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0년 12월 23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30

성윤석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7월 10일 | ISBN 9788932035536

사양 변형판 128x205 · 164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갑자기 그게 그렇게 슬프더라”
‘부끄러움’과 ‘슬픔’을 품은 ‘검은 개인’의 저녁

1990년에 데뷔해 올해로 등단 29해째를 맞은 시인 성윤석이 새 시집 『2170년 12월 23일』을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30번으로 출간했다. ‘극장’(『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문학과지성사, 1996)과 ‘묘지’(『공중 묘지』, 민음사, 2007) 그리고 ‘바다’(『멍게』, 문학과지성사, 2014)를 시적 무대로 삼아 위안 없는 비틀림 삶, 소외된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 절망의 체험을 특유의 리듬으로 전했던 시인은 눈물과 슬픔으로 얼룩진 ‘밤’의 세상을 지나(『밤의 화학식』, 중앙북스, 2016), 결국엔 시인이 사라지고 없을 미래를 상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극장을 드나들던 소년에서 묘지 관리인, 남쪽의 한 바닷가 도시의 ‘잡부’까지, 시인의 생활을 시 곳에 녹여내었던 그는 전작 『밤의 화학식』에서부터 삶의 비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5부로 나뉘어 총 67편의 시가 실린 『2170년 12월 23일』은 어둠(흑)과 밝음(백)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고 번지는 것이라는, 생의 비밀을 탐색하는 시집이다.


검은 미래로 간 시인

‘시인의 말’에서 “불화와 불우 그리고 불후가 진눈깨비처럼 내리는 거리를 홀로 쏘다니며 인간의 삶을 다시 하청받겠다”고 밝히고 있거니와, 시인에게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곳은 ‘不’로 이어지는 단절된 공간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곳에서의 “인간의 동작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항상 어딘가에 도착해 있고/어딘가로 다시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두운 생을 “구불텅거리며/가던 길을 다시 가”면서 생각한다. “보증서와 함께/오래전에 묻어두면 예쁘게 있다 사라질/거라고 팔아먹은 내 슬픔이 정말 그랬는지는/나도 잘 모른다”고(「인간의 동작」). 과거의 삶, 그 슬픔을 담은 시집 속 이야기는 예쁘게 사라졌을까. 여전히 생의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시인은 그것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미래로 건너가, 자신이 없는 그곳의 모습을 보고 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시 「2170년 12월 23일」은 “거기에 나는 없었다”는 구절을 반복하며 미래의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전날로 간다. 춥지만 따듯함을 나누는 연말이자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있지만 아무 날도 아닌 미래의 어느 날은 “흐린 겨울” 속 “검은” 것들(“검은 구름” “검은 마스크”)이 난무하는 “비틀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시인의 섬세한 시선은 그 검은 세상에도 아직 남아 있는 흰 이미지를 놓치지 않는다. “공중에서 눈이 내렸다 검은 구름에서 흰 눈은 여전했다”는 “세상 최후의 고독을 살”아가는 신인류에게 남은 어떤 가능성으로 읽히기도 한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아요”라는 “도시의 재해대책본부에서 쏘아올린 저녁의 문장이” “마치 돛대 같”아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을 과연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색을 버린 세상에서 번져가는 흑과 백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도시의 천장들
기적을 믿지 않도록 설계된
이 도시를 보라
그곳에 강이 설치되어 있다
슬리퍼 수건 물티슈 양말
이것들을 흑백으로 사 들고
암 병동 꼭대기로 올라가는
저이에겐 지금 색이 없다
나는 지금 그간의 우리 동네에서 색이 없는
내 동네로 가고 있다
이곳에선 아무도 울부짖지 않는다
이곳에선 이제 정상도 없다
정상이 그저 그런 것일 뿐인 것을
알아차려버렸다 이 진술도 진부해
우리가 우는 곳은 우리가 슬픔을 설치해놓은
곳이다
적당히 울지 마라 나는 자꾸 이 말을 듣는다
한번 울면 다 울어라
이 말까지 들었다
사실 흑과 백은 번진 것이지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흑은 멈추지 않는 색이다
어느 순간에도 착해지지 않기로 한다
그것이야말로
흑과 백이니까
―「흑백 화면」 부분

흑(어둠)과 백(밝음)은 꼭 부정적인 이미지와 긍정적인 이미지로 이분화될 수밖에 없다고 이 시집은 말하고 있다. “고독도/오래되면 중독된다”고 말하는 시인은 “거짓 위로들로 가득한 부산함들에 앗기지 않으려” “색을 버리고 덜어내고/긁어”내어서 “시를 흑백으로 쓴다”. 시인에게 이 도시는 “기적을 믿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도 울부짖지 않”고 “슬픔을 설치해놓은/곳”에 가서 울 뿐이다. 이곳에서 시인이 전하는 “흑과 백은 번진 것이지 나눌 수 있는 게/아니다”라는 생의 비밀은 어쩌면 긍정적인(백) 가능성을 향한 희망은 아닐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는 색은 흑이고, 따라서 시인은 “어느 순간에도 착해지지 않기로” 했으니.


“검은 개인”으로 가는 긴 저녁

3부에는 「검은 개인」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편의 시가 연달아 놓여 있다.
첫번째 시에서 시인은 저녁이면 늘 “사랑하고 헤어지고 비난하며 뛰어다”니는 “만인을 지긋이 바라보고/그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을”, “한 개인의 걸음”을 생각한다. 그 개인은 누구인가. 두번째 시에서 밝히는바, “부끄러운 일을 덮기 위해 또/부끄러운 일을 벌이고/부끄러운 일을 잊기 위해/다시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검은 개인”이다. “검은 개인으로 남을 것”을 선언한 시인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에는 “길고 긴 저녁이 생긴다”. “흰 것들은 다 북극으로 가”고, “검은 개인”은 그저 여기에 남아 “어떤 사태도 끌어안고 밥을 먹”(세번째 「검은 개인」)거나 그 도시에서 “내 얘기를 내가 해야” 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그렇게 슬프더라”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대산은 성윤석의 시에 등장하는 “검은 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전체성의 개별화 과정’ 속에 있는 “검은 개인”은 자신 안에서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이중적 특성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그 대립자적 특성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내면적 투쟁의 고통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하여 성윤석의 시들에서 “비천하기도 하고 고귀하기도 하며,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인 기다림 속에 있는 ‘검은 개인’의 근본 느낌은 ‘부끄러움’과 ‘슬픔’이”라고 역설한다.

『2170년 12월 23일』은 ‘부끄러움’과 ‘슬픔’을 품은 “검은 개인”의 “길고 긴 저녁”의 시간을 함께 걸으며 흑백의 세계 속에서 미래에 닿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 시집 속으로

성냥을 치익, 그어 담뱃불을 붙인 뒤 손을 모아
성냥불을 감싸는 그녀의 손
왜 웃으면서 그럴까 담배 필터 끝을 손바닥에 탁탁
친 뒤 입술로 가져가는 그는 왜
입꼬리를 살짝 올려놓을까
여기서
저기서
담배를 피울 땐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동작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
항상 어딘가에 도착해 있고
어딘가로 다시 가고 있다
밤길도 밟는다고 생각하면 구불텅거리며
가던 길을 다시 가는데
보증서와 함께
오래전에 묻어두면 예쁘게 있다 사라질
거라고 팔아먹은 내 슬픔이 정말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인간의 동작」 전문

흐린 겨울 저녁인데 죽은 자의 글을 따라가는 앳된 소녀가 롤러스케이트 같은 기계를 타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땅은 좁아졌고 사람들도 줄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문장도 하늘로 떠올랐다 All’s Well That Ends Well*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아요 공중에서 눈이 내렸다 검은 구름에서 흰 눈은 여전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구름 위를 한 사내가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 걷고 있었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신인류였다 속도 중력 감정 들이 비틀어졌다 우리가 본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여성과 사내 들은 주로 공중에 떠 있거나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은 오염되었고 신인류는 이제 불행을 매수하지 않았고 내버려둔 채 세상 최후의 고독을 살았다 거기에 나는 없었지만 이에 대한 어떤 증거도 거기엔 없었다 고스란히 새와 식물 들은 보였지만 불법이긴 했지만 수명 단축 기계가 여기저기 도시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아요’ 그 도시의 재해대책본부에서 쏘아올린 저녁의 문장이 다시 공중으로 솟구쳤다
신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돛대 같았다
―「2170년 12월 23일」 전문

만인에 의한 만인의 만인*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만인의 펜과 만인의 마이크를 쥐고 만인을 향해 소리
지른다 만인이 만인의 멱살을 쥐고 만인이 만인을
비웃으며 만 잔의 술을 비운다 이럴 때 만인은 각자의
만인 각자의 만인끼리 사랑하고 헤어지고 비난하며
뛰어다닌다 나는 개인이라서 만인을 경멸하자는 게
아니다 나는 만인이라서 만인을 지긋이 바라보고
그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을 생각한다
한 개인의 걸음 말이다
저녁이란 게 늘 이렇다
창밖 풍경이란:
―「검은 개인」(p. 69) 전문

■ 시인의 말

한 권이면 족하지 했는데 다시 시집을 묶는다. 계면쩍다. 이 계면쩍음이 나중에는 뻔뻔해질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간이 두렵지만 불화와 불우 그리고 불후가 진눈깨비처럼 내리는 거리를 홀로 쏘다니며 인간의 삶을 다시 하청받겠다. 내내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불편해서 겨우 서 있는 듯한 문장만이 내 곁에 있을 것이다.

2019년 7월
성윤석

■ 뒤표지 글

사립문 열어 깃발이 없어 바람을 단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인간의 동작
2170년 12월 23일
에어 기타
피아노
일본 복어의 건축
예고편
전시용 사막
이중나선 구조를 보인 꿈
건물을 빠져나오며
빙장氷葬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음
흑백 화면
그림자놀이
문선공文選工
고통
옛,

2부
척尺
불면不眠
숲속에서
셋방 있음

산수유
이빨들
사월
산동반점
흰 개
섣달그믐
독백
유서
그렇다면, 연희야
아프리카

3부
검은 개인
검은 개인
검은 개인
검은 개인
검은 개인
이후의 극장
이후의 극장
이후의 극장
이후의 극장
경리외전經理外傳
축사
사손이형
장소성
물의 이미지
대부분의 일은 아침에

4부
달밤에 체조
새해
겨울밤
마음의 작동
낮달
문득 달을 보다
말[言], 말, 말들
원대한 포부
나의 저녁은 왜 전체가 되는가
너는 마치 부메랑처럼 떠나는구나
도서관
히치하이커
사물들
11월
저수지
5


한강
속초
마산
통영
하동 매화 농원
산책자

해설
검은 개인이란 무엇인가・김대산

작가 소개

성윤석

시인 성윤석은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공중 묘지』 『멍게』 『밤의 화학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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