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풀 끗혜 이슬

문학과지성 시인선 525

송재학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2월 27일 | ISBN 9788932035239

사양 변형판 128x205 · 132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시선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풍경의 얼굴을 드러내는 무한의 언어

 

올해로 데뷔 33년을 맞은 송재학 시인의 열번째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글자의 생김새부터 낯설게 느껴지는 이번 시집의 제목은 1935년에 세창서관에서 발간된 딱지본 『미남자의 루』에 수록된 옛 소설의 제목을 가져온 것이다. 딱지본은 1910년대 초반부터 신식 활판 인쇄기로 찍어서 발행한 국문 소설류의 책을 일컫는다. 표지가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되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당시 국수 한 그릇 정도의 싼 가격 때문에 ‘육전소설’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로 익숙한 옛이야기나 통속적인 내용의 신소설이 주를 이룬 딱지본은 싼 가격과 화려한 표지로, 당시 엄청난 대중적 파급력을 가졌다. 그런데 ‘통속’과 ‘대중적’이라는 말이 송재학의 시와 나란히 놓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애매한 감각의 세계를 팽팽한 긴장 속에 써내려간 그의 시는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다소 어렵게 생각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딱지본 소설이 송재학에게 와서 어떤 시의 옷을 입을 것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총 50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실린 이번 시집에서 딱지본 소설을 바탕으로 씌어진 시들은 3부에 놓인 13편이다. 1, 2부에서 송재학의 시가 펼쳐 보이는 풍경 속으로 먼저 들어가보자.

‘긴장’과 ‘감각’을 두 축으로 했던 송재학의 시에서 ‘풍경’과의 오랜 관계가 화두가 된 것은 2013년 출간한 여덟번째 시집 『날짜들』이었다. 당시 그는 풍경이 “내 속의 잠재태”(「시는 사물 속에 이미 존재했다」)로 느껴진다고 했다. 애초에 안과 밖이 따로 있지는 않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은 주체와 객체의 구별을 무너뜨리며, 풍경이 풍경을 보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2015년 출간한 아홉번째 시집 『검은색』으로 이어지며 더욱 깊이 있는 시적 성취를 이루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풍경을 대하는 시인의 모습이 진일보한다.

별이 잠드는 곳은 별들의 숫자만큼 물웅덩이가 널렸다는 서쪽
밤하늘에 별보다 더 많은 손금을 남기는
별의 잔상은 지상에서 건너간다는데
그게 위독인가 싶어 별과 별 사이
가장 빠른 직선을 그어보았다
―「별과 별의 직선」 전문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이번 시집 해설의 서두에서 별에 대해 쓴 시에 주목한다. 특히 우주적 공간에 대한 상상이 지상의 세계와 교섭하는 이 시에서 ‘위독’이라는 단어의 돌발적인 등장으로 낯선 긴장을 부여하며 극적 도약을 이뤄낸다고 지적하고, 시적 주체는 “별과 별 사이/가장 빠른 직선을 그어보”는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풍경의 비밀을 탐색하는 자, 내부에 스며드는 풍경의 수행자가 된다고 설파한다. 하여 “송재학의 시들은 풍경에 대한 시적 주체의 ‘수행’이 극적으로 미학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가설로부터 “수행을 통해 풍경은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를 끝없이 생성한다. 풍경은 하나의 진실, 하나의 작품이기를 거부하고 시적 ‘사건’이 되려 한다”는 결과를 도출한다. 내 안의 풍경이 풍경을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 풍경을 만들어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때 너는 되돌아보았느냐 뻘이란 뻘 모두 사춘기인 것을, 바다가 먼바다를 끌어당기듯 어둠이 어둠을 받아 적는 것도 보았다 그때 너는 너를 끄집어내어 헹구었느냐 바다는, 바다의 모서리마저 점자처럼 더듬거린다 희고 검은 종소리가 물고기 떼처럼 육체를 통과했다 물결이 멈춘 점토판 위에서 너는 무엇이고자 했느냐 담금질이 계속되는 부글거리는 물속, 거꾸로 매달린 수많은 눈동자, 바다의 얼굴을 파도 아래 온전했다 그때 너는 금 간 얼굴을 들었다
―「별과 별의 직선」 전문

송재학의 시에서 빼어난 부분 중의 하나는 2인칭의 시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 그의 2인칭은 무한히 확장한다. 위의 시에서 ‘너’는 보는 자이면서 바다에 빠진 자이고, 또한 바닷속의 ‘너’를 들어 올리는 자이다. “‘너’는 다만 ‘나’의 호명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의 상호적 관계속에서 그 잠재성을 드러내는 무한한 얼굴이다. ‘너’야말로 이 시에서 풍경의 수행자이며, 풍경을 생성하는 주체이다.”(이광호) 그리하여 익명의 수행자가 풍경을 탄생시키는 송재학의 시는 풍경의 얼굴을 드러내는 무한한 언어의 세계를 이번 시집에서 펼쳐 보인다.

이제 3부의 딱지본 소설과 송재학의 시에 대해 살펴보자.
흔치 않은 일이지만, 시인의 이름이 곧 그의 시, 그가 쓰는 문장 자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송재학은 그런 시인 중 하나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검은색』의 해설 서두에서 “이제 그의 시는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가끔은 알아맞힐 수 있을 만큼 특유의 스타일로 씌어진다. 작품 단위에서 고유한 시인들을 꽤 있지만, 문장 단위에서 이미 독자적인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극소수의 시인 중 하나가 송재학이라는 사실을 무슨 나만의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이렇게 한번쯤은 말해보고 싶었다”라고 밝히고 있거니와, 송재학은 섬세하고 개성 있는 특유의 한국어로 자신의 고유한 시 세계를 이룬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에는 “긴장이란 내 글의 속셈이기도 하다”(『푸른빛과 싸우다』의 뒤표지 글)라는 그의 고백처럼, 궁극적으로 시가 도달해야 할 ‘노래’를 향한 도정에서 안(내포)과 밖(외연)의 팽팽한 긴장이 있고, 언어의 감각화에 대한 시인의 부단한 노력이 있다. 많은 시인들이 그러하겠지만 송재학이 시에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매혹’이다. 그것은 그에게 계속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자 시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매혹을 ‘향가’가 갖고 있는 언어의 힘에서 느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진혼이나 기원 등의 주술적인 요소가 시가(詩歌)가 되면서 서정으로 바뀌는데, 이때 주술과 서정 사이에 있는 언어의 힘이 그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다는 것. 그리고 그는 언어로, 언어의 힘으로 작업하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시가 복잡하고 다의적인 된 이유를 향가의 영향에서 찾기도 한다. 향가를 읽으면서 나와 똑같은 존재가 우주의 어디에 또 있다는 평행우주론처럼, 사물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사물과 서사에는 일물다어설(一物多語說)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여, 시에서 어떤 서사를 이야기할 때 이미지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과 그 이미지를 하나의 단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려고 한 노력의 출발점이 향가라고 그는 말한다.(이상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김지율 시인과의 대담) 출발점이라고 했지만, 그의 시가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노래’도 결국은 향가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딱지본 소설을 시로 들여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자와 향가에 관심을 갖기 전, 그의 책 읽기의 시초가 된 것이 딱지본이었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딱지본 옥중화이다 50년 전부터 할머니였던 외할머니가 금호 장터에서 사 온 1960년대 향민사 춘향전을 이모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읽어주어야만 했다 책 읽어주는 전기수傳奇叟 이모의 심사가 사나워지려 하니 외할머니의 조급증이 귀한 계란탕을 내었다 요전법邀錢法이다 며칠 지나 외할머니는 오롯이 춘향전의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한글을 깨치는 것보다 더 빨리, 글자를 모르는 외할머니가 춘향이 속내를 외우기가 버겁지 않겠다
―「딱지본 언문 춘향전」 부분

이야기를 좋아하셨던 외할머니와 글을 읽지 못하는 외할머니를 위해 전기수 역할을 해야 했던 이모들, 그 틈에서 자연스레 글을 깨친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이 시를 시작으로, 3부에는 출간 당시의 표기법을 반영하여 딱지본 소설의 내용을 “발췌 및 인용 첨삭”한 시들이 이어진다.

결국 앗가온 청년 진명은 자신이 폐병쟁이라는 거슬 알고 자신을 졍답게 챙기던 산월과 함께 죽고자 햇다
나는 내 생명의 임자가 안이엇구나, 진명은 탄식햇다
산월은 진명의 눈빗틀 보고 넘우 가삼이 압흐고 쓰리엇다
청명월야 달은 발가셔 두 사람은 져졀로 말갓흔 눈물을 흘녓다
폐병과 가난과 술과 사랑과 죽엄은 오랜 동모 모양 어때동모 길동모 하면셔 본심이 청양하든 청년 시인 진명에게 우슴을 지얏다
풀 끗혜 이슬 생기듯 동모가 또 생기는가 보다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부분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시인 진명과 기생 산월의 사랑을 ‘신파’의 정념으로 담아낸 이 소설에서 딱지본 특유의 문체적인 미학과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이라는 시적인 이미지를 발굴하며 송재학은 시적인 언어의 범주를 확장한다. 딱지본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옮겨놓음으로써 다시 한번 시적인 도약을 이룬 것이다. “이 시가 인용한 딱지본의 정념은 과장된 것이지만, 그것을 시로 옮겨놓는 수행의 과정은 고도로 미학적인 행위이다.”(이광호)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에서는 시인 송재학만이 쓸 수 있는 언어로 이루어진 특별한 시 세계가 유감없이 펼쳐진다. 한국 시의 오랜 독자들에게, 더 깊어지고 확장된 송재학 시의 미학을 확인하는 일은 더없이 반갑고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  시집 속으로

꽃차례처럼 별이 운다 밤이니까 더 가까이 운다 별보다 더 맑은 소리는 별들 사이에 있다 거울도 어둠도 견디지 못하면서 금 가도록 운다 되돌아오지 않는 소리를 머금고 운다 맨살과 맨살이 부딪치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울고 있다 하지만 창백한 별빛만 지상에 왔다 별의 울음소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별의 거처를 아니까 날이 밝아도 이별은 아니겠지만, 별도 꽃도 서로 갈피가 없다 녹슬지 않는 소리는 없기에 별빛은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담았다 별의 눈매는 가벼워서 별빛은 벌써 떠나고 눈물의 시늉만 저 별에 남았다 오, 우리가 방금 지켜본 별은 비문碑文이 있다
―「아직 별의 울음소리는 도착하지 않았다」 전문

저녁의 뻘로 귀얄질하면서 바다의 얼굴은 뭉개어졌다 분명한 이목구비가 없기에 느린 파도는 머리칼을 밀고 간다 독백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집어등이 차례차례 켜진다 그때 너는 되돌아보았느냐 뻘이란 뻘 모두 사춘기인 것을, 바다가 먼버다를 끌어당기듯 어둠이 어둠을 받아 적는 것도 보았다 그때 너는 너를 끄집어내어 헹구었느냐 바다는, 바다의 모서리마저 점자처럼 더듬거린다 희고 검은 종소리가 물고기 떼처럼 육체를 통과했다 물결이 멈춘 점토판 위에서 너는 무엇이고자 했느냐 담금질이 계속되는 부글거리는 물속, 거꾸로 매달린 수많은 눈동자, 바다의 얼굴은 파도 아래 온전했다 그때 너는 금 간 얼굴을 들었다
―「그때 너는 바다로 들어갔다/그때 너는 무엇이었느냐」 전문

알록달록한 딱지본 옥중화이다 50년 전부터 할머니였던 외할머니가 금호 장터에서 사 온 1960년대 향민사 춘향전을 이모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읽어주어야만 했다 책 읽어주는 전기수傳奇叟 이모의 심사가 사나워지려 하니 외할머니의 조급증이 귀한 계란탕을 내었다 요전법邀錢法이다 며칠 지나 외할머니는 오롯이 춘향전의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한글을 깨치는 것보다 더 빨리, 글자를 모르는 외할머니가 춘향이 속내를 외우기가 버겁지 않겠다 이혈룡을 도와준 기생 옥단춘을 알기까지 외할머니는 내내 춘향이 화급한 마음이다 춘향이 수절이야 앞산 뒷산 쑥국새들도 잊지 못하고 지지쑥국 되풀이하지만 상수리나무 잎들도 얼룩덜룩 초록물을 뱉었다 남원 고을까지 울긋불긋한 이정표 따르면 산 너머 금방이겠다 새로 지은 광한루가 보이는 딱지 표지를 챙기는 춘향의 호시절이라
―「딱지본 언문 춘향전」 전문

 

■ 시인의 말

옛 소설 「슬프다―풀 끗혜 이슬」은 세창서관에서 1935년에 발간된 딱지본 『미남자美男子의 루淚』에 수록되었었다.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시인 진명의 이야기는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역대 딱지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목을 만들었다. 그 이름에 기대어 열번째 시집을 궁리했으니 내 식민지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독인 셈이다.

2019년 2월
송재학

 

■ 뒤표지 글

한 편의 놀라운 시는, 통점이 맺히는 시는, 다가올 때, 입말과 글말로 동시에, 전율의 육체로 온다. 시가 육체(그건 사물의 육체이면서 내 몸까지이다)를 획득하는 경우이다. 내 육신의 한 지점을 바늘이 통과하는 것, 또는 가슴에 막막한 통점이 번지는 것은 방금 경험한 시의 몸이 내 몸의 어떤 부분/기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듬더듬 말이나 글이 되려면 시간과 공간의 물질세계가 더 필요하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취산화서聚散花序
시詩가 떠 있다
눈썹 씨의 하루
하숙집
드므라는 말
왼쪽 금동 귀고리
아직 별의 울음소리는 도착하지 않았다
별과 별의 직선
나비와 나방의 차이
자벌레들
민박
소나기
옛 사진에서 얼굴의 해석
옛 사진에서 달의 항적
달맞이꽃/명상
달맞이꽃/월식
달맞이꽃/아프면
불가능의 흰색
성긴 것을 소疏라 하고 빽빽한 것을 밀密이라 하니 바람에게도 해당되는 성질이다
메아리
마네킹 살인 사건
꽃 지는 날
숲속에 흰 피가

2부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돼지의 머리맡에 누운 축생들
참척慘慽, 4월의 글자
고무장화
자화상
그때 너는 바다로 들어갔다/그때 너는 무엇이었느냐
터널
목판화로 듣는 개의 울음소리
발자국을 기다리는 발자국
육체의 풍경
서랍을 가지게 되었다

젊은 날의 내 물고기는 신호등 앞에서 다시 나타난다
작은 꽃의 세계사

3부
딱지본 언문 춘향전
강명화의 죽엄
슬프다 풀 끗혜 이슬
술은 눈물인가 한숨이런가
고대소셜 둑겁젼(蟾同知傳)
신일선의 눈물
미남자의 루淚
화류비극 유곽의 루
며누리의 죽엄
청쳔백일
공진회, 시골 로인 이야기
부용의 샹사곡
개타령

해설 | 풍경의 수행문 · 이광호

작가 소개

송재학 지음

시인 송재학은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2년 경북대학교를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기억들』 『진흙 얼굴』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내간체를 얻다』 『날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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