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김춘진 엮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6년 12월 10일 | ISBN 9788932007908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60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지난 80년대말부터 우리에게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소개되기 시작한 작가 보르헤스에 대한 연구서. 기존의 비평 사조의 틀에 편협하게 짜맞추어져왔던 보르헤스에 대해 보다 폭넓고 다양한 관점으로 서술한 글들이 실려 있다.

[머리말]

어느덧 한 세기가 저물어간다. 숨가쁘게 달려온 20세기의 역사가 마감의 장으로 다가가고 있다. 어느 시대건 변화 없는 시대는 없었겠지만, 우리의 20세기만큼 혁명적인 변화의 시대도 드물었으리라. 세기말은 더더욱 현기증나는 변화들로 점철되어왔다. 후기 산업 사회로 이름지어지는 정보 혁명의 가속화, 소련과 동구의 몰락으로 이루어진 냉전의 종식, 우르과이라운드로 역사에 기록된 경제권의 지구화 등 전통적 국제 질서와 사회 구조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충격적 변화들이 줄을 이었다.

이 엄청난 변혁을 몰고 온 세기의 황혼녘에 언뜻 보르헤스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19세기의 황혼이 지던 1898년 태어나 198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20세기를 온전히 살다 간 말 그대로 20세기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권위의 중심과 전통의 기원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20세기의 문화 양식과 그의 글쓰기 형식이 상징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위 탈근대주의 문화 현상의 논의 과정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문학의 대가로 유난히 주목받았던 작가 중의 한 사람이면서도 보르헤스에게는 대작이 없다. 에코에게 『장미의 이름』이 있었는가 하면, 쿤데라에게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있었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하나같이 짧은 단편이거나 콩트에 가까운 글들이다. 게다가 그의 글은 읽어내기가 용이하지 않다. 구조가 다중적이고 의미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상적 경험과 보편적 상식을 뒤집는 변화무쌍한 논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만의 독특함 때문에 보르헤스는 오히려 더 20세기적인 작가였는지 모른다. 보르헤스 자신은 그의 글 속에서 무언가 숨겨진 별난 의미를 찾아내려는 비평가들의 호들갑을 비웃었다. 그러나 아무 의미도 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글은 별나고 어려운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아마 문학의 위기를 테마화하는 데 불가피했던 글쓰기 전략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별난 의미를 거부하는 보르헤스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픽션들은 문체론자들에서 탈구조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평사조의 분석 모델로 인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80년대말부터 우리에게 황급히 소개된 보르헤스는 특정한 비평사조의 틀에 편협하게 짜맞추어진 감이 없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보르헤스에 대한 안목을 좀더 넓혀줄 것이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보르헤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글들을 선뵈려는 것이 이 책에 담긴 노력이다.

알라스라키J. Alazraki는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아르헨티나적인 관심보다 문학의 보편적 주제를 찾는다. 세계와 우주 현실에 대한 인식을 담는 형이상학적 비유를 보르헤스 문학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르헤스의 일관된 테마일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적 사유의 토대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사를로Beatriz Sarlo의 글은 아르헨티나의 문화적 컨텍스트에서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텍스트의 절대적 의미가 아니라 독자에 따라 가변적이고 다양한 의미 읽기를 강조하는 보르헤스의 관점은 의미나 가치의 수직적 서열화보다 수평적 평등주의를 부각시켜 아르헨티나와 같은 소외된 주변 문학을 중심 문학권의 위상에 접근시키는 것이라는 사를로의 분석은 얼마간 민족주의적 색채가 배어 있는 문화 비평이다.

마타모로Blas Matamoro의 「보르헤스의 역사」는 픽션이 아니라 시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보르헤스의 전기적 배경과 그의 문학적 문제 의식을 연결시키고 있다. 알론소Amado Alonso는 문체 비평 이론의 토대 위에서 보르헤스의 서사적 독창성이 주로 언어의 표현력 확장에 천착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구조주의 시각에서 주네트Genette가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면서 평등한 글쓰기의 유토피아로 상정하고 있다면, 업다이크는 기하학적 모형의 도서관 이미지를 대용한다. 울마르Gregorio L. Ulmer는 보르헤스를 60년대와 70년대에 확산된 개념주의의 선구적 예술가로 부각시키고 있다. 리마Costa Lima의 글은 보르헤스 사유의 근간을 그노시즘과 연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체구성주의나 탈구조주의에 접목되어 시간과 공간의 경직된 좌표를 뛰어넘는 픽션을 창조하게 되었는가를 해명하고 있다.

어차피 인간의 사유는 신의 예지처럼 고차적이지 못하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단순화를 의미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구도화하는 것, 추상화하는 것, 말하자면 어림잡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모든 지적 작업이 세계를 어림잡고 추측하고 단순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에 대한 비평들도 보르헤스에 대한 단순화를 의미할는지 모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르헨티나·브라질·스페인·프랑스와 미국의 비평가들이 조망한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가 각각의 다양한 단면들로 드러나는 것은 혼란과 몰이해의 징표라기보다 의미의 풍요로움을 일깨워주는 것이리라 기대해본다.

주네트의 글은 불어에서 스페인어로 옮겨진 것을, 업다이크의 글은 영어에서 스페인어로 옮겨진 것을, 사를로와 울마르의 글은 원래 영어로 씌어진 것을, 리마의 글은 포르투갈어에서 영어로 옮겨진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며, 마타모로, 알론소와 알라스라키의 글은 직접 스페인어에서 옮긴 것임을 밝혀둔다.

– 1996년 3월, 김춘진

목차

책머리에

보르헤스의 픽션: 김춘진
틀뢴과 아스테리온: 알라스라키(김창민)
보르헤스와 아르헨티나 문학: 사를로(정동섭)
보스헤스의 역사: 마타모로(정선옥)
소설가 보르헤스: 알론소(조영실)
문학의 유토피아: 주네트(이성훈)
도서관 작가: 업다이크(우석균)
보르헤스와 개념 예술: 울마르(배은정)
이성의 어두운 면: 허구성과 권력: 리마(전진재)
보르헤스가 보르헤스에 대해 얘기하다: 길버트(이충효·김상유)

보르헤스 연보
참고 문헌
필자·편역자 소개

작가 소개

김춘진 엮음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아우토노마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편저 『보르헤스』(문학과지성사, 1996)와 저서 『스페인 피카레스크소설』(아르케, 199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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