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찾아서(상)

경성, 쇼우와 62년

복거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8년 1월 20일 | ISBN 9788932009797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32쪽 | 가격 11,000원

책소개

우리가 지금도 일본인의 지배하에 차별받는 ‘반도인’으로 예속되어, 우리말과 역사가 송두리째 말살되고 민족적 뿌리가 없어진 상태 속에서 참담하게 살고 있다면…… 스위프트적인 기지와 오웰적인 분위기 속에 피어나는 풍자적 날카로움과 비판적 성찰.

[소설로 들어가기 전에]

문학 작품의 앞뒤에 작가가 말을 덧붙이는 것에 대해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러나 좀 낯선 소재라서 머리글을 쓰는 게 좋겠다는 실제적인 지적이 있었다. 작품의 시공적 위치에 대해 약술한다. 작품과 직접 대면하고 싶은 분들은 이 머리글을 건너뛰고 읽어도 될 것이다.

[전제]

이 작품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또우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이 1909년 10월 26일 합이빈(哈爾濱)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 아래에서 씌어진 이른바 ‘대체 역사(代替歷史)alternative history’이다. 이또우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역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정치적 식견과 능력은 근대 일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그는 쪼우슈우번(長州藩) 출신의 무인이면서도, 야마가따 아리또모(山縣有朋) 공작을 중심으로 하는 쪼우슈우벌(長州閥)의 육군 강경파들과는 달리 매사에 있어서 온건하고 점진적인 접근을 주장한 정치가였다. ‘정한론(征韓論)’의 반대, ‘대일본 제국 헌법’의 제정, 입헌 제정당(入憲帝政黨)의 결성 등에서 그의 그러한 면모가 드러난다. 자연히 그는 일본 정계에 있어서 온건파의 구심점이었고, 그의 존재는 일본에 언제나 팽배했던 군국주의적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의 전제가 된 대체 역사에서는 그가 합이빈에서 저격당한 뒤에도 열여섯 해를 더 살았다. 그 사실은 자연히 다이쇼우(大正) 시대의 일본 정국과 동북아시아의 형세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형세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세계 역사의 전개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대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중요한 사건의 결말이 현재의 역사와 다르게 났다는 가정을 하고 그뒤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작품의 배경으로 삼는 기법으로, 주로 ‘과학소설science fiction’에서 쓰이고 있다.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남부가 이겼다는 사실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다룬 무어Ward Moore의 『희년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1953)가 고전으로 꼽힌다. 그 밖에 루즈벨트 F. D. Roosevelt가 암살되고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독일과 일본에게 점령되었다는 가정 아래에서 1960년대의 미국 사회를 그린 딕Philip K. Dick의 『높은 성 속의 사람The Man in the High Castle』(1962), 엘리자베드 I세 Elizabeth I가 암살되고 서반아의 무적 함대 Armada가 영국을 정복하였다는 가정 아래에서 1960년대의 영국 사회를 그린 로버츠 Keith Roberts의 『파반춤 Pavane』(1966), 그리고 워싱턴 George Washington이 전사하고 미국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를 그린 해리슨 Harry Harrison의 『대서양 횡단 터널, 만세! A Transatlantic Tunnel, Hurrah!』(1972)가 이름이 있다.

[시대상]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1920년대 초반까지는 조선을 대륙 진출의 확실한 전진 기지로 만들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는 내각과 군부 사이의 협조 속에서 국제적 여론을 무마해가면서 중국의 동북 지구를, 즉 만주를 잠식하여 세력권 안에 넣었다. 이어 1940년대 초반에는 미국으로부터 ‘만주국 문제’에 대한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지도적 위치를 구축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우호적인 중립 노선을 지켜 큰 번영을 누렸다. 그리하여 가라후또(樺太) 남부와 찌시마(千島) 열도를 포함하는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 ‘국제연맹’으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마샬 군도 등 서태평양의 섬들, 조차지인 요동 반도의 관동주와 산동성의 교주만을 영유하며, 방대한 만주국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경영하는 일본은 모든 면에서 미국과 노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강대한 나라였다.

반면에 국내적으로는 어두운 면들도 많았다. 정부의 통제가 심화되어, 사회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국민들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군부가 정치의 주역이 됨으로써 일어난 문제점들이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고,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장기 집권했던 도우조우 히데끼(東條英機) 정권이 남긴 부정적 유산들이 사회 발전을 막고 있었다.

세계는 미국과 노서아를 각각 그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전에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식민 제국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어서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점령국인 미국의 도움으로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으나, 미국과 노서아가 분할 점령했던 파란은 끝내 동서로 분열되어버렸다. 중국은 황하를 경계로 하여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치하고 있어서 민족의 역량이 내전에 소모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만주국의 세 나라로 분단된 상황을 극복하여야 한다는 민족적 각성이 점차 적극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또우 히로부미 초대 총독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된 ‘국어 상용 운동’으로 조선어는 1940년대말까지는 조선 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울러 꾸준히 추진된 조선 역사 왜곡 작업에 의해, 특히 ‘비(非)국어 서적 폐기 정책’에 힘입어 조선의 역사도 완전히 말살되고 왜곡되었다. 1980년대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들이 되었고, 자신들이 내지인들로부터 받는 압제와 모멸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내면서]

우리는 신인 발굴에 노력해온 계간 『문학과지성』의 연장선 위에서, 복거일씨의 전작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 경성, 쇼우와 62년』을 출판함으로써 새로운 소설가를 우리 문단에 자랑스럽게 내보낸다.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다는 가상(假想)의 역사(작가 자신은 이를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라고 부르고 있다) 속에서 우리말과 역사가 송두리째 말살된 상황 속에서, 한 기업체의 과장이며 시인인 ‘반도인’ 주인공이 자신의 민족과 뿌리를 어렵게 찾아내고 그 때문에 가해진, 그리고 가해질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 망명을 떠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 소설의 의미는, 자아와 그것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탐구하려는 정신적 모험의 고귀함과, 오늘의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풍자적 날카로움에서 우선 발견될 수 있다. 완벽한 소설적 형상력에, 원고지 3천 장의 긴 작품을 단숨에 읽게 하는 고급하면서도 긴장된 재미가 어울려 있는 이 장편소설에는 전반적으로 스위프트적인 기지와 조지 오웰적인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지만, 그러는 가운데 작가의 진지한 내성과 끝까지 역사에 대한 희망과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완강함이 커다란 미덕으로 우리를 감동케 한다. 의표를 찌른 기발한 착상에도 불구하고 매우 사실적이며, 섬세하고 아름답고 튼튼한 이 소설의 출현은 앞으로의 우리 장편 문학이 나아갈 길 한 가지를 암시해주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 소설이 80년대에 비교적 침체해 있었던 우리 소설 문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중요한 성과의 하나로 꼽힐 것으로 확신한다.

작가 자신의 자기 소개에 따르면, 1946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한 저자 복거일(卜鉅一)씨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은행과 제조 회사·무역 회사 등에 근무했고 기업체 근무중에 노동조합 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현대문학』에 시를 1회 추천받은 바 있으나, 오랫동안 희망해온 문학에 전념키 위해 1983년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4년 동안 이 소설의 집필에만 몰두해왔다. 그는 예이츠의 시들에 대해 절망적인 사랑을 느끼고 있으며 공상과학소설에 심취해 이 방면에 많은 독서를 해왔다고 하는데 이 독창적인 소설 『비명을 찾아서』는 그 자신의 이러한 이력과 그의 문학적 취향이 탁월한 상상력 속에 부드럽게 용해되어 창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인 작가들의 투고작을 출판사의 편집위원이 열독하고 검토하여 책으로 발행하는 문화 선진국의 관행을 바람직하게 따르게 된 이 장편소설의 간행이 우리 문단과 출판 풍토에 중요한 전례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와, 이 작가의 앞으로의 새로운 창작 활동에 대한 독자들의 격려를 이제 우리는 기대한다. 여기 뛰어난 재능이 나타났다!라고.

– 1987. 3. 문학과지성 편집 동인(김병익·김주연·김치수·김현·오생근)

작가 소개

복거일 지음

194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며, 소설가이자, 시인․사회 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역사 속의 나그네』 『파란 달 아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목성 잠언집』 『숨은 나라의 병아리 마법사』 『보이지 않는 손』 『그라운드 제로』 등과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 시집 『五丈原의 가을』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가 있다. 사회 평론집으로는 『현실과 지향』 『진단과 처방』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역사를 이끈 위대한 지혜들』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경제적 자유의 회복』 『자유주의의 시련』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등과 산문집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소수를 위한 변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동화를 위한 계산』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벗어남으로서의 과학』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복거일의 세계환상소설사전』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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