 김장 배추를 실은 리어카를 밀고 가던 생각을 하게 된다. 가난한 시절에는 배추를 사서 리어카에 싣고 밀고 가는 것이 힘든 일이었지만 뿌듯한 행복감이 느껴진 반면에 지금은 고장난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이 대단히 초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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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작중인물들의 일상생활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사는 나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산다는 것의 양상과 의미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이어서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작품 속에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사건들과 그것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관계와 심리적 추이가 정밀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들의 삶에 끊임없이 관계를 하고 있는 것이 죽음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집의 첫번째 작품인 「로열 박스」에서 아버지의 사업에 후계자가 되기로 된 형 준기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새로운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동생 준형은 원래 사학을 전공하고 공부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후계자 수업을 열심히하다가 정신질환을 앓는다. 「저문 날의 삽화 1」에서 영택이가 고아가 된 것은 여덟 살 때 일이며 그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2년에 걸쳐 병사함으로써 외할머니의 손에 맡겨진다. 6남매의 막내인 영택이만 아버지 친구 집에 입양하지만, 나머지 5남매는 외할머니의 손에 길러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로 보면 다행스런 일이지만, 노인으로 보면 그녀의 욕된 장수가 징그럽지 않을 수 없다. 영택이의 외할머니의 장수는 영택이 부모의 죽음과 상관 관계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결과로 평가된다. 「저문 날의 삽화 3」에서 분녀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구멍가게를 내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었으나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가정부살이의 운명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농부에게 시집을 가서 만수를 낳고 다시 독립해서 살 수 있게 되었으나 남편이 파편을 맞아 과부가 됨으로써 다시 가정부살이를 하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으로 운명이 달라진 만수네는 다시 만수와 함께 충청도에 집과 땅뙈기를 마련해준 주인집의 배려로 한번 더 독립할 기회를 갖지만, 만수가 공장에서 잘못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자 며느리가 출분하여 만수네 혼자 옥바라지와 손자들 양육을 맡아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저문 날의 삽화 5」에서 은퇴 후 교외에서 숲과 나무를 보며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는 주인공은 태어난 순서대로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아내의 과거에서 많은 죽음을 보게 된다. 일제 때 폭격으로 죽은 아버지, 6・25 때 국군으로 전사한 오라비를 가진 아내가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들만이라도 자기들보다 나중까지 살기를 기원하지만, 아들 내외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건을 겪는다. 「家」의 화자 성구의 외할머니는 5남매를 낳았으나 일제 때 전염병으로 3남매를 잃고 남매만 기른다. 그녀는 6・25 때 장남을 잃게 되자 남편을 독려하여 45세의 나이로 아들을 하나 더 낳는다. 교하댁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남편이 병들자 유산으로 남겨진 땅을 지키는 무한한 노력을 보이고 남편이 죽자 방을 달아내서 방세로 수입을 올린다. 그녀의 생명력은 그녀 주변의 무수한 죽음을 딛고 살아나며 진가를 발휘한다. 「엄마의 말뚝 3」에는 80 고령의 어머니가 골절상을 당하여 대퇴골과 골반을 쇠막대로 연결하는 수술을 받고 7년 동안 고요하고 참담하게 살다 간 이야기이다. 6・25 때 북쪽으로부터 피난 온 어머니는 죽으면 아버지처럼 화장해서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라고 했지만, 살아남은 조카들에 의해 묘지에 묻힌다. 장수하면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게 되어 있지만, 어머니는 늙어서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노망이 들어 젊은 시절의 동네 반푼수의 이름을 불러 자손들을 놀라게 만든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는 결혼 후 35년 만에 암에 걸려 죽어가는 남편을 돌보는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에게 젊은 시절에 가장 아픈 기억으로는 오빠가 결혼 3년 만에 아내와 연년생의 두 아이를 두고 6・25 때 비명으로 죽은 사건이다. 이러한 참척의 아픔을 겪고도 살아남은 어머니와 올케에 대한 기억을 가진 주인공은 폐암에 걸린 남편의 시한부의 삶을 지켜보는 아픔이나 슬픔을 여덟 개의 모자로 상징화시키고 있다. 죽어가는 생명의 끈을 조금이라도 붙들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을 ‘모자’라고 하는 구체적인 사물로 표현하고 있는 소설적 장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써 비존재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존재하게 하고 생활 속에 살아 있게 만든다. 박완서의 소설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죽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삶의 끝인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임을, 삶으로부터 그토록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양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죽음이 삶에 개입하고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그것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남들이 보기에 ‘복 많은’ 노인처럼 보이는 이들 주인공들의 삶은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완전히 행복한 것도 아니고 언제나 의기투합하는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각자 존재의 외로움도 느끼고 삶의 허무감도 지니며 산다. 그 외로움이나 허무감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문제로 삼기에는 하찮게 보이지만 나날의 생활이란 그 작은 것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 큰 사건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대머리를 감추고자 기울이는 남편의 노력을 보는 것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는 아내가 그것을 몰라주는 남편을 타인으로 느끼고 40여 년의 부부 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질문한다(「저문 날의 삽화 3」). 운동권에 가담했다가 정신 치료를 받는 아들의 요양원 생활 4년 동안 “피를 말리게 가혹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부부는 “쾌락이라 이름 붙인 걸 탐한다는 게 아들의 고난 앞에서 차마 못 할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하고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저문 날의 삽화 2」).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설친 남편이 사랑방으로부터 안방으로 스며들어 “아내의 시들고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그 온기를 탐”하기도 하고 “관능보다 진한 슬픔 때문에 발기하지 않는 노처(老妻)의 젖꼭지에 이빨 자국을 내기도” 한다(「저문 날의 삽화 5」). 뒤늦게 차를 산 남편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으면 주인공은 최악의 상황을 향한 상상력으로 삭막하고 깔깔하고 비명도 지를 수 없는 고약한 기다림을 되풀이한다. 그 기다림은 “앙탈을 부리며 서로의 사랑을 자극할 감미로운 기대가 섞인 신혼의 기다림도, 바가지를 긁을 열정으로 지글지글하던 중년의 기다림도” 아니고 “기도처럼 화평한 노년의 기다림”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운전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한마디 말도 못하는 그녀의 고통은 남편의 운전 이상으로 “못 볼 꼴을 볼까” 두려워한다(「저문 날의 삽화 4」). 팔순을 바라보는 친정어머니가 세상의 변화를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며 백 살을 살아도 죽을 때 억울할 것 같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은 주인공은 자신의 일상이 그렇지 않은 데 절망한다(「저문 날의 삽화 1」).이러한 작중인물들의 삶을 보면, 그들이 비극적인 체험들을 하면서 끊임없이 희구하는 것은 ‘보통 때’의 삶이다. 폐암과의 투병 생활을 하는 주인공이 “하고 싶어 한 게 별게 아니라 보통 때처럼 구는 거였”고 “보통 때처럼 저녁 반찬이 뭐냐부터 묻고” 소주를 반주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남편을 “보통 때처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때처럼’ 바라보는 척하고 자신의 마음이 ‘보통 때’와 다르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아픔을 아픔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고통으로 표현하지 않는 삶이 아름다운 늙음의 방법이다. 인생을 오래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사람이란 일생 동안 많은 험한 꼴을 보게 되지만 그때마다 매순간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면화시킴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면 새로운 삶의 순간이 다가오고 그 모든 것이 결국 삶 전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늙음의 철학이다. 보통 때와 다른 것을 싫어하는 것을 보수적이라고 폄하할지 모르지만 누구나 혁명가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며, 보통 사람은 ‘보통 때’처럼 사는 것이 삶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 근본을 무시하고 큰 감동만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혁명가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선동하는 행위이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아픔이나 슬픔을 포용하며 죽음마저도 삶의 한 양상으로 보고자 하는 박완서의 소설들은 늙음의 과정을 작별의 아름다운 의식(儀式)으로 바꿔놓고자 하는 감동적인 노인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집의 제목에 ‘저문 날’이 들어간 것은 그것이 인생의 황혼기를 의미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21세기에 들어서 우리 사회가 노령 인구의 증가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면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 최근의 박완서의 소설들은 거기에 대한 응답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보편적인 문제의 새로운 제기이면서, 동시에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의 모색이고, 아름다운 작별을 가능하게 하는 늙음의 철학적 수용이다. 거기에는 박완서의 주인공처럼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전도서 첫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헛되고 헛되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라는 깨달음에 도달해야 하고 자신의 일생에서 “조금도 새롭지 않은 나날들, 예전에도 수없이 저질렀음직한 잘못과 어리석은 짓, 헛된 욕망의 되풀이는 사는 걸 쉽고 익숙하게도 했지만 때로는 비명을 지르고 싶도록 진부하고 무의미하게도 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박완서의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대부분의 서양 현대 소설에서 소설의 결말 부분에 주인공의 개심conversion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목한 바 있는 르네 지라르의 탁월한 분석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작품집을 다 읽고 난 다음까지 첫 작품 「로열 박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아버지의 “아가, 외롭쟈” 하는 말에서 처음으로 시아버지의 육성과 이를 듣는 젊은 며느리의 감동이 생생한 기억으로 살아 있다. 젊은 며느리의 모든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늙은 시아버지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며느리의 고통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것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며느리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할뿐이다. “아가, 외롭쟈”라는 말은 인간은 누구나 외로울 수밖에 없고 산다는 것은 각자가 그 나름의 외로움을 지니고 사는 것이며 그는 그 진실을 알고 젊은 며느리의 고통을 위로하고 있다. 박완서의 소설의 감동은 일상적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따뜻한 이해에 있다.

작가 소개

박완서 지음

(朴婉緖)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재학 중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불혹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2011년 1월 영면에 들기까지 40여 년간 수많은 걸작을 선보였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중앙문화대상(1993)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한무숙문학상(1995)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인촌상(2000) 황순원문학상(2001) 호암상(2006) 등을 수상했다. 2006년 서울대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창밖은 봄』 『배반의 여름』 『도둑맞은 가난』 『엄마의 말뚝』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의 작품집과 『휘청거리는 오후』 『목마른 계절』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도시의 흉년』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의 장편소설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산문집과 동화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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