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장례법

신종원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2년 8월 12일 | ISBN 9788932040400

사양 변형판 120x188 · 292쪽 | 가격 14,000원

책소개

“조부는 이 책들을 족보라고 발음했지만,
당신은 그물로 알아들었잖아요.”

늪의 시간, 안개의 일부가 되는 길…
그 지독한 대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물 위의 진혼곡

 

소설의 처음, 그 생의 음악적 질서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종원 소설가의 첫 장편소설 『습지 장례법』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전작이 단편소설 세 편과 에세이로 이루어진 비교적 적은 분량의 소설집임을 감안하더라도, 데뷔 후 2년 남짓한 시간에 소설집 『전자 시대의 아리아』와 『고스트 프리퀀시』를 연달아 출간하고, 이후 다시 1년이 채 되지 않아 첫 장편소설을 펴낸 것은 그 속도와 필력이 단연 남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순서상으로는 그의 세번째 책이지만,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작품은 그의 첫 소설집 출간 전인 2021년 3월 25일에 씌어졌다. 그러나 씌어진 시기와 상관없이 이 이야기는 어쩌면 작가 신종원의 소설, 그 가장 처음에 이미 놓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뒤를 따라가는 음향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을 모방하는 노래다”라고 밝힌 그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은 블로그에 주기적으로 남겼던 일기의 일부를 가져와 조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기는 앞서 죽은 집안의 어른들을 떠올리며 자신 역시 같은 죽음을 맞을 거라는 사실, 나아가 그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적어 남긴 기록이었다. 고증조부와 증조부, 조부의 사인이 뇌질환으로 정확히 같았다는 데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미래를 앞당겨 그려보았던 작가는 생이 카논처럼 흐른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그러한 생의 음악적 질서 속 어떤 마지막의 지점마다 일일이 코다를 찍고자 했다. 이는 소설과 별개로, 세상을 인지하는 일종의 연장 신체로서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상들의 삶을 뒤따르며 그것을 닮아가는 것이 생에 부여된 자연의 흐름이라면 그 굽이마다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 하여 유령처럼 부유하는 음악적 질서를 붙잡아 가청주파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일, 그렇게 은폐된 음향 패턴을 들려주는 일이 신종원의 소설 쓰기였다.(인터뷰 신종원x강동호, 『소설 보다: 가을 2020』, 문학과지성사)

대대로 집안 어른들이 죽으면 잠기는 늪, 그곳에서 조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혈족의 역사를 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수장의 전통을 이행하는 늪지기의 마지막 책임으로 남겨진 ‘당신’은, 늪에 가라앉아 있는 선조들과 오차 없이, 결락 없이 포개어지는 이목구비를 가진 ‘당신’은, 그러나 대를 이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모습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작가의 가계를 엿볼 수 있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분이 흐릿한 이 환상적인 이야기가 바로 소설 이전부터 작가를 관통해 흐르는 생의 음악적 질서, 카논으로 이루어진 삶의 악보이자 코다를 찍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한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삶이 아닐까. 신종원의 첫 장편소설 『습지 장례식』을 조심스레 그의 소설, 그 처음에 놓아보는 이유이다.


장례 이후 다시 시작되는 삶, 그리고 사랑
소설은 장례의 절차에 따라 「임종」 「수시」 「안치」 「발상」 「삼우」 총 5부로 나뉘며. 그중 「수시」에서 다시, 거두는 시신에 따라 「작은 몸」 「붉은 몸」 「뒤집힌 몸」 「목 잘린 몸」 네 가지로 나뉜다.
어떤 목소리에 의한 이인칭으로 서술되는 이 작품에서 ‘당신’을 늪으로 이끈 것은 어둠 속에서 걸려 온 전화이다. 찰랑…… 찰랑…… 느닷없는 물소리로 찾아온 전화의 건너편에선 “여보세요?” 하고 묻는 이편의 질문에도 아무 응답이 없다. 가만히 답을 기다리는 사이, 물소리는 ‘당신’의 머릿속에 외딴 곶 끄트머리에 선 무인 등대를 떠올리게 한다. “사설 극장의 무대 바깥, 텅 비어 있는 스탠드 라운지를 혼자 지키고 서 있는 1인 관객”의 모습을 한 그 등대에서 다시, 신종원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 “(나는) 비어 있는 콘서트홀에 홀연히 떠오르는 음성이다”가 겹쳐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제부터 ‘당신’이라는 ‘음성’이 흘러가야 할 길을 비춰줄 등대가 전화기 저편에 있다는 예감 때문일 것이다. 심각한 통신 장애 속에 엉킨 채, 신호가 미약한 장소에서 가까스로 녹음된 소리처럼 ‘당신’에게 닿은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결국 영영 떠나버리고 만다. “길 잃은 음성들이 흘러가 사라지게 될 안개 같은 죽음 속으로.” ‘당신’이 조부의 ‘임종’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조부의 죽음을 비로소 실감하고 나서 혼자 치르는, ‘당신’의 뒤늦은 장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조부의 장례는 조부 한 사람의 장례로 그치지 않는다. 목소리는 “천 년의 질서와 전통에 따라” “엄선된 시신 네 구를 죽음에서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웠”다. 이 ‘수시’를 이행하는 것 역시 ‘당신’의 역할. 수시 이후 ‘안치’를 마치며 ‘당신’은 조부에게 다짐한다. “천 년의 핏줄을 이어가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자손으로 남지 않을 것”이라고. 결국 ‘당신’이 이 뒤늦은 장례를 혼자 치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아닐까. 이어지는 ‘발상’이 더욱 구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삼우’에 이르러 다시 이야기는 응답 없이 물소리만 들리던 그날의 ‘전화’로 돌아간다. 전화기에서 전해지던 소리, 그것은 죽은 조부가 아닌 조부에게 물려받은 늪이 보내온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땅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시인 박지일과 나눈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그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을 소설로서 수행하는 것. 장례는 그렇게 치러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독자들은 소설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이야기의 반복일 테지만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이 장례가 “이미 살았던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구원을 기다리는 조상들이 모여 있는 림보를 불태우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가계를 부정하고 선조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작가는 “림보가 불타 없어진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꽃을 죽여야만 하고, 종족과 시대를 막론하고 생명은 언제나 위쪽으로 검을 겨눠왔으니, 림보를 불태우는 것 역시 생의 음악적 질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는 또한 그 질서를 따라 흐르는 음향신호이다. 하여 대물림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또한 어쩔 수 없이 조상들을 모방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그를 “죽은 영혼들의 목소리를 엿듣기 위해 엉금엉금 무덤가로 되돌아가”게 한다. 하여 그의 진혼곡은 눈물 없이 흥건하고 슬픔 없이 사무친다.

이 책의 뒤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종원 작가와 공통점을 가진 박지일 시인의 시와 신종원 작가의 작품을 누구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읽어온 이소 문학평론가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죽은 영혼들과 긴밀하게 엮여 흐르는 생의 질서를 다양한 목소리로 듣는 독서의 경험은 이 작품을 하나의 특별한 집안 이야기가 아닌, 읽는 ‘나’의 이야기로까지 확장시켜줄 것이다.


■ 책 속으로

혈족 사이에 흐르는 유전학적 관계망에 도식을 씌운 거예요. 질긴 섬유질 혈관처럼. 이 책 어딘가에는 당신의 이름도 작은 핏방울 크기로 맺혀 있어요. 다른 수만 개의 이름과 함께. 소름. 불현 듯 섬뜩한 기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나요. 조부가 그런 사실들을 당신에게 알려줬을 때 말이에요. 아닌가요? 조부는 이 책들을 족보라고 발음했지만, 당신은 그물로 알아들었잖아요. 조부는 마른 손가락 끝에 침을 묻히면서. 끊임없이 확장되는 그물 격자들을 디그시 따라 내려가며. 당신은 식별조차 할 수 없었던 그림들을. 네 기원이랍시고. 정성 들여. 한 자 한 자 읽어주곤 했잖아요. (p. 12)

종가의 가주들은 죽을 때가 되면 늪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늪의 시간, 안개의 일부가 되려고. 이런 특별한 공양 의식으로 당신 혈족은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왔던 거예요. 실제로 어떤 왕조보다, 정권보다 오래 살아남아 어느덧 천 년을 바라보고 있징 낳나요.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물 밑에서 아무 궤짝이나 건져 올려봐요. 죽음에서 인양된 망자들의 얼굴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을 테니. (p. 25)

그러니 내가 어찌 음악에 관해 쓰지 않을 수 있을까.유한한 용량의 족보 책자 안에서 천년만년 같은 운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 미련퉁이 혈족이야말로 음악 그 자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우습기도 하지. 조부도 내 이름 석 자를 기재하는 조건으로 쌀가마니 한 수레를 집성촌 곳간에 가져다 바쳤을 테니. 이 값비싼 종이 위에서 가여운 후손을 나타내는 검은색 글씨들이 말라간다. 네 이름 자체가 음악의 한 성부 혹은 무용의 한 동작이 되었구나. 우습다, 우스워. 너희 모두가 우습구나. 우스워서 눈물이 다 나는구나. (p. 273)


■ 작가의 말

이 소설은 2021년 3월 25일에 썼다. 이후에도 조금씩 손을 대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 기실 달라진 건 소설이 아니라 나일 것이다.

1년 사이에 많은 일을 겪었다. 졸지에 영화감독이 되어보기도 하고. 영화제 GV 시간에 한 관객이 물었다.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나 조부를 미워하게 되었는지. 나는 할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나? 그때는 대답을 흐렸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썼다. 그 마음을 여기에 남겨둔다.

노인들은 내 얼굴에서 오래전에 죽은 조상들의 기품과 권위를 읽어낸다. 노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모두 떠나고 나면, 더는 누구도 내 얼굴에서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읽지 못할 것이다. 나는 상상한다. 언젠가 미래에 내가 백발의 노인이 되었을 때, 한때 내가 누구였고 또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앞서 죽은 망자들의 손길과 유령들의 목소리로부터 자유롭게 놓여나는 시간을.

소설을 다 쓴 뒤로, 할아버지가 자주 꿈에 찾아온다. 우리는 검정색 정장을 차려입고 외따로 대화를 나눈다. 장소는 그가 임종을 맞이했던 바로 그 주택― 고척동 아파트이다. 다른 가족들은 제각기 일을 치르느라 무척 바빠 보인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이 된다. 할아버지는 슬픈 얼굴로 말한다. 종원아, 이제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본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봐. 나는 끊임없이 말할 것이다. 아무렴 어때요, 할아버지. 우린 이제 자유로워요.

책 뒤에 수록된 박지일 시인과 이소 평론가의 글이 보여주듯, 우리 모두는 죽은 영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소설이 개인적인 기록으로 그치지 않도록― 사랑하는 옛사람을 오랜만에 무덤 바깥으로 불러내어준 두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을 건넨다. 또 책이 나올 수 있게 도움 주신 대산문화재단에도. 흔쾌히 장편을 제안해주신 문학과지성사, 책이 시작되는 자리와 끝나는 자리에서 애써주신 최지인, 김필균 편집자께도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적어두고 싶다.

림보가 불타 없어진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열매가 되기 위해 꽃을 죽여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종족과 시대를 막론하고, 생명은 언제나 위쪽으로 검을 겨눈다.
선조들은 대좌를 빼앗기는 고통으로 눈물 흘리지만,
후손들은 사랑하는 옛사람의 머리를 제 손으로 자르며 눈물 흘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옛사람들의 그림자 바깥으로 도망치려고 애쓰면서도,
죽은 영혼들의 목소리를 엿듣기 위해 엉금엉금 무덤가로 되돌아가곤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 책을 읽을 때, 사랑하는 노인을 한 사람 떠올렸으면 좋겠다.
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당신이 떠올리는 옛사람과 얼마나 닮아 있으며,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결국은 당신이 그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세상은 사랑을 회복할 것이다.

2022년 여름,
신종원

목차

■ 차례

1부. 임종臨終
2부. 수시收屍
2-1. 작은 몸
2-2. 붉은 몸
2-3. 뒤집힌 몸
2-4. 목 잘린 몸
3부. 안치安置
4부. 발상發喪
5부. 삼우三虞

시 | 못·박지일
에세이 | 번역의 시간·이소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신종원 지음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km/s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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