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파스

채영주 장편소설

채영주 지음 | 김형중, 한수영 책임편집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2년 6월 30일 | ISBN 9788932040356

사양 변형판 130x195 · 284쪽 | 가격 14,000원

책소개

소설가 채영주 20주기 기념 선집 2종 출간

현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거대담론으로 간단히 결론 내리는 방식을 경계하며, “문학의 진지성을 지키면서도 다른 장르와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모색”(문학평론가 이광호)했던 작가, 채영주의 20주기 기념 선집 2종이 2022년 6월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채영주는 1962년생으로 서울대 사회과학대 정치학과에서 공부한 뒤 1988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노점 사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02년 6월 15일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유고집을 포함하여 총 열세 권의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이번 선집은 그의 20주기를 맞아 문학평론가 한수영(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과 김형중(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 책임편집을 맡아 중단편 선집과 장편소설 복간본을 기획하였다. 중단편 선집은 그의 소설집에서 가려 뽑은 작품 열 편을 묶었고, 장편소설은 미학사에서 1993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작품을 복간하였다. 1980~90년대 경직되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청년의 고민을 깊게 파고들면서도 독자 대중과의 접점을 찾는 감각 또한 탁월했던 그의 소설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다.

채영주(1962~2002)가 마흔 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그해 6월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우리 선수들의 예상 밖 선전으로 연일 승전보가 울려 온 나라가 환희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갑자기 날아든 그의 부음 앞에 망연자실하던 날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를 기억하는 몇몇 지인의 발의와 협력으로, 그의 20주기를 맞아 조촐하게나마 이 기념 선집을 꾸립니다. [……] 이 선집을 그를 기억하는 많은 분, 무엇보다도 아직도 그를 작가로 소중히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께 바칩니다.
_「채영주 20주기 기념 선집 간행사」에서


피부색을 둘러싼 차별과 혐오,
약한 이들 간의 오해와 폭력
이민자 도시의 격한 누아르

『크레파스』는 채영주 생전 1993년에 펴낸 미학사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현재 표기법에 준하여 단어 등을 다듬고 문학평론가 김형중이 이 소설의 현재적 의미를 길어내는 해설을 더한 복간본이다. LA를 배경으로 한국 이주민과 흑인 간의 인종 갈등을 다루며 수면 아래에서 이를 조장하는 백인/자본가 세력을 드러내어, 진정한 악은 쉽게 숨겨지고 약한 이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갈등하는 세태를 꼬집는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 구성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읽는 누구나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누아르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생생한 격투 신과 추격 신은 몰입도를 높이고, 샐리와 유진의 감정 너울은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직장을 잃고 거리로 몰려 나왔지.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어. 기술이란 건 써먹을 데가 있어야 빛을 보는 것 아니겠어……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공장들이 문을 닫는 건 경기가 좋지 않아 발생하는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이제 경기가 회복되면 공장들의 닫혔던 문은 다시 활짝 열릴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보기 좋게 배반을 당했지. 미국의 백인 자본은 자기 나라 국민에 대한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거야. (p. 58)

자본의 이익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이 나라의 백인 자본은 가장 효율적인 판단을 내렸어. 그래서 그 공장들을 개발도상국가 지역으로 옮겨버린 거야. 인건비가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싼 곳으로, [……] (p. 59)

해설에서 김형중은 이 작품이 누아르의 문법을 얼마나 완벽하게 차용했는지를 분석한 뒤 “어떤 소설 작품이 영화의 기법을 잘 미메시스했다는 사실이 문학적 찬사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작품 가치를 파악하기 위한 더욱 세밀한 독해가 요구됨을 역설한다. 앞서 인용된 대화문에서처럼 채영주는 실제로 유색인종 빈민 집단의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고자 한다. 그는 3개월간 자신이 직접 취재한 LA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구조적인 모순을 적시하려 하였으며,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독자들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남기는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크레파스』가 누아르의 관습을 차용해 해결하고자 시도했던 그 문제들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듯하다. 한국은 다국적 자본에 포획되었고, 또 일찌감치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 계급 문제는 여전하고 인종 차별과 혐오는 20년 전에 비할 바 안 될 만큼 복잡해지고 중층 결정되었다. [……] 채영주는, 20년 전에는 오로지 통쾌한 누아르로밖에는 해결할 길이 없었던 ‘문제’를 자신의 소설 속으로 가지고 들어간 작가였다. 물론 그 문제는 소설 속에서 악랄한 백인 자본가 한 명이 죽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랬으니 그가 더 오래 살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지금도 한국 사회가 소설에게 떠넘기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알다시피 소설이란 장르는 그렇게 새로워지는 법이다. 김형중(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30여 년이 흐른 지금, ‘인종 차별’은 더욱 복잡한 맥락 속에서 전 세계의 화두로 자리하고 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고도, 혹은 더 교묘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무엇을 남기는가. 당시의 인종 문제를 누아르 형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타개해보고자 모색했던 그의 시도는 그 자체로 유효할 뿐 아니라, 이미 모두가 익숙해지고 체념해버리는 바람에 증오할 동력마저 잃어버린 본질적 자본의 문제를 상기하도록 한다. 그렇게 새로운 고민을 전하고 의미를 갱신하는 소설로서 『크레파스』는 2022년의 독자들을 만날 채비를 마쳤다.


■ 본문에서

“백인 남자 승객 한 명이 버스로 올라왔어요. 그는 버스 안을 한눈에 둘러본 다음 흑인 여자가 앉아 있는 자리 앞으로 와서 섰어요. 두 번의 정류장을 지나도록 그는 줄곧 그녀만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어요.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그가 문득 다짜고짜 여자를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뺨을 때리고 머리채를 흔들고 발길질을 하고, 갖은 지독한 욕지거리까지 늘어놓으면서 말예요. 물론 그 남자는 그녀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남자도 그녀를 알지 못했죠.” (p. 32)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군요. 이 손찌검하는 버릇까지. 냄새가 그처럼 싫으시다면 무슨 조치를 강구해보도록 하겠어요. 매일 밤 샤워를 하고는 있지만 이제부터는 향수라도 더 뿌리도록 하죠. 옷은 밤마다 빨래 통으로 집어넣구요.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히 아셔야 해요. 엄마 몸에서 구역질 나는 냄새가 났던 것이나 제게서 검둥이들의 냄새가 나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를 이 구역질 나는 땅으로 끌고 들어온 건 바로 아버지란 말씀이에요.” (p. 75)

그들의 보고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유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새삼스럽게 이곳에 모여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보고는 그들에 의해서 얘기되기 전에 이미 한인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현금 상자 도난 사고 같은 것이 보도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고 마리포사에서의 사건은 유진도 이미 신문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들을 떠들어대며 다시 서로의 분노를 부추겨대는 것이었을까. (p. 123)

“네가 애기하려는 게 도대체 뭐야. 흑인들의 수난사를 서사시로 읊어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메리카의 역사라면 나도 여기저기서 지긋지긋하게 들었다구.” “그럴 테지. 위대한 백인들은 위대한 정신으로 서부를 개척했고, 그들처럼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흑인들은 짓밟아야 하는 것이겠지.” “누가 누구를 짓밟았다고 그러는 거야.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언제나 납작하게 짜부라진 건 바로 한인 교포들이었다구.” (p. 159)

목차

■ 차례

크레파스

해설 누아르가 된 소설 ・ 김형중
작가의 말
채영주 20주기 기념 선집 간행사

작가 소개

채영주 지음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1988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노점사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시간 속의 도적』 『웃음』 『목마들의 언덕』 『크레파스』 등과 소설집 『가면 지우기』 『연인에게 생긴 일』, 동화 『비밀의 동굴』 등이 있다.

김형중 책임편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비평집으로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이, 산문집으로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사라지는 것들에 기대다』(공저)가, 엮은 책으로 『한국 문학의 가능성』 『무한텍스트로서의 5‧18』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수영 책임편집

문학평론가, 연세대학교 글로벌창의융합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지은 책으로 『문학과 현실의 변증법』 『소설과 일상성』 『한국 현대비평의 이념과 성격』 『친일문학의 재인식』 『사상과 성찰』 『전후문학을 다시 읽는다』 『정치적 인간과 성적 인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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