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경 달밤

문학과지성 시인선 549

신영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10월 30일 | ISBN 9788932037851

사양 변형판 128x205 · 124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단단하고 난폭한 세계를 통과해 흘러가는 물송이들
어둠을 벌려 환한 길을 내는 달밤의 노래

시력 20년 차를 맞는 시인 신영배의 여섯번째 시집 『물안경 달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0년대 전위시의 지형도에서 진은영, 김이듬, 이기성 등과 함께 ‘마녀적 무의식의 시’(오형엽)로 읽혔던 신영배의 시. 그는 그간 ‘물과 그림자의 시인’이라 불리며 무정형의 존재들이 흐르고 투과하여 낯선 상상계로 향하는 과정을 시로 담아 김광협문학상과 김현문학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되는 여성의 삶에 주목하여, 날카로운 폭력 현장을 부드럽고 환상적인 세계로 옮겨내는 부단한 실험을 감행하면서 현대 시사 안에서 자신만의 독보적 영역을 확보했다. 이번 시집에서 전 세대를 망라해 다양한 폭력을 겪는 익명의 여성들을 ‘B’로 부르며, 그녀들의 아픔이 연결되어 흐르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전반부 서른여덟 편의 시가 1, 2부에 나뉘어 담겨 ‘달리고 날고 돌고 흐르는 물송이’의 운동을 리듬감 있게 제시한다면, 3부의 긴 산문시 「달밤」에는 시 쓰는 삶의 면면이 담겼다. B와 나, 찢기고 뭉개진 얼굴들이 환한 물송이로 다시 피어날 환한 날을 향해 신영배는 오늘도 꾸준히 움직이고 있다.

신영배는 어둠 속의 사물을, 잃어버린 단어를, 상처 입은 마음을 한 송이 한 송이 물송이들로 피워내려 한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찢기고 버려진 그녀들에게서, 굳게 닫힌 사물들에게서 가까스로 하나씩 물송이가 피어날 때, 우리는 어딘가 환한 세계로 옮겨지는 중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오연경)


물송이1, 물송이2, 물송이3……
물이 되어 만나고 흘러갈 상처 입은 여성들의 역사

그녀(B, 32)는 남편이 술 취해서 오는 날이면 부엌을 치웠다 칼을 치웠다 부엌칼에서 멀리 아이를 떼어놓았다 멀리 아이를 감추었다 멀리 아이를 재웠다 깨어나면 죽을지 몰라 멀리멀리 잠이 들었다

물송이4가 달렸다
– 「그녀는 가방을 안고 잠이 들었다」 부분

바다에 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안 소녀를 데리고 물송이1이 달린다, 상처를 감추기 시작한 소녀를 데리고 물송이2가 달린다, 깨진 발등이 드러나고 물송이3이 달린다, 검은 물을 쓰기 시작한 소녀를 데리고 물송이4가 달린다, 시 한 편에 넘어오는 그녀(B, 19)와 푸른색에 넘어가는 나의 밤 나의 바다
– 「나의 밤 나의 바다」 부분

앞서 언급했듯 신영배의 시에는 B로 표기된 수많은 ‘그녀’가 등장한다. A가 아닌 B, 혹은 비[雨]. 해설을 쓴 오연경은 이 명명법에 대해 “주류의 여집합으로 존재하는 ‘비非’주류로서의 여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세계와 언어를 흐르게 할 수 있는, 기성의 반대쪽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주류의 질서를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는다”라고 설명한다. 실종된 15세 소녀(「풀과 교복」), 망치로 맞고 유기된 24세 그녀(「B, 풍기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32세 그녀(「그녀는 가방을 안고 잠이 들었다」) 등 나이와 함께 (B, 15) (B, 24) (B, 32)라 표기된 이들은 “십대부터 팔십대까지의 익명의 여성들로 확장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애에 걸쳐 폭력의 경우의 수를 축적해온 여성의 일대기로 압축된다”(오연경)고도 읽힌다. 하지만 그녀들은 폭력 현장에 고정되는 수동적인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닌 유동의 ‘물송이’와 함께 움직임의 주체가 되어 날고 뛰고 흘러간다. 물로 씌어진 듯 언젠가 흔적 없이 말라버릴지라도, 끊임없이 씌어지고 잃어버릴 시가 물송이들을 추동하며 리듬감 있게 풀려나오는 이유다.


시라는 무대에 오른 나와 그녀
약한 존재들과 발맞춰 나아가는 용기

그녀가 구두로 등장하고 춤을 춘다. 나도 구두로 등장한다. 달이 밝다.
그녀가 모자로 등장하고 노래를 부른다. 나도 모자로 등장한다. 밝다.
그녀가 구두로 등장하고 내가 모자로 등장한다.
구두와 모자. 춤을 춘다. 노래를 부른다.
내가 구두로 등장하고 그녀가 모자로 등장한다.
구두와 모자. 춤춘다. 노래한다.
구두와 모자. 벌어진다.
구두와 모자. 멀어진다.
구두와 모자가 걸어간다. 그녀와 내가 걸어간다. 벌어지는 구두 멀어지는 모자, 벌어지는 모자 멀어지는 구두. 달빛 속에서 우리가 옮기는 것은 무엇일까.
—「달밤」 부분(중략 표기 생략)

3부의 장시 「달밤」은 마치 이 시집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한데 모인 듯도 하다. “나는 시를 쓰면 안 되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솔직한 고민 앞에서 우리는 시인 신영배가 헤매고 있는 기묘한 숲과 골목을, 시적 자아와 나의 자리가 수시로 바뀌며 서로를 알아들을 수 없고 엇나가는 과정을, 한시도 멈출 수 없는 시 쓰기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다. ‘그녀’들을 바라보고 대화하여 한 발씩 나아가는 시의 여정. 이는 중간중간 삽입된 이탤릭체 지문들을 통해 무대 위에 오른 ‘나’와 ‘그녀’가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으로도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시인은 묻는다. “달빛 속에서 우리가 옮기는 것은 무엇일까?” 이 시집의 마지막 장에 이른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답을 느낄 수 있다. 곧 사라져버릴 듯한 환상의 세계라 해도, 어두운 밤 약한 빛 아래서 비릿한 공기를 마시며 함께 걷는 물송이들의 용기는 결코 미약하지 않다는 것을. 신영배를 읽는 우리도 오늘 “다 마르기 전에 눈을 한번 크게 뜨는 달밤” 아래 있다.


■ 시인의 말

우울이 나를 가두고 구두를 감추었다.
물로 구두를 만들었다.
여기, 물구두를 신고 달린 기록.

2020년 가을
신영배


■ 뒤표지 글

안녕.
이 말을 어디엔가 쓰고 싶었다.
물구두를 쓰듯이.
안녕.
이 말은 처음의 말이기도 하고 끝의 말이기도 하고.
물구두처럼.
안녕.
만나거나 헤어질 때.
눈을 뜨거나 감을 때.
물구두.
안녕.
이곳의 나에게.
당신에게.


■ 추천의 말

단단한 사물을 물 쪽으로 당겨 물렁하게 만드는 그녀, 상처의 기억을 어루만져 물송이로 빚어내는 그녀, 벌어지고 멀어지는 사태를 겪어내는 그녀, 구두와 모자를 물구두와 물모자로 옮기는 그녀가 있어 비 내리는 B의 세계가, 잃어버린 B의 세계가, 미지의 B의 세계가 ‘활짝’ 열린다. 신영배는 시 속의 그녀와 나에게 묻는다. “달빛 속에서 우리가 옮기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물송이들을 따라 여기까지 걸어온 독자가 답할 차례다. 그것은 시인과 우리들 사이, 물物과 물[水] 사이, 흔들리고 출렁이는 경계에서 지어졌다 사라지는 시의 집이라고.

목차

■ 목차

시인의 말

1부 물송이1과 물송이2와 물송이3과 물송이4와
달과 마트/애인에게 편지를 썼다/물안경/데이트/그녀는 가방을 안고 잠이 들었다/풀과 교복/물구두를 신고/개밥과 소녀/물속에서 손을 잡았다/터미널과 생리대/물과 B, 80/이불과 물의 방/숲과 물베개/물의자에 앉아/B, 풍기다/B, 48/사과를 팔았다/미용사 B와 비의 날/물버스 정류장/나의 밤 나의 바다

2부 물안경이 떠 있는 테이블
끌다/아주 희미한 건반/물안경과 푸른 귀/물가위/물꽃뱀상자/물걸레와 옥상/물기타/B와 나는 우산을 같이 쓰고 있었다/물악기/물운동화 1/물운동화 2/물운동화 3/칼과 물거울/물 빨간 구두/물고무줄 총/면도날과 물비행기/물안경이 떠 있는 테이블/방과 어항

3부 걸어가며 마르는 나무
달밤

해설 물物과 물[水] 사이 출렁이는 B의 세계・오연경

작가 소개

신영배 지음

시인 신영배는 1972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2001년 『포에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기억이동장치』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물속의 피아노』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산문집 『물사물 생활자』가 있다. 김광협문학상, 김현문학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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