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역사

악마의 잔치, 혹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의 여행에 관하여

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 김정하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7월 6일 | ISBN 9788932037493

사양 변형판 152x223 · 565쪽 | 가격 33,000원

책소개

마녀, 주술사, 샤먼, 늑대인간… 유럽 민속신앙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부터
인류 보편의 문화적 기원을 추적하는 거시적 차원의 통찰까지
역사학의 거장 카를로 긴즈부르그 연구 작업의 결정판!

추천사

이 책은 보기 드문 솔직함, 명료함, 우아함, 박식함을 토대로 지나친 선정주의와 무미건조한 학문적 진술 사이에서, 그리고 국지적인 역사기록학과 보편주의 사이에서 방향을 잡아 나아간다. 이는 거대하고, 대담하고, 훌륭한 책이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긴즈부르그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엄청나다. 2천 년의 유라시아 민속 문화로 들어가는 그의 여정은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옵저버』

『밤의 역사』는 학문적 비타협성과 박식함이 결합된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학자들만을 위해 쓰인 것은 아니다. 각종 일화와 사건을 짜 넣은 풍성한 태피스트리, 공포의 방, 기이한 골동품 가게, 중세 우화가 이 책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가디언』

어떠한 기준으로 봐도 『밤의 역사』는 탁월한 책이다. 역사학 분야에서, 문화적 박식함과 텍스트 및 시각 자료에 대한 깊은 이해, 높은 이론적 목표를 결합해 이토록 빼어나게 문학적으로 기술해낸 사례를, 긴즈부르그 외에는 떠올릴 수 없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

긴즈부르그는 역사적인 것과 공포스러운 것을 섞어 일반 독자와 학자 모두를 사로잡는다. 그는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 우리를 전율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종의 주술사나 다름없다.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도서관>

미시사 연구 방법의 개척자로 꼽히는 역사학계의 거장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밤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긴즈부르그의 걸출한 연구들은 많은 논의를 이끌어내며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 선구적 업적을 남겼고 국내 역사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긴즈부르그의 관심사는 지배층 문화와 병존했던 민중 문화의 존재를 밝히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는데,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치즈와 구더기』 『밤의 역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도는 긴즈부르그의 연구 작업을 대표하는 작품들로서 흔히 민중 문화 연구 삼부작으로 일컬어진다. 이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책 『밤의 역사』는, 긴즈부르그 스스로 “앞선 두 연구를 종합하는 의미에서 펴낸 책”이라고 평했듯, 긴즈부르그 평생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대작이라 하겠다. 『밤의 역사』는 중세 이후 ‘악마의 잔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추적하고 16~17세기 민중의 일상과 정신세계에 구체적 형상을 입혀 드러낸 뒤 거시적 차원으로 시야를 확장해 시간과 공간, 신화와 우화, 사료를 넘나드는 방대한 비교 작업을 통해 오랜 세월 지속된 유라시아 공통의 문화적 기원을 찾아 나선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세밀하고 해석적인 긴즈부르그 특유의 논지 전개 방식을 접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마녀와 베난단티, 늑대인간, 오이디푸스 신화, 신데렐라 등의 주제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게 서술되어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포인트 1. 전염병, 기근 같은 재앙이 닥치면 타자를 희생양 삼는 음모론이 제기된다.

코로나19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2020년 3월 중국인, 나아가 동양인에 대한 인종 혐오가 격화되어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코로나19가 처음 보고된 우한 지역의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이 바이러스가 유출된 것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이 음모론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위시한 여러 사람들의 동조로 큰 파급력을 띠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놀랍게도 『밤의 역사』의 출발점인 14세기 나병환자들에 대한 음모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다.
1321년 나병환자들이 “기독교 세계의 건강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나병환자들(그리고 이를 사주했다고 의심받은 유대인들)이 화형을 당하거나 격리되는 일이 벌어졌다. 1347년에는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가자 공포에 질린 민중들의 유혈 폭력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병과 죽음을 퍼뜨리기 위해 물, 음식, 집, 교회에 독약 가루를 뿌린 원흉으로 거지들과 빈자들이, 얼마 후에는 유대인이 지목되면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후 15세기에는 사악한 주술을 사용하며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남녀 주술사에 대한 종교계의 보고가 이어졌고, 십자가 모독, 식인 행위, 동물로의 변신, 난교 파티, 주술 비행 등으로 특징되는 ‘악마의 잔치sabbath’ 이미지가 정착되면서 그 유명한 마녀사냥의 포문을 열게 된다.
수백 년 전의 사건을 주제로 삼아, 반세기 전에 집필된 이 책 『밤의 역사』는 코로나 시대를 통과 중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며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14세기 초반에 유대인과 나병환자에 대한 음모가 성공을 거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 원인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위기가 촉발한 불안감뿐만 아니라, 소외된 집단들에 대해 점차 커져가는 적대감, 속죄양에 대한 광적인 탐색 등에 있었다.” 미지의 세계, 해명 불가한 사태가 불러일으킨 공포는 약자나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적대감을 증폭시키기 십상이다.
긴즈부르그는 “악이 무엇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던 유럽에서 어떤 사람이 ‘마녀’인지 누가 결정했을까?”를 묻는다. 나병환자를 상대로 한 음모는 이후 정신병자, 빈자, 범죄자, 유대인을 거쳐 마녀와 주술사에게 차례차례 투사되었다. 권력층에 의해 조작된 서신들과 고문을 가해 강제로 받아낸 자백, 연대기 기록 등을 들여다보면, 시대에 따라 표적은 바뀌되 혐의 내용은 그대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긴즈부르그는 프랑스에서 알프스 서부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들의 각종 연대기와 문헌들, 이단 재판 기록물들을 토대로 적대적 집단의 이미지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분석한다. 저자는 “왜 이 시기인가?” “왜 이 지역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당대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 내재된 깊고 포괄적인 문화적 층위를 발굴해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포인트 2. 다양한 지역에서 놀랍도록 유사한 민속적 요소가 속속 발견된다: 밤의 여신, 비대칭 보행, 탈혼 상태의 전투, 동물 뼈 수집을 통한 부활 등…

긴즈부르그는 지역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방대한 곳에서 유사한 민간신앙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가장 먼저 저자가 천착한 주제는 이교도들의 여신 디아나에 대한 숭배의식이다. 이미 10세기에 악마 추종자들이 따르는 ‘디아나’라는 여신의 존재가 교회 문헌에 등장했는데, 이와 같은 ‘신비의 여신’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디아나, 에로디아데, 홀다, 리켈라, 오리엔테 등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나 그 묘사된 특성은 매우 흡사했다. “영혼이 동물의 형태로 또는 동물의 잔등이에 올라타거나 다른 주술 도구를 이용해, 죽은 자들의 세계로 비행한다는 것.” 이처럼 유사한 상징적 형태들이 수 세기에 걸쳐서, 매우 이질적인 공간과 문화를 배경으로 거듭 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긴즈부르그는 10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나온 악마론 연구서, 로맨스 소설, 설교집, 교회 법규집, 재판 기록물 등의 텍스트 연구를 시작으로 각종 예술 작품과 고대의 신화 및 우화, 구전 문학 등을 조사하고 프로프, 레비-스트로스, 그림, 메울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물을 참조하면서 문화적 연관성을 찾아내고 그 기원을 밝히고자 시도한다.
긴즈부르그는 연대기적으로나 지리적, 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곳들에서 출현한 유사한 현상들이 형태론적으로는 단순하지만 그간 해독하기 어렵다고 여겨졌던 민속적 요인들의 상징적 맥락을 밝혀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 예로, 손상되지 않은 동물 뼈를 수습하여 부활시킨다는 발상은 악마의 잔치로 수렴되는 유럽 민간신앙뿐 아니라 라플란드 지역의 샤먼, 시베리아의 유카기르족, 일본 북쪽 섬에 살던 아이누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는 여러 문화권의 다양한 층위에 중앙아시아 유목민들로부터 기원하는 고대의 요인들이 잔존하고 있으며 이는 또한 북극 지방의 수렵 문화와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긴즈부르그는 매우 폭넓은 비교 작업을 수행해나간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흡혈귀, 헝가리의 탈토시, 달마티아 지역의 크레스니키, 프리울리의 베난단티, 리보니아의 늑대인간, 오세트족의 부르쿠드자우타 등, 다양한 신화적 존재들로부터 유사한 민간신앙의 특징들을 밝혀낸다. 또한 오이디푸스의 구멍 뚫린 발에서 리보니아 늑대인간 무리를 이끄는 절름발이 소년, 불에 타버린 아킬레우스의 뒤꿈치, 신데렐라의 작은 구두 등을 하나로 묶는 맥락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한 파편적인 증거들을 기반으로 한 연구를 통해 긴즈부르그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무엇보다 오래도록 지속된 인류 공통의 문화적 기층 혹은 접촉의 존재를 입증해낸다.


“인간의 역사는 이념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달이 보이는 이 세계, 즉 사람들이 태어나고 고통을 받거나 견디다 결국은 죽어가는 세계에서 전개된다.” _카를로 긴즈부르그

이 책은 서론과 세 개의 부와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마녀 집단 혹은 악마의 잔치 이미지가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연대기적 순서와 지리적 정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다. 제2부에서는 신화와 의식의 심오한 층위와 이로부터 악마의 잔치에 활력을 불어넣은 민간신앙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기술한다. 제3부에서는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는 신화와 의식, 우화, 민간신앙 등 여러 증거를 통해 그 확산 과정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결론에서는 지배층 문화와 민속 문화 간의 타협을 통해 악마의 잔치라는 확고한 전형이 성립되었음을 밝힌다. 긴즈부르그는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는 민중문화의 연속성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떠한 상징과 형태를 통해 잔존하고 전파되었는지 탐색한다.
악마의 잔치에 대한 민간 풍속의 층위를 밝히기 위한 이 책의 모든 여정은 한 지점으로 수렴된다. 바로 죽은 자들의 세계로의 여행. 죽음에 대한 인간들의 보편적 관심은 사후 세계로의 여행이라는 믿음을 낳았고 이는 수천 년 동안 인간 사회에 많은 양분을 제공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공통 주제는 사후 세계로 가는 것과 사후 세계에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서사의 핵심은 수천 년 동안 인류와 함께 존재했다. 사냥, 목축, 농업에 의존하는 수없이 다양한 사회들에 무수히 변화하며 소개되었지만 이야기의 근본적인 구조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럼 이러한 근본적인 구조는 왜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었을까?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분석하고자 했던 것은 여러 이야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이야기들의 모체였다.”
이 책 『밤의 역사』는 기존의 역사학 도식에서 벗어나 있는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으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동시에, 대중적인 눈높이도 잃지 않고 있다. 이제 긴즈부르그의 민중 문화 삼부작을 완결짓는 이 책의 출간으로 긴즈부르그의 학문적 여정의 큰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책 속으로

문서로 기록된 증언에서 ‘베난단티’로 자처한 남자들과 여자들은, 자신들이 “양막에 싸인 채” 출생했기 때문에 매년 네 차례, 그것도 야밤에 회향풀 다발을 들고 수수 다발로 무장한 마녀와 주술사에 대항한 영적인 전투에 참여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야간 전투는 농사의 풍요를 위한 것이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피고인들의 증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듣고 있는 이야기들을 악마의 잔치라는 구도에 끼워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난단티들이 망설임 끝에 생각을 바꿔 결국 재판관들이 요구하는 틀에 맞추어 자백하기로 결정한 것은 반세기가 더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서론, 27~28쪽)

독초 주머니에서 거짓 자백과 출처 불명의 서신에 이르기까지 심증이 가는 음모의 증거들을 규정하고 간청하고 만들어내려 한 자들은 나병환자들과 유대인들이 유죄라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 공권력(프랑스 왕, 교황 등)이 자신들로부터 박해받은 자들을 어느 정도로 무고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의 개입은 결정적이었다. 이 사태의 전모를 모든 사회계층을 압도한 집단사고의 암울한 격변으로 묘사하는 것은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행동들이 획일적으로 드러난 것의 이면에서는 어떨 때는 한곳으로 집중되고 어떨 때는 분열되는, 강도가 다양한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제1부 1장 「나병환자, 유대인, 무슬림」, 99쪽)

악마의 추종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더 이상 성체를 숭배하지 않아야 하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은밀하게 십자가를 짓밟을 것을 맹세해야만 했다. 불과 얼마 전에 이단 심문관인 페터 폰 그라이에르츠는 열세 명의 어린아이를 먹어치운 마녀와 주술사 몇몇을 재판하여 화형에 처한 바 있었다. […] 주술의식을 통해 살해된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매장된 무덤에서 꺼내졌고, 마녀들은 살과 뼈가 자연스럽게 발라질 때까지 그 시신을 커다란 솥에 담아 끓였다. (제1부 2장 「유대인, 이단자, 마녀」, 130~31쪽)

박해로 희생된 자들에 대한 심정적인 유대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적인 관점에서 이단 심문관과 주교 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목적은 다르지만, 우리의 질문은 대부분 이들이 제기한 것과 일치한다. 이들과 달리 우리는 피고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직접적으로 물을 수 없다. 우리는 문서를 생산한다기보다는 그 문서를 자료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수 세기 전에 사망한 민속지학자들이 현장을 조사하며 기록한 노트들을 근거로 연구하는 것뿐이다. (제2부 1장 「여신의 뒤를 따라」, 176쪽)

라플란드 지역의 주민들은, 망치나 지팡이로 무장한 번개의 신을 숭배했다. 이 신과 게르만의 신 토르의 유사성은 그 이름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스칸디나비아 사람들과의 접촉에 의한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호라갈레스, 토르, 오세르의 성인 제르마노, 오리엔테 모두가 유라시아의 먼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신화의 다양한 버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유라시아에는 이와 관련된 의식이 존재했지만, 켈트와 게르만 사회에는 없었다는 점이 이러한 기원설을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죽임을 당한 동물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수렵 문화에서 태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제2부 2장 「비정상」, 245~46쪽)

오세트족은 크리스마스와 1월 1일 사이에 몇몇 사람들이 잠든 육신을 벗어나 영혼의 상태로 죽은 자들의 땅에 갔다고 증언했다. […] 거대한 초원에 도착하면 경험이 없는 영혼들은 꽃과 과실의 향기에 도취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부주의하게도 기침을 야기하는 붉은 장미, 감기를 유발하는 흰 장미, 고열을 일으키는 붉은 사과 등을 집어 들었다. 반면 경험이 풍부한 영혼들은 풍요로운 수확을 약속하는 밀과 지상의 다른 과일 씨앗을 거두었다. 한편 이들은 노획물을 가지고 도망가는 동안 활을 쏘아 잡으려는 죽은 자들의 추격을 받았다. […] 죽은 자들의 세계로부터 땅에서 재배되는 과실들의 씨앗을 가져온 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질병을 가져온 자들은 고열이나 기침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았다. (제2부 3장 「탈혼 상태의 전투」, 292~93쪽)

날짜가 기록되었거나 작성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부족하여 민간신앙과 샤머니즘 관행을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어려움을 우회하는 길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동물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들이나 스텝 지역의 예술 작품들이 그것이다. […] 중국 초나라 시대의 호부(또는 부적), 몽골 내륙의 의식용 지팡이,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에서 유래한 금팔찌, 이란 지역의 장식용 핀, 트라키아-게티족의 은 항아리, 켈트 지역의 장식판, 랑고바르드족과 비지고트족의 브로치는 스타일과 도상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당황스러운 가족적 유사성을 보인다. (제3부 1장 「유라시아 가설들」, 380쪽)

우리는 헤르메스나 디오니소스 같은 신, 또는 이아손이나 페르세우스 같은 영웅을 특징짓는 신체적 비대칭을 통해, 좀더 극단적인 이동이라는 상징, 즉 죽은 자들의 세계와의 영속적 또는 일시적 연결을 확인했다. 이러한 연결은 늑대인간과 칼리칸차로이가 들판과 마을을 배회하는 12일 동안에 벌어지는 밤의 장례식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유사한 신화와 의식이 그리스와 중국 같은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들을 배경으로 그처럼 지속적으로 재등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제3부 2장 「뼈와 가죽」, 426쪽)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사회에 불완전하게 적응한 자들에 의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고 일컬어진다. 이러한 원리는 코카서스의 조지아인들이 거행하던 도기라는 장례의식에서 완벽하게 드러난다. 즉, 이 장례의식에서 여성과 죽은 자는 모두 내부인인 동시에 외부인이고, 가문의 구성원인 동시에 이방인인 만큼 암묵적으로 동화되었다. 한편 마녀와 주술사 들의 역사적 선조에 해당하는 인물들도 음모론과 샤머니즘적 중재자의 측면에서 볼 때, 소외와 불완전한 동화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딱따기, 색칠된 바퀴, 양막, 그리고 여분의 치아는 나병환자, 유대인, 이단자들, 베난단티, 탈토시 등에게 낙인이 되었고, 이렇게 해서 이들은 경우에 따라 사회적 공존과 배척의 경계, 믿음과 불신의 경계, 그리고 산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의 경계에 위치하는 존재들로 여겨지고 있었다. (「결론」, 521쪽)

목차

■ 차례

감사의 말
서론

제1부
1장 나병환자, 유대인, 무슬림
2장 유대인, 이단자, 마녀

제2부
1장 여신의 뒤를 따라
2장 비정상
3장 탈혼 상태의 전투
4장 동물 가면 쓰기

제3부
1장 유라시아 가설들
2장 뼈와 가죽

결론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작가 소개

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193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소설가인 어머니와 역사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1년 피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레체 대학, 볼로냐 대학,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피사 고등사범학교 등에서 가르쳤다.
긴즈부르그는 동시대 가장 저명한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서 미시사 연구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의 관심 영역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현대 유럽사를 아우르며, 하나의 개인, 사건, 장소에 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당대의 사상, 정신세계, 문화적 양상에 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긴즈부르그의 주요 저서는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역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재판 기록을 토대로 당대 민중 문화를 복원해냄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치즈와 구더기』를 비롯해 16~17세기 일련의 이단 심문 기록을 통해 당대 민간신앙의 변모 과정을 분석하고 지배계층에 종속되지 않은 민중 문화의 존재를 보여준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역사 이야기 속의 진실과 거짓, 허구를 추적하며 역사 작업에 관한 성찰을 보여주는 『실과 흔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밤의 역사』는 14세기 나병환자,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서 시작해 유럽 전 지역에 퍼져 있던 민간신앙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 민속적 기원을 인류 보편의 문화적 층위로 확대해나가는 긴즈부르그 평생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 대작이다. 그 밖에도 『신화, 상징, 실마리』 『재판관과 역사가』 『어떤 섬도 섬이 아니다』 등 여러 책이 있다. 아비 바르부르크 상(1992), 몬델로 상(1998), 살렌토 상(2002), 훔볼트 연구상(2007), 발잔 상(2010) 등 우수한 학문적 성과를 낸 학자에게 수여하는 많은 상을 받았다.

김정하 옮김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시에나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중세문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정보․기록관리학과 대학원 겸임교수를 거쳐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기록물관리학 개론』 『남유럽의 전통기록물 관리』 『지중해 다문화 문명』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공역) 『실과 흔적』을 비롯해 『중세 허영의 역사』 『서양 고문서학 개론』 『책공장 베네치아』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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