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8월 11일 | ISBN 9788932037554

사양 변형판 127x192 · 260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오늘의 폭력은 해결하지 못한 어제의 반복이며
내일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찾을 것이다

불투명해서 더 정밀하고, 따뜻해서 더 아픈 박민정의 질문들

현대문학상 수상작 「모르그 디오라마」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세실, 주희」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 「바비의 분위기」 수록

박민정 소설은 시공을 초월하여 여성을 대상화한 폭력들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펼쳐 보인다. _송종원(문학평론가)

작가는 소설이 끝나고도 해소되지 않는 질문을 남겨두는데, 이는 소설이 끝나도 우리의 현실은 계속 이어진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리라. _황인찬(시인)

『아내들의 학교』 『미스 플라이트』 등으로 한국 사회 내 다양한 여성혐오 양상을 짚어냈던 페미니스트 작가 박민정이 신작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문학과지성사, 2020)를 출간했다. ‘작가는 자기 이야기를 최대한 신뢰할 수 있어야 하기에 많은 조사와 공부를 해야 된다’(『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겨울호 인터뷰)는 입장을 가진 소설가답게 박민정은 지적이고 생동감 있는 소설 세계를 펼쳐왔다. 이번 소설집을 통해 작가는 성폭력과 젠더 불평등의 역사적-지정학적 권력관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초반 세 작품은 비동의 불법 촬영물 유포를 둘러싼 여러 맥락을 완성도 높은 소설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N번방 사건’을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 문제에 분노하는 이 시대 독자들과 긴밀히 호흡할 것이라 기대된다. 이 단편들은 또한 현대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및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으로서 그간 큰 주목과 지지를 받은 바 있다. 나아가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은 단선적인 피해자-가해자의 선악 구도를 넘어서 인간관계 안에 작동하는 여러 힘의 작용을 포착해내 흥미로움을 더한다. 폭력의 역사와 지형도를 예리하게 짚어내는 서사를 통해 현실 문제와 치열하게 분투하는 박민정의 소설. 그의 신작 『바비의 분위기』를 읽는 일은 우리에게 시대를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그때 거기서 일어난 일이 지금 여기도 일어나고 있다

그 영상을 본 이후, 내 삶의 질은 다섯 단계쯤 낮아졌죠. 어린 시절 알 수 없는 공간에 감금되어 잠시 죽었다 살아 돌아왔는데도 괜찮았던 내가. 그런데 삶의 질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삶의 다섯 단계쯤 위는 뭐고, 여기서부터 다섯 단계쯤 아래는 무얼까? 내가 다시는 영상을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르그 디오라마」, p. 24)

구글 페이지에서 자료를 찾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종말 이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불법 촬영 따위가 인간의 존엄을 영영 파괴할 수는 없으리라고 믿지만(그러려고 하지만) 간혹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끝난 거 아닌가, 이만하면. (박민정, 현대문학상 수상 소감)

역사적 모티프와 현실의 문제를 병치하여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폭력이 오늘도 반복되고 있음’을 통렬하게 제시하는 박민정의 소설 작법은 이번 수록작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한 시체 공시소 모르그와 현재 온라인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비동의 불법 촬영물 유포 범죄를 연결하여 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피해자 다수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르그 디오라마」. 축제 기간에 여성이 추행되는 영상이 아카이빙되는 미국 뉴올리언즈의 ‘마르디 그라’와 예쁘다, 귀엽다는 식의 ‘얼평(얼굴 평가)’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일상이 겹쳐져 여성의 몸과 시선의 폭력을 상기하는 「세실, 주희」. “혹시 생기는 게 딸이면 떼버리라는 말도 거침없이” 하던 여아 낙태의 유구한 역사와 딸이라는 이유로 해외에 입양 보내진 강장희 강장선 자매 이야기로 여성혐오 문제를 풀어내는 「신세이다이 가옥」. 이렇듯 박민정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억압의 통시-공시적 연속성을 발견해 세밀하게 엮어냄으로써 끝없이 되풀이되는 폭력의 면면을 보여준다.


판단 중지의 순간 확장되는 사유의 넓이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그런 말을 세실에게는 결코 할 수 없었고 주희는 조금 참담해졌다. (「세실, 주희」, p. 73)

성별·민족적 혐오의 정동을 문제화하고, 더 나아가 그 속을 살아가는 세 여성 사이에 여성으로서의 동일성 못지않게 차이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는 난감한 문제까지를 사유하고 있는 이 소설의 깊이와 넓이는 놀랍다. (신형철, 젊은작가상 대상 심사평)

피해-가해, 선-악이 완벽하게 구분되지 않는 소설은 읽는 이에게 어려움과 난감함을 안기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민낯이기도 하다. 「세실, 주희」에서 미국 여행 중 몰카 피해를 당한 주희가 어렵게 영작해낸 ‘저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slut이 아닙니다’라는 호소와, 2차 대전 때 자결한 할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고 한국어로 작문하는 세실의 사이에 놓인 번역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차이. 「천국과 지옥은 사실이야」에서 필리핀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한국으로 피신한 레니와 코피노 셔리스의 관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면 단위 출신’ 유진의 고통과 허탈함. 이렇게 복잡한 맥락들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독자는 끝내 해소되지 않는 질문들로 인해 판단 중지의 순간을 맞게 된다. 이러한 ‘막막함’ ‘단언할 수 없음’이 결국 우리의 삶과 적극적으로 맞닿는 사유의 지점을 열어주어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계기가 마련된다는 점이 박민정 소설의 큰 매력이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오빠의 가장 큰 잘못을 유미는 기억했다. 그녀의 PC통신 아이디를 해킹해서 그녀의 사적 기록을 훔쳐보고, 졸업을 목전에 둔 그녀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을. 온통 수재들이라는 그 학교 학생들은 왜 고작 그런 소문 때문에 그녀를 비웃었다는 걸까. 부모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믿기지 않지? 그런 걸로 사람을 매장할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바비의 분위기」, p. 114)

휴머니즘적 이해 가능성을 차단하는 사례들은 인간이야말로, 등 뒤가 없는 로봇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박민정이 던지는 도발적인 물음은 그의 소설이 새로운 소설적 탐구 영역에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증명하고 있다. (강동호 문학평론가, 이 계절의 소설 심사평)

박민정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놓고 골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은 현실과 비인간적인 인간사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자리를 묻는 박민정의 예리한 질문들이 그의 소설을 이끈다. 2018년 『빅이슈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반反지성을 경계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린 ‘날카로운 작품’을 쓰고 싶다.”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고 용감한 목소리를 더해가는 박민정의 소설들은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한 2020년을 보내는 우리에게 경솔한 정답 대신 빛나는 고민들을 안겨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본문에서

오빠는 소리 내지 않으려 애쓰며 서럽게 울었다. 오빠가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했던 햄스터는 어느새 큰아빠가 치워버리고 없었다. 발인하던 날 오빠는 유미에게 ‘내 햄스터는 어디로 갔을까?’ 물었다. 유미는 바비큐가 되어버린 햄스터를 상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햄스터를 볼 때마다 큰아빠가 ‘저것들 키워봤자 어디 먹을 것도 없고’란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바비의 분위기」)

자기보다 어린 예리와 예은이 식모 대하듯 하는데도 담대하게 견뎠던 수진은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후암동 집에서 버티며 살았다. 고모를 지키면서. 나는 채 1년이 못 되는 시간도 버티기 어려웠던 후암동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대기업 소속 변호사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해도 그녀가 가엾어진다. 어떤 종류의 기억은 사람을 영영 망가뜨릴 수밖에 없기에. (「신세이다이 가옥」)

고모와 나는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 30분 후면 지웅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고, 나는 고모에게 물었다. 거기 로펌 어린이집이면 다양하게 섞여 있겠네. 사무장, 조사관, 변호사…… 고모는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욱여넣으며 대답했다. 그 어린이집에 변호사 애들은 하나도 없대. (「숙모들」)

스페인어과는 30명이에요. 영어과, 독어과, 불어과보다 못한 과예요. 전교생이 그걸 알죠. 체육대회 때 보시면 놀랄걸요. 늘 구석에 있는 스탠드에 배정받아요. 과 대항 경기를 할 때 큰 소리로 응원하지도 않아요. 자부심 같은 건 없으니까. 꼭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은데 막차라도 타야겠다 싶은 아이들이 스페인어과에 지원해요. 다들 문 닫고 들어온 주제에 특기자를 무시하죠. 우리 모두 3년 동안 한 반이에요. 아시겠어요? 피할 길이 없어요. 특기자는 두 명뿐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어요. (「천사의 비밀」)

그러니까 나는 한국 영화나 소설에서 그려지는 아버지상이 꽤나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해. 물론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이지. 하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공통 감각을 반영하지 않을 수는 없지. 내가 확언하건대 한국 여자 대부분은 자기 아버지를 증오하거나, 경멸하거나, 무시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어. 어때, 그렇지 않니? 레니가 그 말을 할 때도 나는 셔리스와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한국 남자들은 몹쓸 종자들이야, 말 그대로.
레니는 힘주어 말했다. 셔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국과 지옥은 사실이야」)


■ 추천의 말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며 소설이 그리는 현실들이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고, 여기와 저기가 교차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당신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과 혐오의 역사를 재차 확인하게 될 것이다. 박민정의 소설은 가장 먼 곳에서 누구보다 첨예하게 현실과 대결한다. 그는 이 대결을 손쉽게 마무리하는 대신, 소설이 끝나고도 해소되지 않는 질문을 남겨두는데, 이는 소설이 끝나도 우리의 현실은 계속 이어진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리라. 당신은 이 책을 덮으며 그가 남긴 질문을 두고 오래도록 고민하게 될 것이다._ 황인찬(시인)

박민정 소설의 진지함은 지성의 소산이다. 작가는 ‘마음’이 아닌 ‘앎’에 대해서 쓴다. 아마도 작가는 사회적 관계의 생산물로서의 삶이 마음을 닦는 대상이 아니라 논쟁의 대상이고 합리와 불합리는 따져 묻는 비판의 상대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박민정은 우리 삶이 구성되는 어떤 조건들이 자연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역사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_ 송종원(문학평론가)

목차

■ 차례

모르그 디오라마
세실, 주희
바비의 분위기
신세이다이 가옥
숙모들
천사의 비밀
천국과 지옥은 사실이야

해설 괴물과 사실, 그리고 앎의 장치로서의 소설・송종원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작가 소개

박민정 지음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아내들의 학교』, 장편소설 『미스 플라이트』 『서독 이모』가 있다.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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