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와 고요

기준영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0년 7월 6일 | ISBN 9788932037523

사양 변형판 125x192 · 294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이에요.
여기서 떠날 때랑 거기서 떠나올 때 다른 사람이 됐어요”

삶을 넘어뜨리는 불가해한 운명
상실 이후에 감지되는 아름다운 징조들

세련된 문체와 신비로운 전개 방식으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온 기준영의 세번째 소설집 『사치와 고요』(문학과지성사, 2020)가 출간되었다. 기준영은 2009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문학동네 젊은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 등을 수상하며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각 두 권씩 펴냈다. 아홉 편의 작품을 묶은 『사치와 고요』는 두번째 소설집 『이상한 정열』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단편집으로 2017년 황순원문학상‧2018년 현대문학상 후보작이었던 「마켓」과 2020년 현대문학상 후보작이었던 「완전한 하루」 등이 수록되었다.
“의외의 순간들에서 야릇하고도 다정한 징조들을 발견해내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낯설지만 생생하게 감각”(문학평론가 전기화)해온 기준영은 이번 소설집에서 불가해한 운명에 맞서다가 뜻밖의 희망을 발견하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얻은 것뿐 아니라 잃은 걸 통해서도 사람들은 뭘 배우고자 하면”(「마켓」) 배운다는 말처럼 삶을 한순간에 황폐화시키는 불운 속에서도 비밀스러운 긍정의 조짐들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치와 고요』를 읽는 일은 아릿한 상실감 속에만 발현되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작가의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로 살펴보는 과정이 될 것이다. 또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야기”(「유미」)를 예견하며 조심스럽게 생의 의지를 회복해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것이 내 곁을 떠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섭고 두려워”

기준영의 소설 속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삶의 일부를 영영 잃어버린다. 상실 이후의 시간을 감내하며 그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상처의 명암을 어루만진다. 「마켓」은 ‘시연’이 담당 의사로부터 자연유산을 진단받으며 시작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따스한 햇빛을 머금은 풍경들을 건너다보다가 돌연 남편 ‘지섭’과의 이혼을 결심한다.

“그동안의 2년보다 한집에서 같이 보낸 지난 석 달이 난 더 좋고 의미 있었어. 이젠 혼자이고 싶어.”
지섭은 그 대목에서 돌아누웠다. 시연은 지섭의 등을 향해 얼굴을 가리고 누운 채로 제가 한 말과 지섭의 반응을 차례차례 다시 반추해보다가 얼마 후 그가 코를 고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기도 천천히 돌아누웠다. (p. 18)

「완전한 하루」는 파혼을 겪은 ‘주현’이 내면의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상사의 소개로 ‘민규’를 만나게 되고, 그가 한때 자신의 형수였던 이와 해외로 도피한 적 있으며 그 사랑의 실패로 지금 제 앞에 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기어이 와이오밍으로 되돌아가 6개월을 더 살았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첫날인 듯이. 서로에게 너무나 충실하게 열려 있었기에 여한이 없었고, 그래서 서울로 아주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게 연인으로서의 마지막이란 걸, 이별이란 걸 알았다. 받아들였다. (p. 156)

이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에 부딪쳐 삶의 소중한 부분들을 유실하고 만다. 그렇지만 내면의 뒤틀림을 견디며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새로운 가능성들과 마주한다. 그렇다면 기준영에게 상실이란 피할 수 없는 위기인 동시에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이 아닐까. “낮에 넘어졌던 자리가 어떤 문장을 쓰게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상실의 빈자리에서만 새롭게 씌어지는 이야기가 곧 기준영의 소설인 것이다.


“괜찮아, 지금이. 어제보단 오늘이”

「축복」은 ‘동수’가 아버지의 애인 ‘양 여사’ 댁에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은 동수가 양 여사의 남동생인 ‘준모’와 우연히 나누는 대화에서 그가 거의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강렬하게 느끼는 순간에 있다. 그 마음은 동수가 준모로부터 얼결에 받아온 양털 점퍼를 아내 ‘해선’에게 전하는 마지막 단락에서 빛을 발한다.

어스름한 풍경을 휘젓고 온 바람이 유리창에 매달려 낮게 웅, 소리를 내고는 멀어졌다. 해선이 커다란 양을 쓰다듬듯이 제 몸을 쓸어내리고는 덧붙였다.
“생각보다 잘 맞고, 보기보다 따뜻한걸.” (p. 192)

이렇듯 기준영은 삶의 예측불가능한 전개가 우리를 절망시키기도 하지만 의외의 지점에서 “생각보다 잘 맞고, 보기보다 따뜻한” 감촉으로 변해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낙담하기 쉬운 순간에도 어떻게든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가 지속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부드럽게 설득해낸다. 그러므로 『사치와 고요』는 좌절의 국면이 곧 일상의 경계를 흔들고 넓혀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다양한 서사 형태로 보여준다. 얼핏 드러나는 회생의 징조들을 세밀하고 깊이 있는 문장으로 그려내어 우리로 하여금 낯선 시간 속으로 나아갈 힘을 북돋워준다.


■ 책 속으로

시연은 그 순간 사랑한다는 말만큼 온당한 말이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건 진실일까. 그 진실은 어떤 색, 어떤 모양, 어떤 질감일까.
―「마켓」

모든 이가 온전히 ‘진짜’들로 이뤄진 세계에 무언가를 비밀스럽게 묻어두고 다른 날들로 걸어 나간다는 것에 대해.
―「사치와 고요」

언니, 나한테 더는 미안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다 좀 이상해지고 있어. 날 아무 데나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도 좀 별로예요. 무슨 책, 어떤 사람, 그런 게 다 뭐야. 우리 그러지 말아요.
―「비둘기와 백합과 태양에게」

나는 어제 무너지는 집에서 애쓰는 사람이었어. 너의 오늘은 어때? 우리는 모두 어제를 지우고 너를 기다려. 내일로 가는 너를.
―「완전한 하루」


■ 추천글

기준영의 소설은 인물을 둘러싼 기미들을 부드럽게 흔들면서 굳어버린 세계의 협소함을 수정한다. 스스로를 회복해내겠다는 인물의 결단이 인용되지 않더라도, 인물 자신과 인물을 둘러싼 세계의 기미가 바뀌어간다는 것을 소설을 읽는 우리는 감각할 수 있다._전기화(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

때로 낮에 넘어졌던 자리가 어떤 문장을 쓰게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었음을 밤이 되기 전에 알아차립니다. 무엇을 발아래 두고 무엇을 나무 위로 날려 보내야 할지가 완전히 뒤바뀌기도 합니다.

아홉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믿는다는 것, 아름다움에 관한 소망이 이야기 밑에서 변주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뭔가 불안하기도 한 그 느낌은 인물들의 맥박이기도 합니다. 생명, 뛰는 것. 그러니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좋은 점을 잃지 않으려는 분들께 이 소설이 가닿기를 바랍니다. 땀과 눈물, 그리고 사치와 고요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생각과 뜻, 상상을 나누었던 분들께 고맙습니다. 작품 속에 간간이 음악을 명시해두었어요. 단편 하나를 막 읽고 난 후, “그래, 이 곡을 들으며 뭘 좀 먹어야겠네” 하는 미지의 누군가를 떠올려봅니다.

P.S. 사람들이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2020년 여름
사랑하고 질문하는 마음을 담아
기준영

목차

■ 차례

마켓
여기 없는 모든 것
사치와 고요
비둘기와 백합과 태양에게
완전한 하루
축복
들소
망아지 제이슨
유미

해설 | 예측할 수 없이 낯설고, 아름답게_전기화
작가의 말

작가 소개

기준영 지음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 「제니」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연애소설』 『이상한 정열』, 장편소설 『와일드 펀치』 『우리가 통과한 밤』이 있다. 제5회 창비장편소설상, 제5회‧제7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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