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569

김선오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2년 5월 4일 | ISBN 9788932040134

사양 변형판 128x205 · 191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멀리서 네가 달려온다. 이곳으로 살아난다”

존재의 경계를 무화하는 시
투명한 결속으로 완성되는 사랑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시어로 주목받아온 김선오의 두번째 시집 『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이 출간되었다. “사랑이 끝났다고 집요하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의 불가능을 파괴하려는 것 같다”(시인 황인찬)는 추천사와 함께 첫 시집 『나이트 사커』(아침달, 2020)로 문단에 등장한 이후 2년간 꾸준히 쓰고 다듬은 시 55편을 한데 묶었다.
부재하는 ‘너’를 통해 사랑의 영원성을 길어냈던 전작과 달리 이번 시집에서 김선오는 타자를 향한 인식의 전환을 도모한다. “보는 이의 시선을 조금씩 배반하는 방식”(「돌과 입맞춤」)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위치에서 이 세계를 경험하고자 한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항대립적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모두가 “투명한 유령”(「농담과 명령」) 같은 상태로 동등하게 연결되기를 꿈꾼다. 그러므로 『세트장』은 규정될 수 없는 존재들만이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일말의 차별과 위계조차 없는 관계를 이뤄낸다. ‘나’라는 틀을 벗어나야만 오롯이 결성할 수 있는 ‘우리’의 사랑으로 충만하다.

김선오에게 사물은 하나의 장소 또는 물질이 된다. 그리하여 기존 세계에서는 주어 자리에 올 수 없던 명사들이 행위주체가 되어 살아난다. 주체와 객체의 위계를 거부하는 인식론의 지평 위에서 우리는 그들이 서로 접속하고 연결 해제되고, 또다시 연결되는 장면을 목격한다._전승민(문학평론가)


“너는 설계된다. 꿈으로, 빈터로”
모두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트장

『세트장』에서 ‘나’는 단일한 주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적 대상의 입장으로 이 세계를 온전히 추체험하고자 한다. 여기서 대상의 범주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고 사물까지 포괄한다.

물소리가 나를 흐르게 한다. 햇볕이 나를 하얗게 거두어들인다. 몸은 다 사라지고 나는 물이 되었구나. 물이 되었구나. 아무것도 아프지가 않다.
―「나무에 기대어」 부분

나무에 기대어 물소리를 듣던 ‘나’는 그 아름다운 리듬에 부지불식중 자아를 흘려보낸다. 햇볕에 증발되는 방식으로 물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그려내는 무아와 전이의 과정에서 고통이나 상실감은 조금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아무것도 아프지가 않다”). 그것은 마치 순리를 따르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다면 ‘나’가 물이 될 때 물은 무엇이 될까.

내 안에 방이 앉아 있다
방이 나를 어지른다

바다가 바다 밖으로 헤엄친다
―「목조 호텔」 부분

주체가 대상이 될 때 대상은 주체가 된다. ‘나’가 방이 되면 방이 나를 어지를 수 있는 것처럼 “바다가 바다 밖으로 헤엄”치는 일도 가능해진다. 이처럼 『세트장』에서 ‘나’가 대상으로 접속해 들어가는 순간, 대상은 주체로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창문이 날아와 돌을 깨뜨”(「복원」)리는 상황처럼 기존의 질서는 역전되고 모두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누군가는 우리를 안개라고 부릅니다”
서로를 훼손하지 않는 무규정의 사랑

그렇다면 모두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계에서 시인이 이루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전승민은 ‘나’와 대상의 구분이 무효화될 때 “논바이너리non-binary 주체가 현현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분법을 뒤흔들고 무화시키는 역능을 지닌 행위주체”들이 일말의 타자성도 훼손하지 않는 관계 맺기를 실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트장』에서 스스로를 무엇으로도 특정하지 않아 무엇과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밖으로 넘실대는 세상”을 비추지만 결코 “깨지지 않”는 형상으로서 언제까지나 서로를 빛나게 할 것이다(「농담과 명령」).

나를 기다리던 사람을 잃는다

그러나 그가 손을 들어
나를 부르고
여기라고 이쪽이라고 말하면

나는 금세 되찾는다
―「전단지들」 부분


■ 추천의 말

김선오에게 사물은 하나의 장소 또는 물질이 된다. 그리하여 기존 세계에서는 주어 자리에 올 수 없던 명사들이 행위주체가 되어 살아난다. 주체와 객체의 위계를 거부하는 인식론의 지평 위에서 우리는 그들이 서로 접속하고 연결 해제되고, 또다시 연결되는 장면을 목격한다._전승민(문학평론가)


■ 시집 속으로

폐교 안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꿈이 설계되고 있음을 알았다. 꿈은 벌써 며칠째 숲을 부수고 빈터를 지었다. 그곳에 너를 서 있게 하려나 보다.
―「세트장」 부분

졸다가 눈을 뜨면 창밖의 설경이 방을 조금 침범해 있기도 했다. 눈송이가 각자의 빛을 물고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방은 느린 속도로 눈밭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방은 눈밭의 여운일지도 몰랐다.
―「돌과 입맞춤」 부분

너는 달린다. 너의 배경을 무너뜨린다. 그곳에 도서관이 생긴다. 너의 운동화 밑창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 한 톨 허공을 떠다니다 안착한 어느 책의 모서리, 빛 잘 드는 도서관 모든 책의 표지가 하얗게 바래 있다. 사라진 글자들 지금쯤 어느 나라의 대기를 떠다니는가. 네가 달려서 국경이 사라진다.
―「너의 나라에서」 부분

걸어요 우리는 열차 진행의 반대 방향으로 마지막 칸에는 조금도 기억되지 않은 오래된 여름이 웅크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걷습니다
―「열차 진행의 반대 방향으로」 부분


■ 뒤표지 글

밤의 유리창, 이차원 평면 위에 내 모습이 흐리게 떠 있습니다. 저 상(像)의 입장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웃으면 따라 웃고 울면 따라 웁니다. 이곳에서 엿보는 이차원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이차원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은 삼차원의 부피에 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면 위 얼굴은 자신이 나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삼차원에는 사차원에 존재하는 무엇이 없습니까. 어쩌면 삼차원 세계에 사는 나는 사실 사차원 속 누군가의 반영인지도 모릅니다. 사차원의 그가 지닌 무엇이 내게는 결락되어 있기에 나는 그를 인지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차원의 그는 오차원에 사는 누구의 반영입니까. 그렇다면 오차원의 그는, 육차원의 그는, 어쩌면 모두가 자각할 수 없는 존재의 표정을 따라 웃고 따라 울고 그렇게 계속됩니까.
유리 위 얼굴은 빛과 어둠의 대립하에 발생합니다. 실내보다 바깥이 어두운 시간, 내가 창의 근처에 머무를 때에. 날이 밝거나 콘크리트 벽 쪽으로 몸을 옮기면 반영은 소멸합니다. 사차원의 커다랗고 지저분한 창, 모서리를 향해 걸어가는 누군가, 유리 위에서 끌려가는 반영-우리들, 그 위에 남겨진 사차원의 숱한 손자국. 그 시간 동안이 삶이라면, 그가 마침내 불투명한 곳으로 몸을 옮기는 순간을, 선명한 낮이 우리를 지우며 찾아오는 장면을 우리는 영영 볼 수도 지닐 수도 없기에.


■ 시인의 말

언제부턴가 흰머리가 난다.
거울 속 어딘가 반짝거린다.
뽑아야 하나 자세히 보면 사라지고 없다.

몇 개의 머리카락을 집어 올려 보지만
온통 새카만 것들뿐이다.

2022년 5월
김선오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하농 연습/무수한 놀이/세트장/돌과 입맞춤/범세계종/투어/질문들/침범, 노이즈, 산성/증거/청킹맨션/익사하지 않은 꿈/조용한 가게/풀의 밀폐/사랑을 위하여

2부
R을 제외한 해변의 전체/루시드 서머/농담과 명령/부드러운 반복/시퀀스/여름의 새/무한 구역/섬 짓기/비/커피나 마실까/십진법/너의 나라에서/한 글자 동물

3부
침묵의 푸가/세트장/복원/미동/나무에 기대어/목조 호텔/동전 없음/목측/석조 호텔/진화/핀/모빌/조립/벽의 편/가정용 피아노

4부
현대사 공부/가출/휴가/봄/전단지들/불러오기/말로/면식범/정물/생태계/레가토/껌 종이/열차 진행의 반대 방향으로

해설
나를 제외한 너의 전체・전승민

작가 소개

김선오 지음

시인 김선오는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20년 시집 『나이트 사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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