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구운몽

최인훈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6년 11월 10일 | ISBN 9788932008486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42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광장이 없는 밀실과 밀실이 없는 광장-남과 북의 분단과 대결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이념적으로 접근한 현대 한국 문학의 고전. 주인공 이명준의 비극과 갈망은 우리 자신, 우리 민족의 바로 그것이다.

이 전집판이 가로쓰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 동안 차츰 자리잡아온 가로쓰기의 관행에도 맞추고, 새로 나온 표기법에도 맞출 수 있게 된 이번 판이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운 형식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판에서도 몇 군데 내용이 고쳐졌다. 언제나처럼 큰 흐름에는 영향이 없고 그 흐름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이 작품의 첫 발표로부터는 30년,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날로부터는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겪은 운명의 성격 탓으로 나는 이 주인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주인공이 살았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구조 속에 여전히 필자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준은 그가 살았던 고장의 모습이 40년 후에 이러리라고 생각하였을까-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당자가 아니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현실의 결과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한국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유보 없는 꿈과 희망에 휩싸인 시대를 산 사람이다. 그의 생전에 결국 그런 꿈과 희망이 쉽사리-적어도 그의 감각만큼은 그렇게 유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된 것이지만, 40년이 지난 다음에 지금 같은 상태라고는 다시금 짐작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무의식을 짐작해보는 일은 그렇다고 하고, 작가인 필자의 사정을 말해본다면,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필자 자신의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확실히 떠올릴 수 있어서가 아니고, 어렴풋이-지금 돌이켜 생각해봐서 그런 느낌이 든다. 주인공이 마주친 인생 문제도 상대적으로 시대와 더 관련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보지만 그 두 부분이 깨끗이 나누어진 모양으로 제출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문제’라는 표현은 다만 비유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는 먼저 이렇게 저 문제는 다음에 저렇게, 하는 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인생 ‘문제’의 성격이다. 그 성격에 비교적 어울리는 형식이 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독자로서의 자기와 만난다는 자기 인식으로 돌아온다.

이번 판에서 고친 부분에서도 그 무렵의 주인공의 능력과 자연스러움에 변화를 주는 일 없이 그 무렵의 그만한 젊은이의 생활과 생각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 1989년 4월 30일, 최인훈

[전집판 서문]

이번 개정판에서 고친 것은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바꾼 일이다. 예술로서의 소설 문장의 본질은, 표기법에 따라서 높고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또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표기를 가지고 나타내고자 하는 심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례적 표현과 어떤 심상이 오래 결합되어 쓰이고 보면, 심상의 형성 과정-의식과 현실 사이의 싱싱한 갈등의 자죽이 관례적 표현으로서는 나타내기가 미흡해 보이는 때가 올 수 있다. 이럴 때는 그 표현이 낡아진 것이 아닌가 알아보는 것이 좋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은 여럿 되겠지만, 그 한 가지는 의식이 보다 더 깊게 현실과 어울리는 힘을 가지게 될 때다.

『광장』은 이번으로 다섯번째 개정인데, 나는 이 여러 번의 개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적어도, 『광장』이라는 이름의 작중 현실에 대해서는, 처음 쓸 때보다 훨씬 익숙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번 개정에서는 보태야 할 데라든지, 빼야 할 데, 플롯에서 중요한 데를 바꾸고 새로 맞춰넣어야 할 데가 거의 저절로 떠올랐다.

다음에 고친 것이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고친 일이다. 우리 소설 문장은 한자어를 한글 표기로 하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언어 표현의 본질인 의식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과정을, 이미 만들어진 한자어에 밀어버리고도 그런 줄 모르게 될, 표기에서 오는 함정을 감추고 있다. 이 문제를 풀자면, 반드시 비한자어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즉 그 한자어를 문맥 속에서 더 꼼꼼하게 정의하는 것도 좋겠지만, 너무 번거로워진다.

이 판에서는 비한자어로 바꾸는 길을 골랐다. 그러나 관습에서 너무 멀어져야 할 때는 거기서 그치도록 했다. 그러나 부피로 보면 그대로 둔 데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 같은 표기상의 바꿈 말고도, 표현도 바꾸는 것이 좋다고 느낀 데는 눈에 띄는 대로 바꿨다. 작자의 사정으로, 이런 일을 하기에 넉넉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개정 내용들이, 나의 짐작으로는, 이명준의 사람됨과 그의 걸어간 길을 독자에게 좀더 가깝게 느끼게 하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1976년 7월, 저자

[일역판 서문]

이 땅 위에 사람이 살기 비롯한 것도 오래 되거니와, 앞으로도 사람은 오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짐작이 얼마쯤 뚜렷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사람은 초목이나 짐승과는 달라서, 이 짐작이라는 것을 나면서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저편에서 가르쳐주고, 제가 깨달아간다는 것이 사람의 삶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 삶의 짐작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닫기는, 혼자서 태어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허둥지둥하게 된다. 짐작이 안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없어져버리거나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세상은 버티고 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짐작을 가지고 살고 있건 아니건, 아랑곳없다. 그럴 때 사람은 산다느니보다 목숨을 이어간다는 말이 옳겠다. 다시 말하면, 초목이나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서 때와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 삶을 탐탁지 못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짐작을 알아내보려고 애를 쓴다. 머릿속에 있는 골이라는 기관을 짜본다든지, 몸을 놀려본다든지 한다. 그러나, 골을 짠다든지, 몸을 놀렸을 때 그들은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에 부딪히기가 일쑤다.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기나 하려 들면 대뜸 몸을 다치게 된다.

여기서 주저앉아버리면, 그 사람은, 산다는 일을 무언가 신비한 도깨비 놀음처럼 알게 된다. 무서운 낭떠러지 언저리 따위에는 얼씬도 않으려 들고, 눈익고, 발에 익은 골목만 골라 다니면서 하다못해 푸근한 인정이나마 놓치지 말자고 든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 쪽을 골라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짐작이 들었노라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거의 모두, 그들의 짐작이라는 것은, 함부로 버리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짐작이다. 버린 것-그것은 무엇일까? 귀한 어떤 것이다. 버리기 어려운, 버려서는 안 될 어떤 것이다. 그것을 잃지 말자는 마음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그 짐작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선뜻 몸과 마음을 내키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한 있다.

이 얘기의 주인공도 그런 사람이다. 초목처럼 살기도 싫고, 그렇다고 계산이 다 되지도 않은 데를 잔인하게 잘라버리고 사는 데도 내키지 않는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이라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힘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주인공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그리고 이 주인공과 시대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힘이 없다. 그래서 그가 한 자리 얘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다. 되레 그렇지 못한 탓으로, 많건 적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표징으로서 이 소설 속에 나타난 것이다.

이 주인공이 만난 운명은 그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것, 힘에 부쳤다는 것-이런 까닭으로 이 주인공은 파멸로 휘말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일 또한 주인공 한 사람의 생애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이 국토에 시대를 함께한 숱한 사람들이 만난 운명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란, 정말 사람보다는 얼마쯤 분명한 걸음걸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뜻에서 이 주인공이 걸어간 길도 그 나름대로 상황을 밝혀내는 몫만은 해낸 셈이라 볼 수 없을는지.

남은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다.
그저 막연히, 산다고 절로 풀릴 숙제일 리 없지만, 어쨌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소설이 아니라 역사에 들어간다.

살아 있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작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서 큰소리칠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가 쓰러진 데서 한걸음인들 내디뎠다는 믿음을 못 가졌기 때문이다. [일문판: 김소운 역, 『광장』(동수사, 1973)]

[1973년판 서문·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工房)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닷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나를 탓하였다. 그 두 가지 숨은 바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도 없이 그런 위험한 깊이에 내려보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세상 버리게 한 것을 나무랐다. 사람들은 옳다. 그러나 숨은 바위에 대해 알고 있다면 누가 잠수부를 내려보낼 것인가. 우리가 인생을 모르면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인생을 모르면서도 주인공을 삶의 깊이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살아오는 경우 그의 입으로 바다 밑의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요-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그의 연락이 끊어진 데서 비롯하는, 그 밑의 깊이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이명준은 그 암초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사이의 바다 밑 지리며, 심도에 대해서는 송신해주었다.

이명준 이후로 나는 연이어 적잖은 수의 잠수부를 같은 해역에 내려보냈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이라면 이명준이 혹시 목숨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만큼의 심해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슬프다, 그런들 한번 간 사람에게야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저 마음을 달래볼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고, 잘 쓰기만 하면 숱한 잠수 벗들에게 유익할 수 있는 심해 정보의 쌓임이 이명준에서 비롯되었고, 그는 안내 없는 바다에 내려간 용사였음을 다짐하는 일이다.
12년 전에 내가 『광장』을 쓴 것도 바로 용사의 기념비였고, 묘비명의 뜻이었다. 그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묘비명에 보탤 것도 깎을 것도 없다.
다만 바람먼지에 얼마쯤 파묻힌 비면(碑面)의 때를 씻어내는 일을 하였다.
이명준, 나의 친구여. 그제나 이제나 다름없는 나의 우정을 받아주기를. 그리고 고이 잠들라.
1973년 7월 1일, 저자

[1961년판 서문]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巨象)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명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
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가 풍문에 만족지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태도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 것이다.
1961년 2월 5일, 저자

[서문]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새벽』, 1960년 10월

목차

[서문]

광장
구운몽

[해설] 사랑의 재확인·김현

작가 소개

최인훈 지음

1936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법대에서 수학했다(2017년 명예졸업). 1959년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이 『자유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집필과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광장/구운몽』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하늘의 다리/두만강』 『우상의 집』 『총독의 소리』 『화두』 등의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출간했다. 동인문학상(1966),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 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79), 이산문학상(1994), 박경리문학상(2011) 등을 수상했다. 『광장』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으로, 『회색인』이 영어로,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영어와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2018년 7월 별세했다. 사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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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정욱
    2001.05.26 오전 12:00

    광장(廣場)

    광장은 우리네 삶의 터전이자 우리네 몸 자체이다. 광장은 우리네 정신의 거처이자 우리네 몸이 쉬어야 할 또 하나의 집이다. 생각해보면 작게는 나의 머리와 가슴이 광장이 되며, 그것을 포함한 나의 몸 하나가 온전한 광장의 실재가 된다. 또한 내가 거처하는 나의 집이,나의 방이, 나의 방안에 꽂혀있는 책장이, 책장의 책들이 모두 온전하게 광장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바로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의 소통이 바로 광장의 개방성이 될 것이다. 그 광장의 개방성의 문을 일러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을 우린 교감(交感)이라고 하는가? 겸애(兼愛)와 겸손(謙遜)이라고 하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적인 것끼리의 교감이 가장 고차원적인 광장의 교류가 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유대감과 신뢰감이 된다.그러한 인간들의 신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의 고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실존과 사랑과 보편적 진리적 삶의 대한 갈구가 그것이었을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그 고민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 주인공 이명준이 딛고선 광장의 터전인 것이다. 그 개인적 광장의 공허함은 어떻게 충만되며, 그 해결점을 잡을 수 있는가? 그 개인적 차원의 광장의 실존적 문제가 실상은 또다른 타인으로서의 이명준의 고민의 실체이며, 그 실체들의 집합이 대 사회적인 광장의 문제점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대 사회적인 광장의 실존적 문제는 그 단위만 클 뿐이지 실상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와의 밀접한 소통로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이러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광장의 문제들이 개인적 노력으로 얼마 만큼이나 해결될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작은 광장으로서의 개인의 실존적 단위를 인정치 않고, 다수의 분위기로 작은 광장의 실존 자체를 무화시키려는 분위기가 감지될 때, 그때는 개인이나 사회나 위기의 순간이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을 우린 전제주의(파쇼)라 부르며, 그 해악성은 개인의 존엄성의 훼손으로, 나아가 그 개인의 더 큰 단위인 사회 전체를 공포분위기, 즉 전쟁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작은 실존의 단위인 개인으로서의 이명준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 거대한 단위로서의 국가나 사회나 전제주의에 대한 저항이 가치로울 수 있을까? 무모한 제스처에 머물 뿐일까? 이명준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을 풀어보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이 바로 이명준의 삶의 궤적이며, 그 삶의 궤적은 주인공 이명준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남쪽에서의 윤애와의 사랑과 북쪽에서의 은혜와의 사랑이 혹 그 고민과 문제의 해결책은 되지 않을까싶어 매달려보지만, 궁극적으로 개인적 실존의 고민의 문제를 풀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윤애와 은혜와의 사랑은 또하나의 타인에 대한 의존적 행위로 나타나며, 그 의존적 행위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번은 명준이 윤애를 버리고 월북함로써, 또 한번은 은혜가 명준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모스크바 위문단으로서 명준과의 결별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광장으로서의 입장과 그 실재를 독립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그네들이 믿었던 사랑은 허망한 물거품으로 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극적 과정과 그 과정 뒤의 결말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네들의 인간의 삶과 역사에 있어서의 광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된다.

    그 광장은 달콤하고 장미빛깔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네들이 확인할 수 있는 실체와 실재로서의 광장의 모습은 비정하며 엄정한 인간 실존의 모습에 다름아닌 것이다. 가장 솔직한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것의 실체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가 파악할 수 있는 광장의 실제 모습이 되는 것이다. 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이탈의 시간과 그 과정이 바로 인간들이 가꾸며 꾸며온 역사라는 또 하나의 광장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역사라는 광장의 실체의 모습은 추상적이라는 말의 어감에서 나오는 것 만큼이나 험악한 것이다. 바로 우리가 실제로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구체적 삶의 터전은 실상은 역사라고 하는 그 추상적인 공간과 너무나 흡사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몸이라고 하는 구체적 행위의 터전이 되는 ‘광장’과 사람들의 추상성의 창고인 역사라고 하는 ‘광장’은 극단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수평적 저울의 무게로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추상과 구체의 양극단의 중앙에 인간 ‘이명준’과 이명준이 처한 시대적 삶으로서의 ‘당대’의 상황이 위치지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러한 이명준적 삶과 그의 삶을 포괄하는 당대적 삶이란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또한 이명준만의 고민일 수가 없는 것이며, 이명준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개인적 차원으로서의 이명준이 그가 처한 시대적 하중에 몸이 치여 결국 그가 바다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이명준만의 죽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적 파고를 넘지 못하고 익사하여 죽어간 무수한 사람들의 비명이 얽히고 설킨 시공간적 삶의 광장이 바로 1950년의 6·25가 아니었던가? 가장 험한 격랑의 파고에 휩쓸려갔던 그네들에 대한 회한과 피해의식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들어간 이명준의 죽음이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캘커타로 향하는 타고르호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사북자리에서 결국 뛰어들 수밖에 없도록 이명준의 추상적, 구체적 광장의 입지를 극한으로 좁혀간 그 위압적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명준이 선택할 수 있었던 실존적 삶의 해결 방안은 그것밖에 없었을까?

    이명준이 당대적 삶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은 소설의 끝부분에서 제시된다. 출렁거리는 바다에 떠 있는 타고르호는 그의 비틀거리는 내면 세계를 보여주며, 배위에서 깨어진 유리조각을 한 곳에 모아 꽉 밟는 행위는 모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적 행위로 비쳐진다.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비춰주는 것이 거울 또는 유리이다. 그러한 상징물이 깨어진 상태로 제시되며, 그 깨어진 조각물을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밟아대는 행위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절망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자학의 행위로 파악하는 것은 비약적 해석일까? 이러한 행동 다음에 이명준은 그 자신의 모습을 부채의 사북자리와 같은 지점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자아로 파악한다. 그의 독백처럼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명준은 바다와 배와 자신과 갈매기와의 분간을 하지 못하는 환각적 상태에서 결국 바다로 몸을 던지게 된다. 이명준이 바다로 뛰어드는 마지막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처리하고 있다.”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그렇다. 이명준은 출렁이는 파도와 그 위에서 그만큼의 높낮이로 출렁이는 배와 그 자신의 몸을 그 전체로서 출렁이는 바다(역사, 시대, 광장)에 던지면서 비로소 갈매기(자유인)가 되었던 것이다. 갈매기로서의 ‘광장’을 발견하고 순간적이나마 ‘활짝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명준이 웃으면서 바다에 뛰어든 시점으로부터 또 몇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바다의 파고는 예전보다 현저하게 잠잠해졌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바다라고 하는 또 하나의 광장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피상적 판단이다. 이명준을 삼킨 바다는 잠잠하다. 이명준은 아직도 웃으면서 침하중일까? 그는 과연 바다의 끝에 닿아보았을까? 그는 ‘역사’ 또는 ‘역사적 삶’이라고 하는 누구도 모르는 바다의 깊이를 재어보기 위해 스스로 추상이 되어버린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가 하나의 물방울로, 파도의 너울로 유영하고 있는 지금도 그 당시 이명준이 겪었던 시대적 고민의 문제는 계속 유효한 것이 아닐까?

    이명준류(類)의 사람들을 태우고 출렁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한국호의 오늘의 기항지(寄港地)는 또 무슨 이름의 광장일까?

  2. 나 정 욱
    2000.07.16 오전 12:00

    최인훈은 “광장”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1961년판 서문]

    최인훈이 이 작품을 쓴 지 벌써 40여 년이 지난 지만 남과 북의 체제상의 변화는 거의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밖의 세상은 저리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만 축내고, 이런 현상 속에서 안주하는 비정상적 모습만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최인훈이 이 작품을 쓴 나이가 그의 나이 스물 네다섯 적이다. 그 나이에 이 정도의 사랑과 자유와,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 내지는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며 그 결정체인 이런 우수한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후세에 남겨 오랫동안 독자들의 가슴에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은 문학인이 국가와 사회에 대해 어떤 식으로 봉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인훈은 또 “광장”의 서문 말미에서 이렇게 또 말하고 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새벽』, 1960년 10월)

    그런 사일구 혁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당시의 지식인들이 느꼈던 자유의 폭과 깊이는 지금 과연 얼마 만큼이나 신장되어 있는가
    오히려 당시의 민중과 지식인들이 느꼈던 자유의 체감정도가 지금 오히려 위축된 상태는 아닌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최소한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 자유만이라도 정녕 이 땅에서는 향유되고 있는가

    작품의 주인공 ‘이명준’의 고민은 과연 해결된 상황인가
    이명준은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지만, 이 작품이후 이 땅의 맨바닥에 몸을 던진 자들이 그 얼마던가
    이명준의 몸을 받아준 공간은 그래도 생명의 부활을 알리는 물이 있는 ‘바다’라도 되겠지만, 그후
    이 땅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맨 바닥에 몸을 던져 죽어간 그들의 영혼은 상징적 부활이라도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다시 한번 이 작품의 서문에 나온 말을 상기해 보자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이 말에서 지적한 <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 그리고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모든 환경적 요소는 서로가 < 광장>이 되고 또 < 밀실>이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쓴 글에서 <>표시가 없어지는 곳에서
    그것끼리의 소통이 가능하고,거기에 인간적 삶의 우호적 본질이 있다는 것을
    최인훈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얼마쯤 시간이 지나야 밀실과 광장의 소통로가 뚫려 너와 나의 믿음이 있는 얼굴로 진실된, 그리고 환희로운 인간의 대화가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밥을 굶을 지언정 추구해야 할 바른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지금은 밥이 대화와 광장과 밀실을 모두 점령한 상태
    그리하여 밥에 의해 비만으로 온갖 사회 문제가 노정된 상태

    포식하고 사우나에 가서 땀 빼고
    다이어트를 위해 죽기 살기로 애쓰는 희극적 비극이 연출되는 이 사회에서
    한 번쯤 밥의 가치보다 밥의 가치를 논하는 정신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바람’이 불어야겠다

    당신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해석 좀 해보시길

    “無恒産이면 無恒心
    無恒産이라도 有恒心”

    모든 이명준류의 사람들의 죽음의 원인은 無恒産이라도 有恒心인 사람으로 남겠다는 차원에서 선택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이명준류의 죽음을 선택한 모든 영령에 대한 명복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