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마카닌 지음 | 안지영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8월 18일 | ISBN 9788932037592

사양 신국판 152x225mm · 660쪽 | 가격 21,000원

책소개

“이런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연민이 이 전쟁에서 남은
유일하게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러시아의 대표적 문학상 ‘볼샤야 크니가’상 수상작!
체첸전을 배경으로, 혼란스러운 현실의 파도에 몸을 실은 이들의 이야기

러시아 현대문학의 거장 블라디미르 마카닌의 『아산』이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0번으로 출간되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마카닌은 1965년 장편소설 『직선』으로 등단한 후 2017년 80해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소비에트와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을 아우르며 ‘두 세기, 아니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러시아의 두 시대의 척추를 연결하는 사실상 유일한 작가’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소비에트 시기부터 줄곧 단행본을 출간하며 공식 문단의 외부자로 살았던 그는 격변하는 시대에 민감하게 공명하는 작품으로 자신만의 확고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아산』은 러시아에서 2008년에 출간된 장편소설로, 러시아 현대사의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는 체첸전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으로 작가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볼샤야 크니가’상을 수상했고, 이로 인해 평생에 가장 ‘소란스러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일군의 체첸전 참전 작가들이 마카닌은 체첸전의 현실을 전혀 모르며, 그가 그려낸 것은 말도 안 되는 허구라고 맹렬하게 비난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이에 마카닌은 체첸전이 참전 작가들에게만 독점권이 있는 고유 영역이 아니며 참전했다고 해서 그 전쟁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작품에서 드러난 사실의 오류 또한 명백했다. 이렇듯 이 전쟁에 대해 말할 권리에 대한 싸움으로 시작된 논쟁은 결국 전쟁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장르론으로까지 이어졌고, 『아산』은 ‘전쟁에 관한 우화’ ‘인생에 대한 우화’로 평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카닌은 예술 작품에서 사실의 진위 여부가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전쟁문학은 전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기보다 그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역설했다.

『아산』은 체첸전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급격한 속도로 세워지던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현실의 파도에 몸을 실은 한 개인의 내면을 성실하고 치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마카닌은 우리 시대 비극의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전쟁의 실상은 소설 속 모습과 다를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혹독한 현실에서도 일말의 선량함과 나름의 도덕적 지향을 지닌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질린 소령의 모습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한 개인의 내면을 통해서 본, 또 다른 전쟁의 모습

전투병이 아니라 창고와 주택 건설을 위한 공병으로 파병된 질린은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떠난 상급자들로 인해 홀로 창고에 남겨진다. 체첸 반군들과 하루하루 싸우며 창고의 무기와 휘발류를 지키던 그는 체첸 반군의 수장 두다예프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한칼라 지역 일대의 휘발유 왕으로 거듭난다. 게릴라전으로 위험한 체첸의 길을 따라 러시아 부대와 러시아 측 체첸군 부대에 휘발유를 배송하고 그 대가로 배송한 휘발유의 10분의 1을 챙기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번 돈을 부지런히 아내에게 송금하여 러시아의 큰 강 주변에 이층집을 짓고 있다. 한밤중에 휘발유 창고들 사이에 자리한 작은 뜰에서 아내와 통화를 할 때 행복을 느끼는 평범한 가장인 동시에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 무의미한 전쟁의 문법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질린 소령은, 그 속에서 전쟁의 신 ‘아산’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산’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바자노프 장군의 말을 빌리면, 한때 체첸 지역을 휩쓸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항마로 산사람들이 만들어낸 피를 탐하는 전쟁의 신이다. 고대의 아산은 피를 원했지만, 현재의 아산은 돈을 원한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이치라는 이름을 발음상의 이유로 아산 세르게이치라 부르는 데서 온 호칭이기도 하지만, 휘발유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휘발유를 소유한 질린 소령을 체첸인들도, 러시아인들도 아산으로 인정한다.

전쟁 통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주인공 질린 소령을 움직이는 건 결국 멋모르고 전쟁터로 끌려나와 죽거나 체첸 반군의 포로가 되어 끔찍한 일을 겪는 수많은 러시아 ‘애송이’에 대한 연민이다. 그의 내면에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냉혹함과 관용, 두려움과 용기, 냉소와 연민, 선량함과 강퍅함, 부당함과 정의로움 등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작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을 걱정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고 싶어 하고, 또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애송이들 때문에 날린 돈을 아까워하면서도 동시에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갈 어린 청년들을 안타까워하는 질린 소령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마카닌은 등장인물들의 축재와 부정에 면죄부를 주지도, 그것을 고발하지도 않는다. 질린 소령이 지키려 애쓰는 최소한의 도덕적 선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전쟁의 신 아산조차 피보다 돈을 구하는 이 새로운 시대에 자신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작은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소박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꼼꼼히 그릴 뿐이다. 질린은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시기, 이미 애국심이나 일체의 대의명분이 사라지고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를 나름의 개인주의로 살아내는 인물이다. 그에게 이 전쟁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그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가 발견한 이 전쟁의 유일한 논리는 ‘승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전쟁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자기 부대를 잃고 떠돌이 병사가 된 올레크와 알리크를 구하고 그 과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어찌 보면 가장 평범한 소시민인 질린은 소비에트 전쟁문학에서 넘쳐나는 ‘거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개인의 양심을 끝까지 따라가고자 했던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 개인의 내면을 통해 경험하는 전쟁의 또 다른 모습은 매력적인 흡인력으로 독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 책 속으로

높이 자란 풀들이 신경을 건드린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소령 나부랭이야, 왜 이렇게 설쳐대니? 네놈이 뭐라고. 네놈이 뭐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알아?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위장복을 입은 똥 같은 놈아, 도대체 누구 일에 끼어드는 거냐? 네놈 집에 마누라와 딸이 있어. 매일매일 네놈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쟁은 전쟁이고, 네놈은 네놈이야. 기억해라…… 너는 그냥 복무하는 것뿐이야. 너는 그냥 캅카스에서 복무하는 거야.
등 뒤로 땀 한 방울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땀방울이 기어 내려온다…… 높이 자란 풀들!…… 너는 저 어린놈의 새끼들이 불쌍한 거다. 저 녀석들이 풀밭과 관목 사이에 널브러져 있게 될 것이 안타까운 거다!…… 너무너무 젊은 애들인데!…… 하지만 정직하게 봐라. 그놈들은 죽이러 온 놈들이다. 죽이고 죽으러 온 놈들이다…… 전쟁이니까. (35쪽)

나는 다리가 없는 한 어린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제 막 현관에서 길로 나섰다…… 텅 빈 바지 자락을 끌며 기어서. 곧장 내 아래로 기어왔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마을은 폭격하지 않습니까?”
중위는 짧게 답했다.
“불쌍하니까요.”
연민이 약한 감정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연민은 하찮은 감정이다. 그런데도 그놈은 갑자기 튀어나온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어쩌겠는가! 중위가 말한다. 저는요, 이런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연민이 이 전쟁에서 남은 유일하게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07쪽)

내전이 되어가면 전쟁은 응당 더 잔혹해진다. 이해 불가한 어떤 것이 되어간다…… 전쟁을 하지만 전투병은 아닌 나는, 단지 나를 위해서(내 내면에서 이 상황을 소화하기 위해서) 마침내 이 전쟁에 대한 어떤 설명을 찾아냈다. 아주 단순한 설명을. 전쟁은 그 자체로는 부조리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전쟁은 부조리하다, 승자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그러니 승자가 없는 동안은 질문을 던지지 말자. 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야?…… 누가 먼저 때렸는지 따지는 것은…… 아이들 말싸움이니까.
승자가 밝혀지고 나면, 곧(어쩌면 천천히) 이해할 만한 이유들과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사건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승자는 모든 것을, 그리고 모두를 자기(그러니까 타자가 아닌 자기들의) 자리에 세워놓을 것이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다른 논리는 있을 수 없다.(336~37쪽)

목차

■ 차례

아산

옮긴이 해설 · 아산―‘우리 시대의 영웅’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작가 소개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마카닌 지음

러시아 서부의 작은 도시 오르스크에서 건축기사였던 아버지와 러시아 문학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 이후 체르니콥스크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수학과 체스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60년, 모스크바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후 10여 년간 고등교육기관에서 수학을 가르치면서 극작 수업도 받았다. 1965년 장편소설 『직선』으로 등단했고, 1971년 극작으로 학위를 받은 후로는 출판사 ‘소비에트 작가Советский писатель’에서 일하며 ‘아름답지만 심장을 뛰게 하지는 못했던’ 자신의 전공 영역을 떠난다. 소비에트와 포스트소비에트 시절을 아우르며 독자층을 보유한 매우 드문 작가로 일컬어지는 그는 격변하는 시대에 민감하게 공명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캅카스의 사로잡힌 자』(1994)와 이미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언더그라운드, 혹은 우리 시대의 영웅』(1998),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발표된 『공포』(2006), 『아산』(2008), 『두 자매와 칸딘스키』(2011)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은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의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오던 블라디미르 마카닌은 2017년 11월 1일, 로스토프나도누 근교의 작은 마을 크라스니에서 타계했다.

안지영 옮김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러시아학술원 러시아문학연구소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사랑에 관하여』, 『동화의 나라, 한국』, 『코레야, 1903년 가을』(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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