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탄식

문학과지성 시인선 545

마종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9월 9일 | ISBN 9788932037677

사양 변형판 128x205 · 149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시인 마종기,
아주 멀리서, 실은 당신 곁에서 건네는 그의 맑은 위로

올해 시력 60년을 맞이한 마종기 시인이 신작 시집 『천사의 탄식』(문학과지성사, 2020)을 펴냈다. 제23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마흔두 개의 초록』(2015) 이후 5년 만의 시집으로, 타국에서 한 편씩 써온 시 54편이 3부로 나뉘어 묶였다. 시인은 60년간 타국의 일상 속 성찰이 담긴 담백하고 아름다운 시어로 씌어진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 산문집을 꾸준히 선보이며 시인 자신과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왔다.
젊은 시절 이 땅을 떠나야만 했던 시인 마종기는 시 쓰기로 고국과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왔다. 이번 시집에는 퇴직 전 반세기 동안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 살아가며 겪었던 외로움이나 고국의 작은 골목을 그리워하는 일에서부터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깊은 회한, 삶에서 마주한 소박한 존재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찰까지, 마종기 시 특유의 쓸쓸하고 따스한 아름다움이 더욱 짙푸르게 녹아 있다. 무엇보다 평생 시인, 의사, 신앙인으로서 살아온 그가 자신의 시적 기원을 밝은 눈으로 돌아보면서 언젠가 다가올 세상과의 이별, 그 다음의 만남을 준비하는 겸허한 시들로 가득하다.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는 시인에게 이별이란 슬프지만 따뜻하다. 그렇게 어떤 슬픔은 위로가 된다.

우리는 이 시집에서 빼어난 서정적 지성이 가꾼, 연민과 응시와 회억의 큰 숲을 본다. 일찍이 규모와 세련을 이룬 마종기 시인의 언어적 도구는 세월이 흐르면서 근간의 안정과 성숙을 성취했고 그 도구를 다루는 몸과 마음은 뚜렷한 연륜을 더하여, 그의 시 시계는 광활하고 울창해졌다. 이제 눈앞에 펼쳐진 풍요로운 숲을 걸으며, 지속과 변화의 미세한 결을 찾아 읽는 일은 앞으로 오래 독자들의 행복이 될 것이다. 이희중(시인, 문학평론가)


길이 시작된 곳에서 다시 피워낸 깊고 투명한 희망

그게 정말 길이었을까,
가쁜 숨 쉬고 땀 흘리느라
고개 숙이고 주위를 살피느라
정작 지나온 긴 나날은
보지도 못했네. 길이었을까.

헤치고 밝히며 온 발걸음은
춥기도 하고 바람도 불고
더워서 지치기도 했었지만
스쳐온 밤낮에 흩어져 있던
꽃냄새, 빗소리, 강물 빛까지
그게 온통 한 생의 속살이었네.
―「친구를 위한 둔주곡」 에서

시인은 매해 두세 달씩 고국에 머물곤 했지만 올해는 팬데믹 탓에 올 수 없었다. 여느 해 같았다면 고국에서 보냈을 시간 동안, 마종기는 차분하게 자신의 삶과 시력 60년을 반추하며 시적 기원을 찾아간다. 그는 이십대에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당했고 추방당하다시피 미국으로 향해야만 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는 직업은 시인에게 긍지와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사람의 신음 사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신설동 밤길」)들어갈 때마다 마종기를 붙들어주는 것은 마음속 고향 서울의 노을을 닮은 “따뜻하고 편한”(「노을의 주소」) 모국어와 시였을 것이다. 시와 함께 그의 삶을 지탱해온 다른 한 축은 신앙이었다. 천주교 신앙은 낯선 세상에 던져진 채로 늘 “삶과 죽음”을 응시할 수밖에 없던 의사 마종기에게 시인으로서의 “고통과 희생과 보살핌”(「시인의 글」)을 기쁘게 자처하고 매 순간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원동력이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로써 “내 안에서 시작되고 그래서 내가 책임지고 내가 울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마종기 깊이 읽기』)라는 의연한 다짐이 가능했으며, “꺾이지 않았던 날들”을 모아 “꽃이나 열매로 이름을 새”기는 ‘후회 없는’ 경험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신설동 밤길」).
지금 같은 환란의 시기는 오히려 “무섭고 겁이 나도 돌아설 수가 없”는 때다(「파타고니아식 변명」). 길을 잃고 모든 것이 흔들리는 이때, 마종기는 초월적이며 거대한 존재인 대자연과 ‘신’에 한발 더 다가선다. 표제시이자 최근작인 「천사의 탄식」 초반부에서 그는 “창궐하는 역병”을 마주하고 무력함을 느낀 채 “60년 전 시인이 되겠다고 한 건방진 약속”을 취소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문하고, 자신의 영혼에 귀를 기울이고, 거칠었던 삶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시의 말미에 이르러 오늘 들려오는 “탄식”은 호통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자주 들었던” “다시 시작하라는” “다정한” 위로임을 비로소 자각한다. 그렇게 시인이자 의사이자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은 초월자 앞에 선 ‘인간’ 마종기 안에서 하나가 된다. 시집 『천사의 탄식』에 수록된 여러 시에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흔들리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작은 희망을 발견하고야 마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과정이 담겨 있다.


재회를 기다리는 청명한 이별

세상에는 도대체 몇 개의 마지막이 있을까.
―「마지막/시차 적응」에서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나이”(「갈리폴리 2」)에 이른 시인은 그리운 것이 많다. “어릴 때 살던 헌 집” 마당에서 챙겨 온 흙을 종종 들여다보며 소중히 간직한다. “혹시라도 내가 이국땅에서 갑자기 가면/이 한 줌 흙을 꼭 내 손에 쥐여달라”(「서울의 흙」)는 서러운 마음. “모든 사람이 태어난 나라에서 죽지는 못한다”(「갈리폴리 2」)고 하더라도 “이승을 하직한 후에는 안동에 와 살고 싶다”(「안동행 일지」)며 겨우 그 마음을 달랜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은 이별이겠지만/내 흙을 보고 있으면 이별도 부드럽다”(「서울의 흙」).
이처럼 ‘부드러운 이별’은 이번 시집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친구들…… 그리운 이름들을 가만히 하나씩 불러보고, 추억을 되새기며 애타게 그리워한다. 그렇지만 “지상의 날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자화상 2」) 쓰면서도 그 ‘떠남’이 절절히 슬프기보다 “청명하고 명랑한” 것은(「즐거운 송가」), 먼저 떠난 오랜 친구의 약속, “내 옆에 남겠다는 그 약속”(「는개의 시간」)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든 삶에 대한 비유이든 “질긴 평생”을 마무리하는 “겨울의 끝날”은 “그 뒤에 오는” 봄이 있어 “오히려 정답다”(「겨울의 끝날」). 지극한 그리움 끝에 ‘다시 만나게 되면 반가워 웃을지 오래 참아 우는 얼굴일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어딘가 함께 모여 사는 곳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하므로(「다시 만나야 하니까」). “나이 들어가는” 길 위에서 “다행이다”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 오래 바라본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은 그렇게 시인의 시선을 거쳐 쓸쓸하지만 따뜻한 위로가 되어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어둠 속에서 혼자일 때, 세상을 헤맬 때” “기댈 곳이 늘 있으니 다행이다”(「다행이다」).


본문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갔다.
저희들끼리 자라고 저희들끼리
날아다니다가 짝을 찾아
여러 모양의 열매를 맺었다.

그 후에는 방문 두드리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들리다 말다 한 소리는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들이었다.
모두가 필요 없다며 버린 인연들.
어느 날 저녁부터는 주위가 작아지고
흥얼거리는 박자인지, 누가 오는 건지
밤새도록 속삭이는 음성이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밤과 눈을 부지런히 섞고 있었다.

보이는 게 다 흐렸지만 고백하자면
그것이 바로 내 질긴 평생이었다.
그래도 끝이 흰색이라는 게 좋았다.
체세포에 묻은 인내는 무게만 있는 건지
한 발 두 발 걷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참는 법을 몰라 헤매던 날들은 떠났다.

그렇게 겨울이 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후회들이 모여 눈이 되었겠지,
맨몸을 감는 겨울밤이 오히려 정답다.
겨울의 끝은 저만치에 오고 있지만
그 뒤에 오는 날들은 누구의 진정인가,
숨이 끝나도 한동안 귀는 열려 있다지.
나이 든 후부터 자라난 힘든 물음들이
다 되살아나 내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안에 나를 부르는 정든 목소리 하나.
―「겨울의 끝날」 전문

잘 익은 산소여, 그래도 살아 있다고
너를 마신다. 주름살 깊은 맥박이 뛴다.
살아 있는 체온을 나누어 가지는 이 아침,
체온이 없는 시는 죽은 시라고 말해준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상처의 저 나무.

움직이고 숨 쉬는 것만이 사는 게 아니다.
나이 들수록 놀랍게 너그러운 날들 많아지고
쉬어갈 나무 그늘이 한 아름씩 늘어난다.
나무의 손가락이 심장의 중심을 위로해준다.
―「아침 산책」 부분

그럼 잘 가요.
가다가 길 잃지 말고
여린 영혼은 조심히 안고
가야 할 곳 잊지 말고
조심해 가요.

길을 잃고 회오리 속을 헤매며
어디로 가야 할지 당황하다가
나는 눈물까지 흘린 적이 있었다.
먼지만 차 있던 도심의 하늘에서는
눈을 떠도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누르던 창백한 날갯짓도
아무도 비상의 낭만이라 부르지 않았다.
통증을 참던 사이에 길들은 떠나고
가고 싶은 마을은 이미 문을 닫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미망 때문인지
변화무쌍한 한밤의 별에 취해서인지
앞뒤로 찾으며 날아다닌 방탕한 날들이
바로 살아 있는 생의 흔적이란 것을
나는 오래 모르고 비웃기만 했었다.

어느 인연 아래서건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우선 영혼끼리 인사를 나누고
내 숨소리가 편하게 당신께 가는지,
당신의 체온이 긴 다리를 건너
내게 쉽게 오는지도 지켜보아야겠지.

그럼 잘 가요.
가는 여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부디 아무 상처받지 않기를,
모쪼록 돌아가는 당신의 길이
늘 빛나고 정갈하기를……
―「이별하는 새」 전문


뒤표지 글(시인의 글)
시는 사랑의 한 표현 방법이고 체온 나눔이고 생환 훈련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한세상 시를 사랑하며 살았다. 시의 목표가 사랑이 아니라면 그런 시는 내게 필요 없는 존재다. 왜냐면 세상은 보기보다 잔인하고 외롭고 힘들기 때문이다. 시는 삭막한 세상에서 상처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아마도 내 직업이 의사였던 때문일까. 내 관심사는 언제나 삶과 죽음, 고통과 희생과 보살핌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내게는 제스처이고 껍데기고 믿을 것이 못 되는 것들이었다.

의사였을 때는 보이는 것을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했고 들리는 소리를 확실하고 분별 있게 듣는 것이 필수였다. 그런데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싶어서이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고 싶어서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 시인이라면 시인의 감수성이나 상상력이란 것이 어디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시인의 말
지난 시집 이후에 발표한 시들,
아주 멀고 멀리 산 넘고 바다 건너에 살고 있는
고달픈 말과 글을 모아서 고국에 보낸다.
5년 동안 모은 시들이지만 그게 내 평균 속도였으니
큰 게으름은 없었다고 믿고 싶다.
시를 읽어줄 당신께 감사한다.

2020년 9월
마종기

목차

차례
1
이슬의 명예
사순절의 나비
신설동 밤길
바다들의 이별
투옥의 세월
갈리폴리 1
갈리폴리 2
저 집의 봄
나그네의 집
서울의 흙
비 오는 칠레
잡담 길들이기 20
소름의 역사
친구를 위한 둔주곡
저녁 기도
겨울의 끝날
사소한 은총
파타고니아식 변명

2
이사
는개의 시간
진혼의 해안
바지락이나 감자탕이나
노는 땅
무용가의 초상
마지막/시차 적응
동생의 도시
시간의 그늘에서
노을의 주소
화가 에드 호퍼의 겨울
잡담 길들이기 21
잡담 길들이기 22
새의 안부
다행이다
침몰하는 바다
늦가을 감기

3
아내의 꽃
아침 산책
월요일의 그림자
젊고 싱싱한 단어는
코끼리의 후퇴
큰 참나무의 눈
이슬의 기상
사자는 정말 시인일까
안동행 일지
기도해주어!
빨강 머리 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별하는 새
남해 밤바다
즐거운 송가
자화상 2
천사의 탄식
장미, 요한이 살던 마을
다시 만나야 하니까

해설 이별 너머・이희중

작가 소개

마종기 지음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1966년 도미,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했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뒤, 『조용한 개선』(1960), 『두번째 겨울』(1965), 『평균율』(공동시집: 1권 1968, 2권 1972), 『변경의 꽃』 (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그 나라 하늘빛』 (1991), 『이슬의 눈』 (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2006), 『하늘의 맨살』 (2010), 『마흔두 개의 초록』 (2015) , 『천사의 탄식』 (2020)등의 시집을 펴냈다. 그 밖에 『마종기 시전집』 (1999),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2004),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2003)과 『아주 사적인, 긴 만남』(2009),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2010), 『우리 얼마나 함께』 (2013),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2014)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1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