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더카머

―시, 꿈, 돌, 숲, 빵, 이미지의 방

윤경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1년 5월 31일 | ISBN 9788932038667

사양 국판 148x210mm · 300쪽 | 가격 15,000원

분야 산문, 인문

책소개

이미지와 기억으로 가득한 내 머릿속 소우주
유년기 꿈의 잔해가 부유하는 그곳에선
목적지를 향한 길은 언제나, 이미 어긋나 있다!

“나의 분더카머 안에 무엇이 있을지, 그것들이 멸종한 무엇의 잔해이자 유물일지, 어떤 것은 여전히 생존하며 숨 쉬는지, 나는 조금쯤은 미리 알고, 대부분은 아직 전혀 모른다. 책의 끝까지 이르러서도 모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의 발굴, 수집, 진열, 해석 작업에 누구든 친구로서 함께하기를. 어느 날 나 역시 너의 분더카머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특정한 장르로 분류하기 힘든 독창적인 스타일의 글쓰기를 통해, 예술과 문학 영역의 눈 밝은 독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회자되어온 윤경희의 첫번째 책 『분더카머』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경이로운 방’이라는 뜻을 지닌 분더카머Wunderkammer, 즉 근대 초기 유럽의 지배층과 학자들이 자신의 저택에 온갖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진열했던 실내 공간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하여, 우리들 각자의 머릿속 내밀한 분더카머로 시선을 돌려 빛바랜 이미지와 기억과 텍스트 들을 소환해낸다. 어린 시절 창밖으로 바라보던 풍경, 첫 소풍날의 보물찾기, 어머니의 뜨개질, 친척집을 순회하며 벌였던 벽장의 모험, 이름 없는 독일 빵집의 냄새, 검은 숲 슈바르츠발트의 어둠, 누군가의 비석 위에 놓인 돌, 해석 불가능한 꿈들, 라블레의 허풍, 발터 벤야민의 체스 두는 인형, 롤랑 바르트의 동어반복, 그리고 각종 그림과 음악, 선물로서의 시들… 현재의 욕망과 불안의 근원에 다가가려는 열망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솟아오르고 조형된다
이 책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독자들은 이 초대장을 들고 누군가의 어지러운 방을 탐험하다가 문득, 스스로의 유년기를 향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내가 드문드문 떨어뜨려 놓은 빵 조각들을 따라서.


이야기가 떠오르고 조형되고 무너진다
빛바랜 기원을 향한 무한한 다가섬

분더카머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정한 체계에 따라 전시물들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일반에 공개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달리, 개별 소유주의 독특한 취향과 정신 세계를 반영하고 극화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의 의학 교수 올레 보름의 분더카머에는 상어, 아르마딜로, 큰바다쇠오리 등 수많은 동물 표본들과 이국풍의 외투, 가면, 뿔피리, 지구본, 해골 모형, 각종 미술 작품의 모사품, 태엽으로 움직이는 자동 인형, 그리고 그 밖에 도무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들이 수집가의 갈망과 백과사전적 지식욕을 고스란히 노출한 채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사물들은 일견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리된 듯 보이지만 우리는 금세 그 공간을 지배하는 무계통의 혼돈을 간파할 수 있다. 저자는 분더카머가 개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겪어온 고유한 역사와 기억의 진열실이자 마음의 시공간의 상징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에도, 가치 높은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이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한다. 저자는 이러한 파편들을 건져 올려 조각을 깁고 해석을 시도한다. 하지만 언어는 결정적인 의미화를 회피하며, 이러한 해석의 노력은 자꾸만 미끄러지고 만다. 저자가 전경화하는 것은 해석 그 자체라기보단 끝없는 실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렇듯 내밀한 분더카머의 이야기를, 말과 글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발산하는 감정과 감각을 독자들과 공유해보겠다는 어찌 보면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기꺼이 언어의 유혹에, 언어가 벌이는 게임에 뛰어든다.


라멜리의 책 기계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이야기,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의 모험.

책을 읽다 보면 다른 색깔과 호흡을 가진 텍스트들이 어수선하게 혼종되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차분한 목소리로 메타포에 관한 다소 진중한 설명을 들려주다가 어느덧 너무나도 내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앞 이야기가 공들여 쌓아올린 것을 다음 이야기가 부인해버리기도 하며, 종결을 향해 가던 이야기가 새로운 수수께끼를 덧입더니 방향을 바꾸어 질주한다. 『분더카머』를 제대로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이 책에 등장하는 라멜리의 ‘독서 기계(책 바퀴)’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16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군장비 기술자 라멜리는 여러 권의 책을 바퀴 위 독서대에 올려놓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앉은 자리에서 동시에 읽을 수 있도록 고안한 기계 장치의 도안을 남겼는데, 이 무용하기 짝이 없는 기계는 그 자체 유희적인 속성을 지님과 동시에 인간의 정신 작용과 세계관을 외화한 극장식 장치이기도 했다. 이 장치는 움직임이 멈춘 다리를 불필요하게 보충함으로써 독자의 불구성을 예고하고, 더 나아가 독서 행위 자체의 불구성을 사유해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장치에서 가시적으로 증폭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언어다. “답답하게 폐쇄된 사물 개체로서 존재하는 책꽂이의 책들은 독서 기계에 놓이고 펼쳐지고 돌아감으로써 무한히 새로 생성되고 변모하는 광대한 텍스트의 그물을 형성한다.” 끝없이 돌고 도는 언어의 운동. 나 자신의 탐험가처럼 기억과 사물과 텍스트 사이를 누비고, 시, 꿈, 돌, 숲, 빵의 길들을 통과하며 사유의 모험을 펼치는 『분더카머』는 그 자체 이 독서 기계를 닮아 있다. 『분더카머』라는 기계를 한 바퀴 돌려 첫번째 글을 다시 펼치면 원래의 텍스트가 조금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흑과 백의 문자가 찡긋 웃음 짓는 것도. 그러나 그렇게 다시 짜여진 풍경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추천사(영화비평가 유운성)

『분더카머』는 은신처이자 보호소이다. 무엇을 위한? 아마도, 카메라 옵스큐라가 몰아낸 모든 것들을 위한. 방에 대한 두 개의 메타포, 분더카머와 카메라 옵스큐라는 끝내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 온갖 경이로운 사물들로 가득한 방과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컴컴한 방, 안에 있는 것이 볼거리인 방과 바깥에 있는 것을 보려고 만든 방.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방과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방. 윤경희의 분더카머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느덧 고대적으로까지 여겨지는, 하지만 분명 근대의 아름다운 고안물인, 예술과 내면성을 위한 은신처이자 보호소다. 그런데 윤경희가 예술과 내면성을 구실 삼아 돌보려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언어다.
언어의 자의성이란 상식에 속한다. 어떤 말의 소리와 그것이 가리키는 뜻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인 연관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윤경희에게 이는 삶을 끊임없이 요동치게 하는 제일의 문제다. 때로 어떤 말의 울림은 소리 감식가인 그에게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하게 들려서 그 뜻이 찾아오는 순간을 거절하고픈 심정이 들 정도다. 한편, 분열된 여러 다른 말들 사이를 옮겨 다니면서도 결코 어떤 말에도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 강렬하고 절대적인 의미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분열된 채로 공존하는 말들이 있기에 메타포라는 강력한 문학적 활동이 가능해진다. 분열된 말과 말을 하나의 언어 안에서 잇는 이를 시인이라 부르고,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서 그리하는 이를 번역가라 부른다. 그러니 시인이자 번역가인 횔덜린 같은 이는 윤경희에게 각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분더카머』는 결코 완결된 책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는 책이다. 이는 분더카머가 결코 완결된 방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그러하다. 도무지 계통이라는 것이 없는 주인의 정신을 닮아 무질서하고, 변덕스러운 주인의 성벽을 닮아 품목과 배치가 자꾸만 바뀌는 방. 정말이지 놀라운 것은 심지어 이 방이 어떤 매개도 없이 주인의 내면과 곧장 맞닿아 있는 얼굴로까지 여겨진다는 점이다. 얼굴이 곧 내면인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면 느끼게 될 당혹스러움이란 이런 것일까. 마침표나 쉼표나 말줄임표처럼 예사로운 문장 부호들도 에돌다가 여울지고 고이기도 하는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 같고, 윤경희 자신이 자기 글의 독자가 되어 내뱉은 듯한 영탄의 표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기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분명 초대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이따금 겸연쩍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이 방에 계속 머무를 자격이 내게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카메라 옵스큐라의 가장 천박한 후예인 영화는 윤경희가 안내하는 분더카머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문학과 미술과 음악은 이 방의 곳곳에 떳떳이 자리하고 있지만, 영화는 그러한 예술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다른 이가 쓴 영화 이야기를 인용할 때나 호명될 뿐이다. 하지만 내가 이 방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분더카머』는 뜬금없고 실없는 영화 이야기로 조용히 책을 덮게 만드는 그런 범상한 에세이가 아니다. 기꺼이 낭만주의자이기를 자처하며 고대적인 것들의 무덤 곁에 있기를 꺼리지 않는 그와 같은 문지기가 있기에, 나는 안심하고 허풍선이들과 거짓말쟁이들과 사기꾼들과 욕쟁이들과 주정꾼들과 고리대금업자들과 투기꾼들과 도둑들과 이런 이들을 소리높여 상찬하는 매문가들로 어수선한 영화의 장터로 돌아갈 수 있다.


■ 책 속으로

반면 분더카머는 개별 소유주의 독특한 취향과 정신 세계를 반영하고 극화한다. 분더카머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당대인의 계급적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긴 했지만, 외부 세계에 편재한 각종 감각적 대상들을 향한 인간의 애호심과 백과사전적 앎의 의지를 입체적으로 표상하고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신의 피조물을 공중으로 드높이고 인간의 작품을 땅 가까이 낮추었다 할지라도, 일견 단순한 것에서 더 복잡하고 희귀한 생명 현상의 증거와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분류했다 할지라도, 너무나 인간적인 이 소우주 안에서는 이러한 단선적 체계를 부수어 날리는 회오리 흐름들이 항시 발생한다. (14~15쪽)

분더카머를 재해석하는 현대의 몇몇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분더카머는 개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겪어온 고유한 역사와 기억의 진열실이자 마음의 시공간의 상징체다. 기억이란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 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한다. (19쪽)

라멜리는 자신의 책 바퀴가 유용하고 편리하다면 그것은 “한곳에서 움직이지 않고도 여러 권의 책을 보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이 모든 헛소동의 희열과 비애는 바로 이 문장에 기원한다. 이미 알아차린 사람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 각자의 신체의 다양한 차이를 고려할지라도 독서의 공간과 자세는 대부분 유사하다. 책 읽기는 신체 대부분을 한 장소에 고정시킨 채 안구와 손 양자를, 또는 둘 중 하나를, 조용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하는 행위다. 독서 활동에서 다리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계는 몸이 성한 사람은 물론이고 “거동이 불편하거나 통풍에 걸린 사람들”에게조차 딱히 특별한 도움이 되리라 기대할 수 없다. 독서 기계는 존재할 수 없다기보다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사물이다. 잉여다. 단 하나의 바퀴임에도 이미 다섯번째 바퀴다. (32~33쪽)

독서 기계의 이미지는 단지 드 만의 것만은 아닌, 언어에 관한, 그리고 언어에 생을 의탁한 인간 주체에 관한, 현대적 사유의 한 양상을 탁월하게 시각화한다. 돌고 도는 거치대와 그 위에 펼쳐진 무궁한 언어의 편린들은 그러므로 이미 비유다. 한 언어 안에 수줍고 조심스럽게 응축된 다른 언어의 가능성들이 섬세하고 사려 깊은 읽기 덕에 한꺼번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메타포이기도 하고, 고독한 한 언어 곁에 다른 언어들이 친구처럼 이웃처럼 인접하여 우애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메토니미이기도 하고, 나의 말 곁과 속에 너의 말이 다가오고 들어서는 대화이기도 하고, 죽은 자의 말이 남은 자리에 꽃처럼 술잔처럼 눈물처럼 산 자의 말을 얹는 엘레지이기도 하다. 읽고 쓰고 만나고 영영 만나지 않아도 이야기하고 살아가고 죽는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들이 각각의 칸마다 몽타주처럼 명멸하는 사진첩이자 영사기이기도 한 것이다. (37~38쪽)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진부한 말로 형용할 때의 무심함, 또는 난감함, 그러나 어쩔 수 없음. 이에 대해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아도라블: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자신의 욕망의 특수성에 명칭을 부여하는 데 도달하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 주체는 약간 바보 같은 이 단어에 귀착한다. 아도라블해!” […] 사랑이 “사랑해”의 동어반복을 피할 수 없듯, 나는 “adorable”을 그저 아도라블이라 번역하는 수밖에는. 동어반복을 피하기는커녕 이것이야말로 내 능력으로 가능한 최선의 번역이기에. 모든 번역은 결국 동어반복이기에. 검은 숲은 슈바르츠발트이기에. 번역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경이로운 동어반복으로 우리는 타자의 언어를, 타자를, 사랑하게 되기에. 그리하여 마침내 생의 한 시점 그것을 향해 가고 그것과 있게 되기에. (106~107쪽)

첼란에게 시는 선물이다. […] 첼란에게 시가 생성되는 방식은 계시적 영감에 의해서도 아니지만 발명 같은 적극적인 기술의 사용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에게 시가 오므로 그는 그것을 받는다. “나는 내가 쓴 것을 잘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받은 것을 잘 썼을 따름이지요)”라는 겸양은 그의 시작 방식을 함축한다. 이에 따르면, 선물 받은 시의 정식 사용법은 받아쓰기가 될 것이다. 내게 왔기에 들은 말을 종이 위에 옮기기. 말을 그것과 닮은 다른 말로 옮기는 번역은 받아쓰기의 한 형식이다. 시 선물의 수신자는 시의 겸허한 서기이자 번역인이 된다. (152~153쪽)

우리. 톤의 공동체. 그것은 공명이자 화음. 하모니. “아르모니아”는 오늘날 주로 음악 용어로 쓰이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박을 건조할 때 목재의 각 부분을 꼭 맞게 연결하는 조임새나 이음매 또는 그 도구와 방법을 뜻하기도 했다. 아르모니아는 톤에서 톤으로, 우리, 기호에서 기호로, 미완의 파편에서 상실 이후의 잔존으로, 말에서 다른 말로, 이행하며 너르게 연결한다.
「므네모시네」에서 아르모니아 역할을 하는 단어는 “그리고und”와 “그러나 aber”이다. […] 범상한 두 접속사는 그러나 횔덜린의 시에서라면 진술의 논리적 전개를 보장하는 순접과 역접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기 앞과 뒤에 놓인 말 조각들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문법 요소인지, 어떤 시간성과 인과의 관계인지 거의 무심하다. 단지 언어 안의 균열을 조이고 심연을 메꾸는, 요원한, 과제에 충실할 뿐. (277쪽)

목차

초대장
라멜리의 독서 기계
보물찾기
도자기와 거울
그의 손짓을 알아듣다
메르헨
숲속의 성
검은 숲, 동어반복, 흰 숲
빵집의 이름은 빵집
산문 속의 장미
돌의 꿈
오역과 사랑
found footage
금지된 말들
전령사의 꿈
생성의 벽장
허구의 도편
포르노그래피
쿠로스의 꿈
묘지 박물학
심장의 열쇠공
사랑은 예술에 속한다

미주
도판

작가 소개

윤경희 지음

파리 8대학 비교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로 일하며 문학과 예술 관련 글을 쓴다. 『그림자와 새벽』을 쓰고, 앤 카슨의 『녹스』와 아비 바르부르크․조르조 아감벤의 『님프』를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7 +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