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하이픈 (2020년 가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9월 7일 | ISBN 1227285X

사양 신국판 152x225mm · 152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가을호를 펴내며

산만한 함성에 맞서

니코스 풀란차스를 위시한 주요 정치이론가들이 “위기관리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 지도 어느덧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냉전이 종식되었고, 소위 민주화가 진척되었으며, 사회의 모든 부분이 기술적으로 첨단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여전히 관리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위기관리의 위기” 상황은 계속 진행 중이다. 아니, 요즈음 들어서는 오히려 심화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러니까, 작금은 ‘위기관리에 의한 위기 상황’ 혹은 ‘위기로 위기를 끝없이 돌려 막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미상불 오늘날─분야를 막론하고─이론가들은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편성된 체제가 되레 위기를 일으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심지어 더 크게 키우)는 역설적인 장면을 수시로 목도한다. 물론 거시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역사상 위기 아닌 시대는 거의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껏 여러 논자가 누차 언송한 것처럼, 21세기 사람들의 삶, 끝없이 거대해진 동시에 극도로 세밀해진 과학과 기술과 정책─주지하다시피, 이 세 가지는 현재 삼위일체trinity로의 완벽한 변신을 꾀하는 중이며, 머잖아 성공할 듯 보인다─덕분에 우리의 일상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지고 빨라졌다. 그런데 이 변화는 동시에 모든 가치와 의미를 무차별적으로 표백하는 ‘산문화(散文化)’의 과정이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가락과 리듬이 우리의 안과 밖을 간단없이 떠돌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는 지나치게 산문적이다. 이때 ‘산문적’이란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모든─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모르는─(목)소리가 제각기 독립적인 기율을 주장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말 그대로 ‘흩어진 언어들’의 세계이다. 하여 전체적인 문제 상황은 일견 출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는 듯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원리에 의해 대번에 정리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날 단독자의 시간성Zeitlichkeit은 모든 개인–집단–대중이 움켜쥔 시의성Aktualität과 영원히, 영원처럼 어긋나버린 듯하다. 폭발적인 동시 접속 및 효율적인 실시간 대화가 제아무리 빈번히, 성공적으로 이뤄진다 해도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비단 언어와 매체가 죄 흩어져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흩어짐 자체가 수면 아래에서 은밀히 추진되는 총체적 표준화total standardization에 의해 나날이,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비가시적 원심성이 우리 시대를 과거의 모든 시대와 구별되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산문적 위기 시대, 개체적 율격(律格) 포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진보로 인식하며 적극 옹호하는 자들, 그러니까 세속주의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들로 한결같은 몰역사적 관점의 갑옷을 두르지 못해 안달이며, 지극히 피상적인 공부로 얻은 역사의 편린들을 표창처럼 (서로) 날려대기 바쁘다. 그런가 하면, 체험/상상 속 과거의 역사적 장면에 도리 없이 붙박여 있는 (이른바) 전통주의자들은 그만그만한 이유들로 갖가지 반시대적 표상들을 우산처럼 펼쳐 들고서, 오랜 세월 세뇌에 가까운 설교를 너무 경이(傾耳)한 탓에 지니게 된 ‘거룩한’ 확증 편향을 때론 참호처럼, 때론 폭탄처럼 변칙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왔다. 아니, 들이닥쳤다. 모든 전선과 노선이 일거에 헝클어졌고 , 모든 행선지가 돌연 사라졌다. 때맞춰 표창의 날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 확증 편향은 가일층 격렬해졌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갈 수도 , 돌이킬 수도 없다는 사실만이 점점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참화를 부르는 묵시적 상상력은 어찌어찌 제어되고 있는 듯하지만─그러나 기후 위기가 이 허술한 방어선을 심각하
게 위협하고 있다─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짙은 무기력과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든 개의치 않겠다는 굳센 방관주의가 생존 및 생활에 대한 크고 작은 망집과 맞물려 생활 세계Lebenswelt의 구석구석을 일종의 지뢰밭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미증유의 위험 구역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새삼 깨닫게 된 (진부한 그러나 뼈아픈) 교훈 한 가지는, ‘어떤’ 바이러스와는 도저히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숱한 바이러스가 별다른 문제 없이 우리와 공존했고 또 하고 있지만, ‘어떤’ 바이러스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그야말로 처참히 짓밟는다. 멀게는 페스트균이 그랬고 , 가깝게는 스페인 독감을 퍼뜨린 병균이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짓밟는다’는 표현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엄밀히 보자면, 짓밟는 행위의 주체가 바이러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오히려 바이러스의 창궐을 막아야 할 국가 체제─여기서 ‘국가’는 풀란차스와 밥 제솝Bob Jessop이 말한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이러스는 단지 이 주체의 행위를 유발하거나 견인할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이러스가 그러하듯 체제 역시 근본적으로 사역적(使役的)–시차적
(時差的) 활동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즉, 바이러스가 오직 숙주를 통해서 그리고 잠복의 형태로 위력을 발휘한다면, 국가 체제는 혹시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모든 (아니면, 적어도 가장 큰) 책임을 떠안을 잠재적 희생양을 언제나 미리 점찍어둔 상태에서 상황 대처에 나서는 것이다. 정말로 일이 잘못되어 어떤 참사가 발생할 경우, 그렇게 점지된 희생양이 가장 먼저 (그리고 사실상 끝까지) 직면하게 되는 사태는 (목)소리의 상실이다. 실제로 (목)소리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기서 상실이란, 그들의 (목)소리가 (거의) 완벽하게 묻혀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읽히지 않는 글이 근본적으로 글이 아니듯이.
이를 위해 국가 체제는 무수한 독립적 기율들이 내지르는 산만한 (그러나 지나치게 시끄러운) 함성을 십분 활용한다. 바꿔 말하자면, 효과적인 반발 통제와 안정적인 체제 유지를 위해 무정부주의적 기운을 조성하고 조장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잠잠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많은 소란스러운 일들로 인해 그 사건이 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예외 없이
먹히고 통한다. 왜냐하면, 지젝이 말했듯이, “‘좋은’ 표현의 자유와 ‘나쁜’ 소문을 구분할 쉬운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1 아니, 사실상 ‘어려운’ 구분법조차 있을 수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특히 이처럼 지독하게 ‘산문화’된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나쁜 소문이 이긴다. 왜냐하면 시간이 그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희생양은 시나브로 잊히고 사라지며, 그사이 체제는 다시 활동을 준비한다. 나쁜 소문의 매체와 확성기 들을 은밀히, 부절히 양성하면서 말이다. 요컨대, 치명적 바이러스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은 국가 체제의 작동 원리 그 자체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희생양에게만 해당되는 제한적인 서사일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체제의 수혜자와 방관자 들은 바이러스가 몰고 온 극심한 재앙 속에서조차 이윤과 차익의 기회를 포착한다. 쉬이 예상되는바, 그들은 그 기회를 전용 (專用)할 때 발생하는 각종 난관 및 그에 따른 고통에 대해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가장 큰 목소리로 , 더없이 절절하게 호소할 것이다 (실제로 그래왔다). 다름 아닌 (현실적– 잠재적) 희생자들을 향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호소는 틀림없이 순도 백 퍼센트의 정직함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번 호에 게재한 특집 글에서 문성욱이 적절히 언명했듯이, “상실은 제각기 뼈아프고 위기는 매번 새로워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기는 난망하다”.
하지만 바로 이 난망함이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된다.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확실한 것은, 그 양식이 때로는 시간의 질곡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버티는 것만이 무조건 능사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어떤 위기는 비극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 변화 과정에서 묻혔거나 묻힐지도 모를 모든 (목)소리를 쟁이고 감싸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다. 다시 말
해, 문학은 흩어진, 흩어지는 언어들을 붙들어 얽동이는 일이다.
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의 기획은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세계의 풍경들을 글로벌한 차원과 학제적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소묘하고 , 나아가 그 풍경들의 속살 및 거기에 생긴 (발견하기는 어려우나 실로 깊디깊은) 여러 상처를 진단해보는 작업들로 꾸몄다. 먼저 유럽이다. 앞서 언급한 불문학자 문성욱의 글은 중세 프랑스 문학의 사례를 통해 재난의 시대에 쓰고 읽는 행위가 그예 처하게 되는 역설과 난경을 섬세한 눈길로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잊힌 기원의 흔적인 텍스트가 바야흐로 기원적 기억이 된다”. 이 사태는 문학의 근본적 무기력과 존재 의의를 동시에 구성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 정치철학자 박이대승의 글은 이탈리아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 상태 개념을 비판적으로 호출하여 최근 프랑스에서 선포된 보건 긴급 상태의 정치적, 철학적 의의를 짚어보고 , 이를 응용하여 “한국에서는 헌법이 확고히 보호하는 권리가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통렬하고도 타당한 지적을 내놓는다. 프랑스 관련 세번째 필자인 번역가 배세진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대처를 “총체적 무능”이라 강하게 질타하면서, 바이러스로 인해 표면 위로 불거진 “인종주의라는 증상”에 대한 인문 –사회과학적 성찰의 시급성을 환기시킨다.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는 현재 히말라야에 체류 중인데, 감사하게도 우리의 갑작스러운 청탁에 응해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제한된 이동성”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에 맞서 ‘번역’이라는 소중하고도 근본적인 소통 형식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질문과 전언에 많은 독자가 눈과 귀를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그녀의 말이다. “구와 절의 순서와 같은 작은 요소가 우리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일지를 안내하고 , 이것으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 독일에 체류 중인 매체문화학자 강성운의 글은 동유럽 출신의 저임금 독일 노동자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만약 우리 각자가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라는 서사에 빠져든다면, 연대와 회복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소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다음은 미국이다. 과학사 연구자 이두갑은 “2020년 백신 개발 질주의 풍경”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 이어서 ‘면역–자본’ 및 ‘면역–여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슈를 역사적인 시각에서 차분히 고찰한 뒤, “전염병 이후의 사회”를 구축하는 방식은 면역을 얻지 못한 자들을 배제하거나 낙인찍는 방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당위를 강단 있게 역설한다. 보스턴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정치학자 이재욱의 글은 “코로나 사태가 제기하는 오래된
질문들” 가운데 특별히 “노동력의 이주와 재편”이라는 문제를 천착한다. “전염병의 전 지구적 확산은 이미 인종과 젠더를 교차해 구조화된 불평등을 가속화시킨다”는, 암울하지만 적실한 그의 진단은 팬데믹 상황에서 전 세계적인 “노동력의 월경”을 어떻게 재구조화할 것인가에 앞으로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진중한 주장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두 사람의 문제 제기는 향후 여러 학계에서 더욱 심도 있는 논의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로 시야를 돌려보자. 기자 출신의 사회학자 안은별은 자신이 체험한 일본 관광의 사례를 언뜻 가벼운 수기의 형식으로 술회한 뒤, 이로부터 “누구의, 어떤 목적의, 무엇을 통한 이동이 우선되어야 하는가”라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묵직한 질문을 이끌어낸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줄곧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곳에 갈 수 있고 가고 싶고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해온 상상력”이 대관절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회고적으
로 따져 묻는 것이 그의 관심사인 것으로 보인다. 의료인류학자 서보경의 글은 전쟁의 은유를 통해 “바이러스의 일생과 면역학적 세계”를 흥미롭게 묘파하는 데서 출발하여, 통계학적 “인구 집단을 넘어서는 함께–있음의 공동체”를 구상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에 대한 요청으로 진입한 다음, 마지막에 가서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명의 상호 관계와 의존을 그 중심에 두는 정치의 장”을 여는 것이라는 호소에 도달한다. 이 호소는 실로 간곡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이 위기를 살아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애초에 통제할 수 없는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군집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어로 번역, 출간된 김현경의 『사람, 장소 , 환대』에 대해 저자와 역자가 나눈 시의적이고 심층적인 대담에서는 이 시기 주요 사안 중 하나인 개인 정보 문제 등을 비롯하여 사람의 자격과 사회의 의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읽을 수 있다. 대담의 사회 역할을 맡아준 『한겨레』 이유진 기자께도 감사드린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들이 하이픈 기획을 결정하고 필진들을 섭외한 뒤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 이른바 ‘김봉곤 사건’이 발생했다. 작가의 (다소 뒤늦은) 사과와 젊은작가상 반납, 그리고 해당 작가의 책을 출간한 두 출판사의 전격적인 환불 조치 등으로 인해 상황은 일단락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무엇보다 ‘오토픽션autofiction’이라는 문제적 장르 자체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편집동인들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는 이번 호 〈메타비평〉 지면을 오토픽션 및 김봉곤 사건에 대한 성찰로 채우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 불문학자 변광배가 오토픽션의 역사와 관련된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글로 긴급한 청탁에 응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오토픽션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예방법은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할 지인들의 확실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올바른 시각이며,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름 아닌 김봉곤의 사례가 여실히 보여주는바, 동의의 ‘확실성’ 혹은 ‘완전성’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작가와 지인 들은 도저히 극복 불가능한 견해차를 노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예방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도 불안한 선택지인 것이다.
다음으로 , 평론가 이소연이 김봉곤 사건의 발단과 추이를 상세하게 되짚은 다음, 그것을 발생시킨 문단 시스템 및 비평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은 글을 보내주었다. 칭찬 지상주의에 매몰된 한국 비평의 자성을 촉구하며 우리 “시대에 상처를 입혀야만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경청에 값한다.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집필된 편집동인 강동호의 글은 “비평이 권력과의 싸움이고 , 문학이 대안 권력을 상징했던 빛나는 과거”는 이제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고 냉연히 단언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안주하지 않고 , 미래와 전망을 향한 환상적 욕망에 견인되지 않기 위해, 비평은 그것과 불화할 수 있는 시공간적 지평을 요구하는 중”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추문이 아닌 불화, 이것이 핵심이다. 아마도 비평은 불화의 담론 공간을 손수 축조해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19가 만든 아득한 거리를 뚫고 도착한 귀한 작품들이 본권을 장식하고 있다. 우선, 이영광, 이영주, 최하연, 임솔아, 강혜빈, 주민현, 김연덕, 조해주, 박지일의 시가 독자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런가 하면, 황지운, 최진영, 김초엽, 전예진의 소설은 ‘사회적 거리 두기’에 지친 모든 독자를 마스크가 필요 없는 이야기의 세계로 유혹 /초대한다. 그동안 성실하게 연재를 이어온 정지돈은 이번 호로 장편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간의 수고에 감
사한다. 정지돈의 바통을 구병모가 이어받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을 청한다. 지난 계절의 신간들에 대한 리뷰는 김보경, 김언, 이병국, 김형중, 오혜진, 윤경희, 조효원 평론가가 맡아주었다. 이번 호 〈지성〉 코너는 국문학자 손유경이 『문학과지성』의 역사 속에서 감지되는 콤플렉스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흥미로운 글로 채워주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시대와 시절의 ‘산만한 함성’에 저항하며 『문학과사회』를 펼쳐 든 모든 독자께 감사와 격려를 함께 보낸다. 바라건대, 『문학과사회』를 읽는 이들의 뚝심으로 인해 나쁜 소문의 득세가 조금이라도 주춤하기를, 나아가 좋은 자유의 표현들이 더 큰 (목)소리와 더 투명한 매체들을 만나게 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국가 체제의 작동 원리에 작게나마 파열음이 발생하기를.

편집동인 조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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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코로나 – 어펙트

이두갑
백신과 면역–자본의 시대
— 전염병 이후의 사회를 상상해본다

서보경
서둘러 떠나지 않는다면
—코로나19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돌봄의 생명정치

박이대승
예외상태의 정상화, 혹은 예외로서의 정상
—팬데믹 이후의 법과 국가

문성욱
근본 없이 쓰기
—프랑스 중세문학에 대한 노트들

강성운
코로나, 여름 구멍

데보라 스미스
휴한(休閑, Fallow)

배세진
인종주의라는 증상
— 전염병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안은별
즐거운 일본과 나

이재욱
코로나 사태가 제기하는 오래된 질문들
— 노동력의 이주와 재편에 관한 노트

좌담
김현경·가게모토 츠요시·이유진
“환대란 이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 『사람, 장소, 환대』에 던지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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