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박시정 소설집

박시정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7년 8월 29일 | ISBN 9788932009445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69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이국에서 살아야 할 한국인의 상처받는 내면을 그리면서도, 인간의 근원적으로 슬픈 정서와 구원에의 소망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는 소설집. 작가는 외국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이국 문화와의 충돌이 빚는 한계 상황들을 수채화처럼 그리고 있다.

[머리말]

1971년에 모국을 떠난 이후 도쿄, 요코하마, 시애틀, 워싱턴 D.C., 뉴욕,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서울로 돌아와 미국 대사관의 관사가 있는 경복궁 옆의 돌담 안에서 지난 3년 간 살았다.

하얀 돌담 안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철따라 아름다운 꽃들이 핀다.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 눈 속에서도 청청한 푸른 소나무, 잎이 푸른 대나무, 이른봄에는 연분홍의 살구꽃, 하얀 자두꽃이 피고 곧 이어 흰 말채꽃이 만발한다. 말채꽃과 다투어 가늘게 늘어진 개나리 가지가 노란 꽃을 드리운다. 그 꽃들이 지고 나면 벚꽃이 핀다.

돌길에 연록의 이끼는 나날이 푸르름을 더하고 잔디밭의 앙증맞은 푸른 잎들 사이에서는 산딸기가 열린다. 신선하게 빨간 산딸기인데 그 속은 희다.

집 뒤의 축대 옆에서 분꽃 싹이 돋아나고 모진 겨울에도 자색의 잎으로 질기게 남아 있던 박하 잎들도 새로 새순을 내밀기 시작한다. 이 많은 꽃들 중에서 내가 제일 기다리는 꽃은 매그놀리아꽃과 모란꽃이다. 흰색의 매그놀리아가 마른 나뭇가지에 필 때 그 꽃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겨우내 모란꽃 그루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추운 겨울에도 딱딱한 각질 속에 꽃눈이 숨겨져 있는 양 나뭇가지 끝에 자색이 돌고 있었다. 나는 인내심 있게 모란꽃 그루의 가지에 싹이 트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 딱딱한 각질을 깨뜨리고 연자색의 어린 싹을 틔울 때, 아, 그 환희, 차츰 잎이 자라나 무성한 그루를 이루고 꽃봉오리가 다소곳이 고개를 내밀 때의 그 신기함, 드디어 하루아침에 모란꽃이 봉긋이 입을 열었을 때의 신선한 기쁨, 그때 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김영랑의 시를 읽어주시던 여고 때의 국어 선생님 목소리를 듣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잇슬 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시름에 잠길 테요……

6·25 때, 북으로 납치된 아버님을 둔 선생님의 설움까지 합쳐서 시감(詩感)에 젖으시곤 하셨다. 모란꽃이 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내 심정의 이면엔 그때의 시감에 젖으신 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생에서 참으로 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나 자신이 되고 싶은 것 못지않게 나의 친지들이 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도 많았다. 현모양처가 되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고 나의 어머니께서는 내가 국민학교나 중고등학교 교사의 직업을 갖기를 원하셨고 나의 아버지께서는 교수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나의 문학적 소질을 발견하시고 인정해주신 분들은 국민학교 때부터의 선생님들이셨다. 그 선생님들의 지도에 순응했었더라면 지금쯤 나도 여봐란 작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리라. 나는 지금까지 소설가보다는 다른 분야의 직업을 기웃거리며 부러워해왔다.

훌륭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아버지로 두고 아버지의에고 분석과 히스테리 분석의 분석 대상이 되었다가 성장하여 아버지 못지않은 정신분석학자가 된 안나 프로이트 Anna Freud는 내가 제일 부러워한 여성이고, 뛰어난 지성의 남성 문학 비평가 못지않은 여성 문학비평가도 되고 싶었고 언어학자도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뛰어난 지성들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싶다. 종교가·철학가·비평가·정치가·심리학자…… 이들 읽을 거리가 있는 한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저명한 여성 전문가는 20세기에 들어 “여성은 파괴되었다”고 절규하였다. 여성, 그 귀중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근원, 그녀들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잉태하고 그리고 잉태한 것을 돌보아 키운다. 인간 존재의 모태, 여성은 생명의 부드러운 시원이다. 여성은 만물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신비로운 악기와 같아서 그 악기를 얼마나 귀중히 간직하고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느냐에 따라 섬세하고 아름다운 음을 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음을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여성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육아학·아동심리학·청소년심리학·여성심리학·여성생리학 등을 교육 현장에서 배웠다. 분명코 그 배운 것이 헛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세계화의 문턱에 다다라서이다. 교육 현장과 실제 생활의 현장이 천지 차이로 다르게 보이는 현재이다. 태어난 어린 세대, 태어날 세대, 즉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배운 것이 실용되는 사회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지난 3년 간을 뻐꾸기 소리 들리고 신록의 박하잎 따먹는 아름다운 정원 안에서 살았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았다. 특히 인간 관계가 그렇다. 다섯 덩이의 빵과 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은 단순히 배고픔을 면케 하기 위한 빵의 문제만은 아니었다고, 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그분의 ‘인격’과 ‘말씀’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일날 신부님은 강론에서 말씀하셨다.

27년 동안 모국을 떠나 살면서 나의 아이덴티티가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내가 모국에 작품만 써서 보내면 나는 작가로 인정되리라’는 긍지가 나를 완전히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첫 창작집을 내주신 후 2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나의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두번째로 창작집을 내주신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 선생님께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지금 이 아름다운 정원에는 연록의 잎사귀들 사이에 연보라색의 무궁화꽃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다소곳한 한숨처럼 피어 있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도 가까워온다. 그때까지 나는 도심지 가운데 있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 정원을 즐길 것이다.

창작집의 제목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은 가톨릭 성서 「창세기」 9장 13절에서 따왔다.

– 1997년 8월, 박시정

작가 소개

박시정 지음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워싱턴 주립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미 평화봉사단, 워싱턴 주립대학교, 미국 정부 언어 학교 등에서 한국말을 가르쳐왔다. 1969년 『현대문학』에 「초대와 그들의 시대」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작품집으로 『날개소리』 『고국에서 온 남자』 『당신의 손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등이 있다.

"박시정"의 다른 책들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3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