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열 시 반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 김석희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7월 31일 | ISBN 9788932037578

사양 변형판 120x188 · 184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삶에 대한 권태와 기다림 또는 부재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사랑과 죽음의 둔주곡

우리에게 『연인』으로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여름밤 열 시 반』(김석희 옮김)이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새롭게 리뉴얼되어 출간되었다.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특유의 여성적 글쓰기로 인물과 사건, 감정과 심리의 흐름을 극도로 섬세하고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하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마르그리트 뒤라스.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해온 주제인 ‘삶에 대한 권태’와 ‘기다림 또는 부재감不在感’을 냉정한 응시로서 그려내는 매혹적인 글쓰기는 이번 작품 『여름밤 열 시 반』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여름밤 열 시 반』은 소설로는 뒤라스의 여덟 번째 작품으로, 실제로 일어난 범죄 사건을 토대로 하여 주인공이 상상력을 작동시켜가는 방식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모데라토 칸타빌레』와 맥을 같이한다. 두 작품 모두 밖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법을 침범하는 에너지가 여주인공의 잠재의식에 이식되어 그녀들이 서 있는 삶의 지반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안 데바레드’가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죽음으로 완성되는 절대적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한 여인의 내적 갈등의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면, 『여름밤 열 시 반』의 ‘마리아’는 폭풍우로 잠시 머물게 된 한 마을에서 어린 아내와 내연남을 살해하고 지붕 위에 숨어 있던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구출해냄으로써, 그 성공 여하에 관계없이, 남편 ‘피에르’와의 파국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한다.

『여름밤 열 시 반』은 한 부부와 그들의 딸 그리고 부인의 친구, 이렇게 네 사람이 여름휴가 동안 스페인을 여행하다가 폭풍우를 피해 들른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날 오후 마을에서는 어린 아내와 내연남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범인은 아직 잡히기 전이다. 한여름 스페인의 작은 마을,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여행객들로 붐비는 그곳에서는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흥밋거리로 떠돌 뿐이다. “사건은 치정 문제이고, 그 자리에서 끝나는 성질의 것이”기에 “문 안쪽에서는, 여름 이야기, 여름의 폭풍우 이야기, 로드리고 파에스트라의 범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품에서 중점을 두는 것도 충격적이어야 할 살인 사건이 아닌, 주인공 마리아의 심리적 이행에 대한 추적이다. “비 오는 거리도 여름이다. 안뜰도, 욕실도, 주방도 여름이다. 어디나 모두 여름이다. 그들의 사랑을 위한 여름이다.” 그러나 한여름의 그 사랑은 마리아가 아닌, 남편 피에르와 친구 클레르의 것이다. 여름밤을 가르는 번개는 욕망으로 들끓는 그들의 모습을 계속 비추어주고, 그들은 서로 껴안은 채 가만히 서 있다. 또한 번개가 칠 때마다 그들 정면으로 보이는 지붕 위에서 수의와도 같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굴뚝에 달라붙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새벽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의 모습이 동시에 밝게 비쳐 드러난다. 마리아는 이 폭풍우 속의 살인자,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구출해내어 프랑스로 데려가기로 결심한다. 작품은 시종일관 마리아의 시선을 따라 사실과 상상이 뒤섞인 채로, 그녀의 내적 관찰에 의한 묘사로 진행된다. 그 심리적 전개는 다만 스케치 형식으로 어떤 공허한 윤곽만을 묘사할 뿐이며, 그 공허한 침묵은 독자들에게 한없는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마리아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구출해내 마을 근처의 밀밭에 숨기지만 그는 자살한 채로 발견되고, 마리아 일행도 처음 계획했던 여행지 ‘마드리드’에 도착한다. 이제 마리아에게 한여름을 넘긴 태양은 ‘쇠퇴’를 의미할 뿐이다. “올리브 나무들이 그림자에 살며시 다가오는 이 권태, 갑자기 더위가 누그러지고 석양으로 옮아가는 시간의 흐름, 도처에서 황급히 달려와 중천에 걸린 태양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것을 알리는 여러 가지 조짐들”은 모두 마리아에게 결부된 것들이다.

“피에르, 이젠 끝났어.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겁을 내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부터?”
“방금 깨달았어.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랬는지도 몰라.”

우리의 사랑은 이미 끝났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방금 깨달았을 뿐, 오래전부터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듯 『여름밤 열 시 반』은 불가능한 사랑에 헛되이 집착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 욕구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삶에 대한 냉정한 응시로서 그려낸다. 이는 오랫동안 뒤라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해온 주제이며, 줄거리를 서술하는 형식의 배제, 새로운 대화 양식의 모색 등 소설 기법에 대한 쇄신 또한 작품에서 되풀이된다. 반면 이 작품에서는 『작은 공원』이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 비해 대화가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주인공 마리아의 상상이 본문 속에 많이 삽입되어 있어서 삼인칭으로 서술되어 있기는 해도 넓은 의미에서의 일인칭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외적‧내적 요소를 불문하고 모든 것이 마리아의 시선으로 받아들여지고, 느닷없이 ‘과연 그럴까?’ 하는 식의 말이 삽입되어 앞서 나온 장면이 마리아의 내적 관찰에 의해 묘사되고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기도 한다.

한편,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과 시나리오, 영화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뒤라스는 이 작품에서도 영화적 요소를 도입시켜 성공하고 있다. 풍경과 움직임을 좇는 마리아의 시선이 마치 카메라의 눈처럼 움직인다는 점, 폭풍우 쏟아지는 한밤의 번개가 일으킨 명암의 대비, 황금빛 밀밭에 내리쬐는 남국의 태양 등 시각적 특징이 그러하고, 현재형 서술은 장면들이 눈앞(스크린)에서 펼쳐지고 있는 듯한 현장감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1966년 줄스 다신과 메르쿠리 부부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영화화되었다.


■ 책 속으로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그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의 흐른다.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마리아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 눈을 내리깔고, 그들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겨질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위해 마련된 이 여름밤, 마을이 온통 가득 차 있는 것이다. (43쪽)

저게 로드리고 파에스트라일까? 그럴 수도 있다. 저게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에 속한다. 그녀가 마리아인 이상, 그가 그녀, 특히 오늘 밤 마리아와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에 속한다. 그 증거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절박하다. 마리아는 저게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라고 굳게 믿고 있다. 저게 그라는 사실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남자, 폭풍우 속의 살인자, 그 고통의 기념비로부터 11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여자를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 (61쪽)

그는 싫증도 내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멍한, 이제까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무관심한 시선이다. 마리아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존재를 발견한 뒤의 놀라움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걸까? 이제부터는 더 이상 마리아에게, 아니 마리아에게든 다른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걸까? 밤이 숨겨주었던 명확한 새로운 사실이 새벽과 함께 폭로되어버린 걸 깨달은 걸까? (98쪽)

창문 너머의 풍경에는 엄격함이 누그러져 있다. 그는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태양은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올리브 나무들의 그림자가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어느새 길어지기 시작했다. 더위가 약간 누그러진 느낌이다. 마리아는 어디에 있을까? 마리아는 죽을 만큼 마셔버린 것은 아닐까? 술과 죽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욕망이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덩달아 흉내 내게 만들어, 그녀를 밀밭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장난기 섞인 기분으로 데려갔던 것은 아닐까? 또 한 여자, 마리아는 어디에 있을까? (158쪽)

마리아는 밀밭에서 죽어버린 게 아닐까? 자신을 비웃다가 굳어버린 미소를 얼굴에 띤 채 누워 있는 것은 아닐까? 밀밭 속에서 혼자 흥겹게 웃는 마리아. 이 풍경은 그녀의 풍경이다. 올리브 나무들이 그림자에 살며시 다가오는 이 권태, 갑자기 더위가 누그러지고 석양으로 옮아가는 시간의 흐름, 도처에서 황급히 달려와 중천에 걸린 태양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것을 알리는 여러 가지 조짐들―이 모두가 마리아에게 결부된 것들뿐이다. (159쪽)

“당신은 내 삶이야.” 그가 말한다. “한 여자의 단순한 새로움 같은 걸로 내 마음은 채워지지 않아.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우리 이야기는 끝났어.” 마리아가 말한다. “피에르, 이젠 끝났어.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야.”
“아무 말 하지 마.”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피에르, 이젠 끝났어.”
피에르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서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겁을 내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부터?”
“방금 깨달았어.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랬는지도 몰라.” (170쪽)

목차

■ 차례

여름밤 열 시 반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

작가 소개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1914~1996)
1914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코친차이나에서 태어나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열여덟 살에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 법학,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1943년 ‘뒤라스’라는 필명으로 소설 『철면피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인도차이나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은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를 비롯해 『부영사』 『갠지스 강의 여인』 등 수많은 작품들로 변주되었다. 특히 1984년 공쿠르 상을 수상한 『연인』은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수백만 부가 팔렸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알랭 레네 감독의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로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한 뒤라스는 감독을 맡은 「인디아 송」이 1975년 칸 영화제 예술・비평 부문에서 수상하면서 유럽 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었고, 이 당시의 경험을 담은 소설 『고통』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뒤라스는 『모데라토 칸타빌레』 『작은 공원』 등 50여 년에 걸쳐 70편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하며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인생 편력을 거쳐 온 뒤라스는 1995년 『이게 다예요』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1996년 영면하였다.

김석희 옮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중퇴했으며,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다. 영어‧불어‧일어를 넘나들면서 리처드 휴스의 『자메이카의 열풍』과 존 미드 포크너의 『문플릿의 보물』, 허먼 멜빌의 『모비 딕』, 헨리 데이비스 소로의 『월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쥘 베른 걸작선집(20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등 많은 책을 번역했다. 제1회 한국번역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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