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이홍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10월 24일 | ISBN 9788932035796

사양 변형판 125x192 · 208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가 이홍, 10년 만의 소설집

욕망의 기호로 빚어진 희대의 악인
그를 키워낸 악의 토양을 탐색하다

“그것은 사람의 눈이다.
아무리 삼켜도 채워지지 않을 굶주린 새하얀 눈자위,
영원히 감기지 못할 두 눈, 바로 자신의 눈.”

상류 사회를 흥미롭게 드러내며 치밀한 기획과 연출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능동적으로 실현하는 인물들을 제시해온 소설가 이홍의 연작소설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7년 장편 『걸프렌즈』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뒤, 2009년의 『성탄 피크닉』 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자 첫 소설집이다. 2007년부터 2019년 사이 발표한 소설 네 편이 희대의 악인 ‘오미나’를 축으로 다듬어 묶였다.
이 시대의 악인은 어떤 모습일까. 오미나는 외적으로 완벽한 여성이다. 그러나 가족을 잃으며 비극적이라 할 만한 삶을 살아왔다. 한 여성의 30년 인생이 압축돼 있는 연작소설집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악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탁월한 참고 문헌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는 마흔 살 오미나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스토커」로 시작되어 처음 악인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아홉 살 때의 에피소드인 「메인스타디움」으로 마무리된다. 오미나의 기묘한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며 따라 읽다 보면, 이 인물에 매혹되었다가 그를 연민했다가 결국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독자 자신의 욕망과 죄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첫 문장이 열리는 순간부터 하나의 단서라도 놓쳤을까 봐 숨죽이며 읽어 내려간다. 이내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에 내 이마를 훔치며 집중했고, 그 순간들이 지나자 약간은 서글픈 마음이 차올랐다.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둡고 섬뜩한 민낯이 드러날 때마다 문득문득 나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박지윤(방송인)

이홍은 평생을 범죄 곁에 머물렀던 한 여성을 단지,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 오미나라는 인물이 가진 요령부득의 매력이다. 오미나를 진정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굴종을 요구하는 현실이다. 오미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 역시 자신이 갖고 싶은 것 앞에 놓인 장애물들이며 그것을 만끽하는 순간의 지연이다. 그런 점에서 오미나는 한국 문학사상 거의 본 적이 없는 매우 독창적인 악인이다. – 강유정(문학평론가)


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키는 연민의 대상, ‘오미나’

마흔 살 오미나는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의 표상이다. 아나운서 출신으로 자기 이름을 건 토크쇼를 포함해 방송 여러 편의 MC이며 베스트셀러 에세이스트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묘사될 정도의 미인인 그는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고 마세라티를 몬다. 매주 10킬로미터씩 달리고 러닝을 마치면 인근 스파에서 타이 마사지를 받으며 꾸준히 피부과를 다닌다. 옷차림도 말투도 동작도, 우아하고 세련되기 그지없다. 「스토커」에서는 오미나가 누리고 있는 여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손에 쥔 외적 가치들을 정성 들여 나열한다. 살아오며 겪은 주변 인물들의 비극은 오히려 오미나를 좀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십대에 어머니가 죽었고, 남편은 결혼 4년 차에 교통사고로 즉사했으며, 아들은 실종되었다. 이 연작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강유정의 말처럼 비극으로 인해 오미나는 “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키는 연민의 대상”이 되며, 비극을 후광으로 삼아 오미나의 현재는 실제 이상으로 빛난다.

난 모든 걸 잃었지만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어. 그래서 더 아름다워지기로 했어. 더, 더, 강해지기로 했어. 더, 더, 더, 외로워지기로 했어. 내게 허락되었던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내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을 잊기 위해. 그것만이 이 생에서의 나를 견디게 해줄 테니까.
(「스토커」, pp. 55~56)


“기억하기 싫은 일은 기억할 수 없는 일이 되어야만 한다”

「스토커」에서 오미나는 스토킹의 피해자로 등장한다. 누군가 고급 차에 래커 칠을 하고, 협박 편지를 보내고, 목 잘린 반려묘를 선물한다. 스토커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약혼자의 부도덕성과 비서의 비밀이 드러나지만 여러 암시로 인해 진짜 범죄자는 오미나일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의심이 고개를 든다. “그의 손으로 저지른 끔찍한 사건이, 그의 약혼녀가 감내해왔던 불행의 연속을 멈추었다” 같은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 목적 달성을 위해 직접 손을 더럽히기보다는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누군가를 도구로 삼아 조종하는 것, 그것이 오미나의 방식이다.
암시가 확신이 되는 것은 그다음 이어지는 「50번 도로의 룸미러」에서다. 신분/계층적 재생산 구조로서의 결혼과 출산, 육아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는 이 작품 속 삼십대의 오미나는 부유한 집 자제인 남편과 사별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아들을 키우며 산다. 오미나는 아나운서였던 이십대에 꿈꿨으나 소유하지 못했던 것들을 결혼을 통해 갖게 되지만, 결혼의 성과를 문서로 획득하기 위해 아이가 클 때까지 절대 일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해야 한다. 유일하게 우회적 방식을 택하지 않고 직접 범죄를 저질렀다고 추측할 수 있는 이 소설에는 미스터리한 인물인 오미나의 심리적 근간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아나운서로 계속 일하고 싶은 욕망과, 상승한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이의 엄마이자 며느리로서 제대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오미나의 내적 갈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작가가 건조한 문체로 소설 곳곳에 뿌려둔 암시들은 내적 갈등마저 오미나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공감을 얻기 위해 조성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타인의 욕망이 키워낸 미즈 리플리Ms. Ripley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하는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읽다 보면 의문을 품게 된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오미나는 왜 악행을 저지르는가. 무엇이 그를 악인으로 만든 것인가. 공포는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때 통제 가능해진다. “프로파일링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통제 가능한 이해의 범주 안에 넣고자 하는 사회안전망의 기획이다. 트라우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고, 개연성 있는 범죄의 원인이다”(강유정). 「드레스 코드」는 오미나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힌트가 되어준다. 이십대의 오미나는 남자친구에게 어머니가 자신을 감금하고 학대했다고 거짓말한다. 어머니의 오랜 애인에게 접근해 유혹하기도 한다.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어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딸이 어릴 적부터 써온 일기장을 오미나의 어머니와 함께 훔쳐보면서, 독자는 아름다운 어머니와의 비교가 오미나를 초라하게 만들었으며 다른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 위해 어머니가 어린 오미나를 방기했음을 알게 된다. 오미나의 트라우마는 어머니에게서 시작되고, 오미나는 어머니와 최대한 비슷해짐으로써 어머니를 파괴한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너무 손쉬운 해법이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모든 방해물을 오랜 시간 공들여 치워버리는 방식은 오미나가 아홉 살이던 때부터 유효했음을 마지막 소설 「메인스타디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미나는 어릴 적부터 세속적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개조’해왔다. 타고난 악인 오미나가 과연 사이코패스인지는 독자에 따라 달리 판단할 문제이지만, 오미나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만 어디에도 없는, 일종의 상징이다. 특출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욕망. 우러러봐줄 누군가의 눈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타인의 기호로 쌓아 올린 오미나라는 존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욕망을 응집한 시대의 적자일 것이다. ‘욕망’의 작가 이홍이 귀환했다.


본문에서

남들 보기와 다르게, 그녀의 삶에는 난관이 많았었다. 이십대의 이른 나이에 어머니가 죽었고, 결혼 4년 차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즉사했으며, 사별의 아픔을 다 이겨내기도 전에 여섯 살이었던 아들이 실종됐었다. 납치설도 제기되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는 딸 또래의 여자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그녀의 일상을 점철하는 그 깊은 침묵은, 가혹한 삶의 비극을 견디는 방식 중 하나일 거라고 건너짚곤 하였다. 이렇듯 가련한 그녀에게 더 이상의 불행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 (「스토커」, p. 43)

예물로 남아프리카에서부터 공수해온 5캐럿 다이아 반지를 받았을 때나, 굵은 한강 줄기부터 북한산까지 내다보이는 78평 초고층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나, 풀 옵션이 돼 있는 BMW535와 은빛 카이엔을 동시에 받았을 때도 그때와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단 한 가지라도 자신의 취향과 의사가 반영되었다면 조금 더 흡족했을까. 여자는 그때마다 몸속 내장의 일부가 조금 잘려 나간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아리아리한 통증에 부딪혔다.
여자는 그 감정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알고자 골몰해본 적도 없었다. 무언가 알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전에 여자의 품에 안긴 모든 것에 매료되었다. 그것들은 정확한 이미지가 있었다. (「50번 도로의 룸미러」, p. 96)

엄마는 아름다웠지만 벌거벗은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드레스를 입은 후의 자신을 사랑했다. 아침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엄마가 옷장의 손잡이를 잡을 때면 그 권태로운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곤 했다. 부신 아침 햇살 속에 늘 늘씬한 몸매를 고수했던 엄마의 실루엣이 선연했다. 엄마의 벗은 몸에서는 늘 은은한 모과 향기가 풍겼다. 옷장 문짝들이 분만실에 누워 있는 가랑이들처럼 차례로 힘껏 벌어졌다. 엄마는 단 한 번 옷장 속을 찬찬히 훑어보고는 산부인과 의사처럼 옷장 속에 손을 밀어 넣었다. 엄마의 손에는 바느질이 고르고 선이 잘빠진 감 좋은 옷이 물려 나왔다. 옷을 입은 엄마의 몸짓을 보며, 엄마가 어떤 브랜드를 좋아하는지 터득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건 우아함을 피력하는 샤넬 투피스와 관능미를 강조하는 현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아, 이제야 완벽해! 비로소 빙긋이 미소 지으며 무대 위 주연 발레리나처럼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꼿꼿하게 세우고 허리를 활처럼 펼쳤다. 창문 앞, 전신 거울 속에는 그런, 엄마가 있었다. 아름다움을 그토록 중요시 하는 엄마에게 내 존재는 어쩌다 충동적으로 딸려 온 싸구려 옷에 지나지 않았다. (「드레스 코드」, pp. 121~22)

벗어나고 싶었다. 하나 가시처럼 날카로운 플래시와 핏빛 트랙을 지나지 않고선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뻥 뚫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부슬비가 아이의 이마와 눈가와 뺨을 적셨다. 눈두덩과 뺨에 칠한 불긋한 가루가 빗물에 얼룩져 뭉개지고 흘러내렸다.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트랙 빛깔은 점점 더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까치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트랙 위의 하얀색 선이 파란색 치맛단 쪽으로 달려들었다. 치맛단은 끌리지 않았으나 걷는 내내 아이의 종아리와 발등이 후들후들 떨리고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그대로 하얀색 선을 이탈하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인스타디움」, pp. 183~84)

목차

스토커
50번 도로의 룸미러
드레스 코드
메인스타디움
해설 생존 지능이 진화할 때(강유정)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이홍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장편소설 『걸프렌즈』 『성탄 피크닉』이 있다. 2007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고,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차세대 예술가(AYAF)로 선정되었다. 현재 차기작의 배경인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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