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125호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3월 7일 | ISBN 1227285X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76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봄호를 펴내며

 

왜 문학사인가?

2010년대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봄호의 기획은 ‘메타– 문학사’이다. 문학의 역사보다는 현장의 문학에 더 집중하는 문학잡지의 특성상 문학사적 작업을 시도한다고 할 때, 보통은 길어봤자 10년 단위의 작품들을 이전 시기와 구분 지어 색다르게 호명하는 작업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2020년대에 도래할 문학을 새로운 것으로 반기기 위해 2010년대의 문학을 한번 갈무리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왠지 모를 의무감이 만들어낸 관성적 기획 같은 것 말이다. 동시대의 문학적 경향들을 다소 성급하게 일반화해보려는 이러한 시도들이 차곡차곡 쌓여 문학사 서술의 기초 자료가 되어왔다는 점도 물론 사실이지만, ‘문학사’라는 테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고민은 그런 익숙한 관례를 반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을 짚어야겠다. ‘문학사’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 고민의 갈래는 여러 가지였고 혹은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2010년대 문학’이라는 말 자체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일 수 있지만 ‘2010년대 문학’이라는 호명 자체가 나에게는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왜일까. ‘◯◯년대 문학’이라는 말이 큰 무리 없이 통용된다면 그것은 ‘독자/비평가’ 각자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그 시대의 대표작들과 그것들의 경향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합의되는 지점들이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가까운 2000년대만 떠올려보더라도, 10년 전의 그 시기로 돌아가 대표작을 뽑아보라 한다면, 대부분 큰 불편함 없이 작품 목록을 만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우리가 함께 읽고 대화했던 그 시절의 작품들은 나의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으며, (그때는 어쩌면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의 문학적 지향을 거스르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작품과 지지하는 작품, 그리고 다수가 합의하는 그 시절의 대표작이 적정한 선에서, 정확히 말해 ‘미학주의’ 혹은 ‘문학주의’라는 시대적 대의 아래서, 더불어 ‘문단 문학’이라는 범위 안에서, 큰 불편함 없이 겹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2010년대의 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어색한 호명으로 여겨진다면, 내 안에서조차 그런 겹침의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준 깊은 슬픔, 2015년 표절 사태를 통과하며 느꼈던 어떤 불편함, 그리고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사태를 겪으며 느꼈던 감당할 수 없는 분노 등, ‘2010년대’를 되돌아보자면 그 시기 축적된 문자적 경험과 고민의 시간이 특정한 작가나 작품으로 수렴되기보다는 문학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아름다운 작품에 관한 ‘나’의 취향은 올바른 문학을 향한 ‘우리’의 요청에 의해 판단 중지 상태가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 취향이라는 것조차 애초에 어디로부터 기원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당연한 성찰도 뒤따랐다. ‘문학주의’라는 어쩌면 편리한 한국 문학의 절대적 대의와, ‘문단=문학’이라는 전제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결정적 요인을 ‘정치성’의 요청이라고 단순화할 수만은 없다. “‘너무 자극받아 집중할 수 없는’ 문자 문화 이후의 ‘새로운 육체New Flesh’”(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p. 48)들과 더불어 ‘미학성’ ‘문학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말 그대로 시시각각 갱신에 갱신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문학사에서 관습적으로 반복되던 ‘혼란의 시기’ 혹은 ‘위기의 시기’라는 수사를 2010년대에 비로소 실제의 차원에서 몸소 체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목소리들도 많았다. 2019년 현재의 한국 문학은 과연 ‘누구’의 문학이며, ‘어떤’ 문학인가. 그간의 한국 문학은 ‘누가’ ‘어떻게’ 대변해왔는가. ‘문학사’라는 이번 호의 기획 주제는 이처럼 ‘현장의 문학’에 대한 반성이 ‘문학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으로 이어지면서 도출된 것이다. 이 주제 안에서 우리는 ‘문학의 자율성’ 신화의 가까운 기원을 성찰하고, ‘문단 문학’의 바깥을 사유하며, 한국 문학사의 메타적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한다.
고민이 많아질수록 기획은 오히려 단순해지거나 그 의도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는데, 명민한 필자들께서 다양한 문제 제기를 요령 있게 해주셔서 그 어느 때보다도 알찬 글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필자들의 글을 상세히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서문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승기와 손유경의 글은 총론 격에 해당된다. 차승기의 「몰락 이후」는 ‘신화로서의 문학사’의 불가능성과 ‘선언으로서의 문학사’의 난점을 확인하면서 ‘발생으로서의 문학사’라는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개념은 문학의 역사를 ‘문헌의 연대기’가 아니라 ‘작품의 발생사’로 파악한다. 즉 “문학사란 작품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을 역사적 수용 가능성 속에서 현세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적 표상, 문학 제도, 문학 형성 조건에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권력적 네트워크 등을 비판적·전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한바, 최근 시도되고 있는 ‘독자의 입장’과 ‘페미니스트 시각’을 견지한 문학사 서술에서 그 긍정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그는 적고 있다.
손유경의 「한국 문학사의 새로운 가능성」 역시 총론으로서 손색이 없다. 현장과 강단의 문학사는 구별될 필요가 있는가, 문학사의 하한선과 상한선은 어떻게 조정되어야 하는가, 문학사를 새로 쓰기 위해 ‘기왕의 문학사’와 대결해야 한다면 그 대결의 상대를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까 등 문학사 서술과 관련된 원론적이고도 현실적인 문제들이 섬세하게 도출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에 나타난 부녀 관계에 주목하면서, 아버지– 아들 세대 간 기왕의 문학사를 대체할 ‘다른 세대– 젠더’의 관점을 제안해보는 장면도 흥미롭거니와, 이 글은 특히 한국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생생한 고민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 두 편의 글과 더불어 편집동인 강동호가 번역한 한스 울리히 굼브레히트의 「문학사를 계속 써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글도 문학사 서술과 관련된 다양한 고민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사실 이번 호 기획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중요한 질문은 ‘1980년대 이후의 문학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왜 1980년대일까. 앞서 확인했듯 2010년대가 ‘문학의 자율성’ 신화나 ‘문단= 문학’이라는 한국 문학사의 전제 자체가 그 근원에서부터 흔들린 시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최근 몇 년간 근본적으로 회의된 한국 문학의 그 익숙한 사정들은 어쩌면 1990년대 이후 견고해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의 많은 연구가 확인시켜주듯 1980년대의 문학을 형성한 주체들은 소위 문단의 유명작가들만은 아니었다. 문단 바깥의 다양한 글쓰기 주체들은,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문학의 자율성’ 테제가 강화되며 담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99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의 비평장에서 활발히 전개된 타자 혹은 소수자에 관한 논의들이 과연 실상의 그들을 향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최근의 반성도 깊다. ‘1980년대 이후의 문학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러한 성찰들이 포함된다. 이혜령, 조정환, 김형중, 이광호의 글은 각각 여성, 글쓰기– 노동, 난민, 후일담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에 관한 고민들을 풀어낸다.
이혜령의 「여성해방문학의 저자란 무엇인가」는 최근 활발한 1980년대 여성해방문학에 대한 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준다. 여성해방문학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실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저자의 이름을 떼어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는 물론 “대학교의 여학생 교지, 다양한 여성주의 매체와 노동조합 회보, 현재로서는 재연되기 힘든 모임과 조직에 관한 참여자들의 회고”들이 아카이빙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여성해방문학이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그 표현에 대한 상호참조와 이해, 연대라는 행위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성해방문학사에 관한 연구가 이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때, 억압받는 여성들의 집단성이 드러날 수 있으며, 나아가 “글쓰기 행위에 내재해 있던 위반의 가능성을 점차 문학 고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한국 문학장을 전면적으로 재사유할 수 있게 된다는 이혜령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곱씹을 만하다.
조정환의 「글쓰기– 노동과 문학사의 새로운 가능성」은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글쓰기– 노동’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핀다. 1990년대 이후 글쓰기의 디지털화와 인터넷화가 이루어지면서 ‘글쓰기– 노동’에 나타난 두 가지 변화를 그는, 문단 전문 문필가들의 글쓰기가 “비물질적 노동”으로 변화한 점, 그리고 문단–밖 글쓰기가 전경화된 점으로 꼽는다. 이처럼 발신자와 수신자가 구분되지 않는 네트워크 글쓰기의 장에서 “수많은 글쓰기가 플랫폼 기업을 위해 봉사하는 비고용, 비물질의 무상 노동으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아가 문단 권력 논쟁과 표절 논쟁을 통해 한국 문단이 결국 “전 지구적 제국 주권과 자본주의적 착취망의 한 지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그의 진단도 경청할 만하다. 자본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성별 및 인종을 가리지 않는 노동계급 전체의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 글의 결론은, 글쓰기– 노동에 대한 관련자들의 어떤 연합과 실천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김형중의 「난민들의 문학사」는 푸코와 아감벤을 경유하여 ‘생명정치’라는 개념으로 1970년 초 일어난 ‘광주 대단지 사건’을 다룬 소설들을 정독한다. “난민들의 문학사”라는 제목이 환기하듯 이 글의 목적 역시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방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간의 문학사가 “해석적 배제”로 인해 놓친 “나체들, 난민들, 벌거벗은 생명들의 역사”가 씌어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앞으로 어떤 섬세한 작업들로 이어질지 기대하게 한다.
이광호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보라」는 “운동권 남성 주체의 체험의 정당성과 주체화의 과정”으로 흔히 서술되어온 후일담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본다. 후일담이 “상실된 대상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결국 “애도의 서사”일 수 있다면, 체험의 동일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상의 타자성을 지우는 형태로는 애도도 불가능해지고 후일담의 잠재성도 사라지고 만다고 그는 말한다. “돌아보는 주체의 체험의 진정성이라는 패러다임”을 해체하며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후일담들을, 그는 “‘얼굴’ 없는 후일담”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으로 지칭해본다.
이상 일곱 편의 글은 앞으로의 ‘메타문학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는 물론 구체적인 작업 목록들까지도 친절히 일러주는 의미 있는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실린 김정환과 이인성의 좌담 「80년대 문학운동의 맥락 2」는 1984년 『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80년대 문학운동의 맥락」이라는 대담의 오마주 형태로 기획된 것이다. 1980년대 한국 문학의 현장에 대해서는 물론 이후 30여 년간의 문학장의 변화를 이 좌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새로운 형태의 문학사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좌담을 기획하고 사회를 맡아준 편집동인 강동호의 노고에도 감사드린다.
한국 문학의 과거와 미래를 고민하는 와중에도 현장의 문학은 활발하다. 본권의 창작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동규, 최두석, 김소연, 이병률, 신용목, 이민하, 박상수, 하재연, 구현우 시인이 시들을 보내주었고, 김종옥, 박상영, 김수온, 김선재 작가가 소설란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지난 계절의 신간들을 성실히 읽고 흥미로운 리뷰를 보내준 김나영, 이철주, 조대한, 김녕, 이학영, 인아영, 전기화 평론가께는 물론, 이번 호부터 새롭게 선보이는 〈메타비평〉 코너에 쉽지 않은 글을 보내준 장은정 평론가께도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지성〉 코너에서는 미디어이론가이자 철학자로, 예술비평가이자 전문 큐레이터로 현대 예술 및 매체에 관해 흥미로운 이론적 성찰들을 내놓고 있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러시아 코스미즘」이라는 글이 번역·소개된다. 『코뮤니스트 후기』(문학과지성사, 2017)라는 번역서를 통해 그로이스를 한국 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러시아 문학 연구자 김수환이 번역하고 상세한 해제를 덧붙여주었다. 최근 몇 년간 서구 학계와 예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러시아 코스미즘Russian Cosmism”이라는 독특한 사상의 담론적 유효성을 확인하는 「러시아 코스미즘 재방문」이라는 흥미로운 해제는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글은 『문학과사회 하이픈』에 수록된 정홍수의 「위기의 비평, 위기의 문학사」이다. ‘다른 문학사’ 혹은 ‘메타문학사’를 고민하고 있는 이번 호에 작년에 작고하신 김윤식(1936~2018) 선생의 생전 작업을 돌아보며 추모하는 글이 실린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정홍수의 표현대로 “평생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위기의식의 벼랑 끝으로 내몬 비평가”였던 그의 “탐구의 도정이 하나의 고유명으로서 ‘한국 근대문학사’였다는” 그 “아득한” 사실 때문일 것이다. 후배 연구자이자 비평가로서, 아니 한국 문학의 또 한 명의 쓰는 주체이자 읽는 주체로서, 그 ‘아득함’은 그것 그대로 간직하되, 우리는 그가 일구려 했던 “하나의 고유명으로서 ‘한국 근대문학사’”를 해체하고 다시 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학만큼 강한 것이 없고 또 약한 것이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을 음미하고 또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번 호의 『문학과사회』가 그러한 작업들을 위한 다양한 고민을 공유하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동인 조연정

 

하이픈 보기 -> http://moonji.com/book/18768/

목차

봄호를 펴내며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외 1편
최두석 개개비 외 1편
김소연 생꼬르발에 대하여 외 1편
이병률 글씨들 외 1편
신용목 밤은 필요하다 외 1편
이민하 우울과 경청 외 1편
박상수 일요일의 낮잠 외 1편
하재연 양양 외 1편
구현우 악인 외 1편

소설
김종옥 농담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김수온 한 폭의 빛
김선재 가까운 일들

리뷰
김나영 기다리지 않고 머물지 않는 시간
이철주 돌이킬 수 없으므로 , 돌이킬 수 없음으로
조대한 나, 사라지거나 혹은 증식하거나
김녕 소설이 되는 방법: 소설이 아닐 것
이학영 암흑천지의 시대, 인간의 길을 묻다
인아영 여성 청년들의 민족지 혹은 생존기
전기화 더 예민하게

메타비평
장은정 현장–스코어–비평

지성
보리스 그로이스 러시아 코스미즘
김수환 러시아 코스미즘 재방문

제15회 마해송문학상 발표
주미경 마술딱지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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