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명에서

한국문학전집 46

백신애 지음 | 서영인 책임편집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12월 19일 | ISBN 978893203599

사양 · 416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백신애의 중단편선 『혼명에서』가 작가 사후 8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해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마흔여섯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문학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주요 작품 16편이 망라되어 있다.
192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백신애는 1939년 불과 3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소설 20여 편, 수필 등 30여 편을 남겼다. 생전에 작품집이 출판되지 않은 데다 작품이 다소 거칠고 과격하다는 평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한국 여성 작가들을 살피는 연구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백신애 문학의 다양한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이후 백신애는 강경애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한국문학계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백신애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 경북 영천에서는 ‘백신애 기념 사업회’가 조직되었고, 2008년에는 ‘백신애 문학상’이 제정되어 공선옥(1회), 서하진(2회), 강영숙(4회) 등의 작가가 수상하기도 했다.
백신애는 문학적 업적만큼이나 삶의 궤적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작가다. 그는 1908년 경북 영천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는 딸의 교육과 활동에 보수적인 입장을 고집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고, 한글로 된 글을 읽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동네 친구들까지 만나지 못하게 하는 등 많은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백신애는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살지 않았다. 친일 활동을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독립 자금을 댄 혐의로 옥살이를 했던 오빠 백기호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단신으로 상경해 사회주의 여성단체에서 활약했고, 시베리아에 갔다가 러시아 비밀경찰 게페우에 체포되어 한 달간 감금된 끝에 추방당하기도 했으며,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고학하며 배우를 꿈꾸기도 했다. 결국 집안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1932년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으나 1939년 이혼하고 곧이어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삶의 궤적이 그의 문학 세계에 녹아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백신애가 남긴 문학적 업적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초기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는 ‘빈궁’이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꺼래이」는 살길을 찾아 시베리아로 떠난 조선 민중의 고난을 다룬 작품이다. 농사지을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소문만 믿고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이 ‘꺼래이’라고 불리며 온갖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추방당하는 모습이 처절하게 그려진다. 그 밖에도 한 끼 먹을거리도 없는 궁핍한 집안에서 무능한 노름꾼인 아들을 대신해 출산을 앞둔 며느리 뒷바라지를 하는 ‘매촌댁’의 이야기를 그린 「적빈」, 남편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며 출산하는 날까지도 기아를 면하기 위해 남의 집 일을 해야 하는 ‘옥계댁’의 이야기를 그린 「호도」 등의 작품에서 개인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난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형상화된다.
이후 그의 관점은 가난의 문제에서 다양한 현실의 문제로 확장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법체계가 지닌 허점과 가부장제 사회의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인간관계를 폭로하는 「어느 전원의 풍경」, 허위의식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고학력 룸펜의 문제를 고발하는 「학사」 등이 확장된 관점을 반영한 주요 작품이다. 백신애 문학의 백미는 후기작인 두 편의 중편 「혼명에서」와 「아름다운 노을」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여성주의 소설’로 분류되는 이 중편들을 통해 백신애는 가부장제의 억압 구조와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혼명에서」는 결혼제도에서 이탈한 여성의 소외와 이혼 여성에 대한 가족의 전근대적 억압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 사후에 발표된 유작 「아름다운 노을」은 장성한 아들을 둔 30대 여성과 아들뻘인 10대 소년 사이의 사랑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갇힌 여성의 욕망이라는 주제를 섬세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백신애의 문학 세계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약하자면 극심한 가난과 봉건적 인습의 굴레에 갇힌 여성들의 비극, 또는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사망한 지 어언 8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살아낸 짧지만 강렬했던 삶과 지녔던 치열한 문제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자유로운 삶을 향한 욕망과 그것을 제약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란 많은 작가가 씨름해온 보편적인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백신애 문학은 이 갈등을 초월하기보다는 그 갈등 사이에 오래 머물렀고, 현실의 완강함과 제도의 견고함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실체를 반복해서 그려내고 오래도록 주시했다. 봉건적 가부장제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희생당하면서도 자기를 발설할 언어를 갖지 못했고 그래서 기묘한 침묵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었던 백신애 문학의 특별한 주체들은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 백신애의 소설을 통해 ‘봉건적 가족제도와 여성의 욕망’이라는 해묵은 주제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백신애의 문학은 일탈도 비약도 아닌 방식으로 그 주제를 계속 갱신하고 있다.
―서영인, 작품 해설 「제도의 구속 안에 머물며 다른 세상을 꿈꾸다: 여성 작가로서의 백신애」에서


■ 본문에서

“꺼래이, 꺼래이……”
하는 가장 귀 익은 단어가 화살같이 두 귀에 꽂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꺼래이’라는 것은 고려라는 말이니 즉 조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꺼래이’라는 그 귀 익고 그리운 소리가 그때의 순이들에게는 끝없는 분노를 자아내는 말 같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웃음거리가 되어 있는 것이로구나. 치움에 못 이겨, 또 아무 죄도 없이 죽음의 길인지 삶의 길인지도 모르고 무슨 까닭에 꾸벅꾸벅 그들의 명령대로만 따르겠느냐.”
라고 순이는 부르짖었습니다.
_「꺼래이」 부분

기운이 진하여 간심을 주지 못하는 벙어리를 앞에 놓고 늙은이 가슴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생각다 못하여 얼른 밖으로 나와 물 한 바가지를 솥에 붓고 장 찌꺼기를 조금 부어 김이 나게 끓여서 한 그릇 들고 들어왔다.
벙어리는 팔을 휘저으며 두 눈이 발칵 뒤집혀져서 그 물을 벌떡벌떡 마시고 난 후
“아버바…… 어버버……”
하고 곤두박질을 쳤다. 늙은이는 재치 있게 벙어리 배를 누르며 연방 들여다보며 하는 사이에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으아.”
하며 새빨간 고깃덩어리가 방바닥에 내뿌리듯 떨어졌다.
_「적빈」 부분

그는 정환이가 가르쳐주던 계교가 다시금 생각났다.
“될 수 있는 대로 며느리를 귀히 여기는 척하여 그동안 상했던 사이를 회복시킨 후 이혼만 하면 아들이 돌아온다고 하니, 이혼장에 도장만 찍어 동경으로 보내면 아들이 돌아올 테니 돌아오면 시부모가 잘 회유하여 서로 의가 상합하도록 할 테니 염려 말고 도장만 찍어라. 그리고 너의 친정 부모도 알면 재미없으니 네가 가만히 도장을 찍어가지고 오너라.”
고만 자꾸 꾀던 정환의 얼굴이 떠오르며 몸에 소름이 끼쳤다.
_「어느 전원의 풍경」 부분

그때의 나의 괴로움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나의 이혼이었습니다.
이혼! 이것은 과연 중대한 문제이지요. 그러나 나는 이혼이란 그것이 중대한 문제인 까닭에 괴로워한 것은 아니랍니다. 이것은 제삼자의 눈에는 중대한 문제로 보였을지 모르나 나로서는 급작스런, 무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가장 자연스런 해결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던진 돌멩이는 반드시 그 높이에서 떨어져 땅에 닿을 때까지의 얼마간의 시각만이 문제이지 반드시 도로 땅 위에 떨어짐에는 틀림없는 자연법칙입니다.
나의 결혼은 하늘을 향하여 돌멩이를 던진 것과 같은 결혼이었어요.
_「혼명에서」 부분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요사이 며칠간 나의 모든 정열을 뒤끓게 한 그 원인이 되는 소년에 대한 생각을 무시하려고 시집이요 나의 아들이 있는 집을 향해 갔습니다. 그 집 대문 앞에 이르자 집 안에서 내 아들 석주가 무엇이라 크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또다시 두 발이 땅에 딱 들어붙는 듯하며
‘네가 어미냐! 네 아들이 지금 열여섯 살이나 되었다.’
라고 외치는 듯하여 나는 깜짝 놀란 듯 휙 돌아서서 달아나듯 골목쟁이를 뛰어나오고 말았어요.
_「아름다운 노을」 부분

목차

일러두기

나의 어머니
꺼래이
복선이
채색교
적빈
낙오
악부자
정현수
학사
호도
어느 전원의 풍경
광인수기
소독부
일여인
혼명에서
아름다운 노을

작품 해설―제도의 구속 안에 머물며 다른 세상을 꿈꾸다 / 서영인
작가 연보
작품 목록
참고 문헌
기획의 말

작가 소개

백신애 지음

백신애는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집과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영천공립보통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하고, 경북사범학교 강습과를 나와 2년 동안 교사로 지냈다. 1926년 교사 시절, 북풍파인 ‘경성여자청년동맹’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여성운동을 한 것이 탄로 나 권고사직을 당하고 서울로 올라가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필명 박계화(朴啓華)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신춘문예 첫 여성 작가라는 기록을 세웠다. 결혼 후 경산군 반야월의 과수원에 기거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 체험한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이 「복선이」(1934), 「채색교(彩色橋)」(1934), 「악부자(顎富者)」(1935), 「식인(食因)」(1936) 등의 바탕이 되었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는 실향민들을 그린 「꺼래이」(1934)와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음에도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심정을 담아낸 「광인수기」(1938)를 포함해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소설 20여 편과 수필 및 기행문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39년 6월 23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영인 책임편집

문학평론가, 근대문학연구자. 현재 국립한국문학관에서 일하고 있다. 평론집으로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을 읽는 슬픔』 『문학의 불안』을, 연구서로 『식민주의와 타자성의 위치』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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