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3

박미란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2월 8일 | ISBN 9788932035161

사양

책소개

입을 잃은 자의 소리 없는 비명
차디찬 얼음으로 맺힌 마음의 고백

 

박미란의 두번째 시집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시인은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지 20년 만에 첫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시인동네, 2014)를 출간한 바 있다.
누군가가 ‘입’을 가져가버린다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수많은 말들은 어떻게 될까. 터질 듯한 답답함에 가슴이 타오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인 박미란은 모든 말을 차갑게 얼리기로 한다. 달라지지 않도록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도록 얼려버린 말들은 고이 쌓여 있다가 언젠가 그 말들이 별 볼 일 없게 느껴질 때쯤 조금씩 몸 밖으로 풀려 나온다. 이는 마치 등단에서 첫 시집까지 2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시로 발화되지 못했던 시인의 마음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그간 쌓아두었던 말과 마음을 다시 한번 이 시집에 풀어놓았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마주쳤던 갈림길 앞에서의 망설임, 불안 그리고 후회는 잊힌 것이 아니라 화자의 몸 안에 “마음의 얼음덩어리”(「저녁에서 밤으로 흘러들었다」)처럼 뭉쳐져 있다 슬며시 스미어 나와 시인의 시가 되었다. [……] 그리고 그 아련한 아픔과 안타까움은 화자의 몸속에서 함께 세월을 지내면서, 삶을 살아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연륜과 지혜로 전이(轉移)되었다. 누구든 그렇게 말하지 못한 것들을 마음에 얼린 채로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_김영임(문학평론가)


“어떤 말은 그대로 몸속에 머물렀다”
발화되지 못한 채 흔적으로 남은 시간들

 

물살을 거스르던 청년들이 강의 이쪽과 저쪽을 건너는 사이
우리는 허물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저쪽 너머를 바라보았지만
어떤 말은 그대로 몸속에 머물렀다

우리는 다시 흔들렸다 물어도 답할 수 없는 풍경에 가만히 숨을 내쉬며
―「강둑에서」 부분

누군가는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선택을 내리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며, 종종 후회하고 다시 돌아보기도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떠한 선택도 내리지 않은 채 현재의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 마치 박미란의 시적 화자들처럼 말이다. 물살을 거르며 “강의 이쪽과 저쪽을 건너는” 청년들을 우리는 그저 바라보고 있다. “밤마다 송충이들이 짓무른 몸으로 기어가는 것을” “임신한 고양이가 몰래 집 나가는 것을”, 산당화가 “꽃잎 붉게 하려고 손가락 넣어 토하는 것을” 나는 밤마다 바라보기만 한다. 변화/변태를 선택한 다른 존재들 앞에서 나는 “안간힘 쓰며//제 몸 지키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밤마다 나는」).
다른 선택을 내리지 못한 우리의 마음엔 어떤 감정이 남았을까. 후회 혹은 미련? 그리고 언젠가 ‘그때 선택을 내렸어야 한다고’ 한숨 쉬며 말할 날이 오는 걸까. 하지만 박미란의 화자들은 그마저도 행하지 않는다. “맘속엔 수많은 총알의 흔적”들이 있지만, 총알이 스치면서 만들어낸 삶의 흔적들을 굳이 꺼내놓고 싶지 않다(「우리들의 올드를 위하여」). “그대로 몸속에” 머무는 말들. 선택의 길목에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자들은 그저 맘속에 하지 못한 말들, 그것이 무엇이든, 그 말들을 자기 안으로 함몰시킨다.


“끝까지 버티었으니 바싹 타들어갈까 해요”
마음속 차디찬 것들을 녹여내는 버팀의 시간

 

당신을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후회한다는 걸 알아요 어떤 말은 비참해서 입술에서 나가는 순간 얼음이 되어요 어느 때부턴가 차가움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소음이 심한 냉장고의 커다란 얼음덩어리에 힘들었던 적 있어요 어떻게 그걸 안고 살아왔는지 몸속의 종양 덩어리를 뱉어놓은 듯 냉장고는 멈추었어요 이제 당신을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차가운 당신, 당신이라는 환상을, 견디기 싫어졌어요 마음의 얼음덩어리를 들어내면 또 후회하겠지만 녹는 순간을 지켜보던 마지막 천사처럼 우리의 느닷없는 밤도 흘러갔어요
―「저녁에서 밤으로 흘러들었다」 부분

발화되지 못하고 몸에 남은 것들을 화자는 그대로 얼린다. 꼭꼭 언 “얼음덩어리”로 만든다. 마치 “몸속의 종양 덩어리”처럼 냉장고 안에 놓인 거대한 얼음덩어리. 어떤 미련도 후회도 새어 나오지 않도록 영원히 보존하려는 듯 마음을 차갑게 식힌다. 하지만 그 자리를 견디고 있는 화자에게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어떻게 안고 살아왔는지” 알 수조차 없는 얼음덩어리이자 그때의 그 “환상”을 ‘나’는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다. 화자는 차디찬 덩어리를 녹여 밖으로 흘려보낸다. 마치 영원할 것 같았던 마음의 짐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과정은 나에게 후회를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화자는 말한다. 이러한 “느닷없는 밤도” 흘러갈 것이라고 말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듯 울부짖곤 했지만” 지나가는 시간 안에서 그리 애썼던 마음은 힘을 잃고 “시시한 일”(「겨울」)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세월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는 동안 스스로를 단단히 버티게 해주었던 힘, “부동(不動)의 마음”(김영임) 덕분이다. 시인은 말한다. 말 못 한 것들이 마음에 쌓여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이 자리에 머문다고 해도, ‘아무렴 어떠냐’고. “너무 애태우지” 말라고.


■ 시집 속으로

 

함께 묻히고 싶다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날을 경멸한다고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지독하고 지독해
파란 새, 파란 새 날아가고 있다

너와 헤어진 후
그 말은 바스러지며 떨어져 나갔다 내 것이 아니었다

투명하게 고드름이 달리고
너는 매일매일 그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부분

 

지난밤,
강은 하구까지 내려왔다
아무리 해도 돌아갈 수 없다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을 듣지 않았다

밤새 강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물결을 완성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가 될 줄 몰랐다
―「그런 날이 계속되었다」 전문

안녕,
왼발의 수고를 덜고 싶었으나 오른발을 삐었어
맘대로 안 되니까 살아가는 거야

다시 인사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안녕, 이제 정말 안녕
―「안녕」 부분

 

마음이란
그런 거야
보이지 않고 냄새나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거야

두려움이 자라 뾰족함이 되던
물방울의 여리고 둥근 시간들

온몸에 소름 돋은 그 긴 날을 알았다면
여름은 왔을까

먼 곳에 가고 싶었다
손을 내밀면 빙하처럼 투명한 열매가 맺힐 테니까
―「물방울의 여름」 부분


 

■ 뒤표지 글

그러니까 당신은 떠나가야 한다.

최소한으로 버티려 했던 그 힘마저 무너지고 들키지 않으려는 듯 나무 의자에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이제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당신의 이름으로 끌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

설핏 잠이 들었다.

눈이 내렸어.
몇 년 만의 폭설이 내렸어.
나무도, 빈집도, 오랫동안 떠나지 못한 눈빛도 눈 속에 묻혔어.

아무리 캄캄해도 당신은 변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어둠을 흔들며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틈새로 들어오는 파르스름한 빛을 감싸 안았다. 차고 딱딱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짧고 깊은 휴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날이 그렇지는 않았다.

 

■ 시인의 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줄기 빛이 마음에서 입술로
건너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면
너는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참, 시시하기도 하지
이 모든 뒤척임.

2019년 2월
박미란

목차

1부 어떤 말은 그대로 몸속에 머물렀다
목덜미 /강둑에서 /아침이 오면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아름다움에 대하여 /밤마다 나는 /그런 날이 계속되었다 /동백 /어느 날 저녁 /여수 여관 /우리들의 올드를 위하여 /문 /사이 /강 /겨울 /숟가락질하다 /모자 /저녁에서 밤으로 흘러들었다 /수목원

2부 정작 너무 흰 것은 마르지 않는다
죽은 별에게 /외삼촌 /흰 벽 /안녕 /푸른 집, 그 바람 /가지를 삶으며 /물방울의 여름 /후회 /창문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담쟁이 /기억은 한동안 /응달의 눈 /사랑 /2월과 3월 /장례식 /머루 /북극성 /공휴일

3부 아름다운 것을 품으면 모든 게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다
저녁이면 돌들이 /키스 /영혼이 내게 말했네 /연못 /동백, 휘파람 /바다 /중앙 /흰 눈 /흰 돌 /하늘 /나중 오는 것들 /그늘의 저쪽 /성산 일출봉 /그 집 앞 나무 /거리 /숲속의 작은 불빛 /노래 /호양나무 /그런 날이 계속되었다

해설
“붉은빛”에서 “호양나무”까지 · 김영임

작가 소개

박미란 지음

강원 태백 황지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가 있다.

독자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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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4 =

  1. 이희주
    2019.02.20 오후 1:52

    입이 있어도 할 말을 다 하면서 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쳐 힘든 저에게 위로가 되어주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