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빛

문학과지성 시인선 522

위선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9년 1월 24일 | ISBN 9788932035154

사양 변형판 128x205 · 188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언어의 가능성을 찾아 ‘서정적 전위성’을 확보한
사유가 있는 큰 시

 

시집을 펴낼 때마다 한국 서정시의 진화를 확인시켜주는 시인 위선환의 일곱번째 시집 『시작하는 빛』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5년 만에 새롭게 찾아온 이번 시집에는 총 5부로 나뉘어 69편의 시가 실렸다. 이 시집에서 위선환 시인은 탁월한 시적 감각과 깊은 사유로 확보된 ‘서정적 전위성’을 다시 한번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그것은 언어의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적 시도를 해온 시인의 치열한 탐구의 결과이자 그의 시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지향점이기도 하다.

시인 위선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1960년에 등단한 그가 1970년부터 30년간 시를 쓰지 않았다는 것.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은 “위선환 시인이 다시 시를 쓰기까지 30년이 걸렸던 것은 어쩌면 시적 허용―정확히는 시적 자유―을 한국어에서 보편문법의 일부로 재도입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설파한다. 1960년대 위선환의 시는 당대의 어떤 시적 경향에도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당시 그가 보여준 시적 행보는 30년이 흘러 2000년대 시인들에게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 “처음 시를 쓸 때부터 보편문법 너머에서 생성되는 어떤 것을, 이를테면 명사(주어)의 존재론이 아니라 형용사(술어)의 존재론을 겨냥하고 있었”던 그의 이런 “시도는 당시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해설에서 밝히고 있거니와, 그럼에도 한국 시는 그가 걸었던 그 길로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긴 시간을 보낸 후 시인이 새로 쓴 시들을 갖고 나타났을 때, 이 시들은 우리 언어의 보편적 가정을 전복하는 특별한 언술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권혁웅은 덧붙인다. 여기에, 유년 내지 고향의 심상지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탐진강』을 제외한 그의 시집 제목이 모두 술어로 끝나는 점을 지적하며, 이번 『시작하는 빛』에 이르러 예외가 된 이유를 “그동안의 시적 탐구가 이번 시집으로 완성―정확히는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여자가 짚는 남자의 끄트머리에 남자가 벗어서 내어놓은 발뒤꿈치의 두 뼈가, 나란하다

목뼈는, 꺾이지않았는가, 어깨뼈는, 흘러내리지아니했는가, 갈비뼈와, 갈비뼈의, 사이와사이에서바람지나는소리가나는가,
등뼈의, 기울기와체격의구배는합치한가,
뼈는, 뼈끼리, 사소한불일치가있는가, 뼈와, 뼈끼리, 삐걱대기도하는가,
팔뼈와, 다리뼈들은, 가지런한가,
팔굽뼈와, 손가락뼈와, 무릎뼈와, 발가락뼈의, 관절들이헐겁지는아니한가,
엉덩이뼈가, 조각나지는않았는가,
발바닥뼈는, 판판한가,
뼈일, 뿐인, 뼈가, 확실한가, 뼈와, 뼈의, 사이에틈새기가들여다보이는가, 서로맞는, 뼈, 끼리, 맞추었는가,
저쪽의짜임새와, 거기는단순한모양새와, 뼈의, 결합은, 뼈로, 짓는, 구성으로서완벽한가, 마침내조용한가,
뼈를, 만지는손끝에인광이묻는가, 한번, 더, 살펴보는,
차례인것,

찬물 얹어서 이마를 씻은 사람이 가리킨다 일식과 만월 사이에 꼬리 긴 별이 멈춰 있다

뼈를, 뼈로서, 완성하는, 끝, 차례에는, 희고, 둥근, 머리뼈를, 받쳐, 들어서, 조심스럽게,
뼈가 가장 가파른 높이가 되는 높이에다 올려놓은……,

골격은

사,람,과,죽,음,과,주,검,이,일,체,로,서,일,치,한,주,체,의,형,식,인,것.
―「죽은 뼈와 인류와 그해 겨울을 의제한 서설」 부분

이번 시집의 서시 「죽은 뼈와 인류와 그해 겨울을 의제한 서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죽어서도 완결되지 않는 죽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 시는 육탈과 기억의 흩어짐을 세밀하게 기록하다가 죽은 자의 삶, 죽은 상태로 살아가는 삶 내지는 살아 있는 죽음의 모습으로 나아간다. 시인은 이런 상태를 “뼈”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죽음의 알레고리나 삶 너머의 폐허를 가리키는 은유가 아닌 뼈 자체이다. 그것은 “골격은//사,람,과,죽,음,과,주,검,이,일,체,로,서,일,치,한,주,체,의,형,식,인,것.”으로 씌어져 있는바, 사람과 죽음과 주검이 겹쳐져 하나가 된 형식을 말한다. 위선환은 “사물은 낱이고 자체自體”라고 믿는다. 하여 그는 시에서 “사물을 비유하는 말로, 상징으로, 다만 부가치附加値로 드러내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에게 사물은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와 하나일 뿐이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사물을 움직이고 변화하도록 변혁하고, 또는 전복하는 언어. 이번 시집은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다.

마침내
영원으로, 전신을 밀며 걸어 들어간 일시와
돌문을 밀고 나온 여자가 오래전에 죽은 전신을 밀며 남자의 전신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일시가
일치한,

동일시에, 남자 안에서 눈 뜬 여자의

저, 눈에,

빛이.
―「돌에 이마를 대다 영원은,」 부분

「죽은 뼈와 인류와 그해 겨울을 의제한 서설」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돌에 이마를 대다 영원은,」에서는 오래전 죽은 남자 안으로 지금 막 죽음을 맞이한 여자가 들어간다. 이렇게 동일시된 남자와 여자의 눈은 겹의 시선을 이룬다. 죽은 남녀가 동일시된 후 뜬 겹의 시선은 다름 아닌 시인의 시선이다. 그러므로 그 눈에 들어오는 ‘빛’이 바로 이 시집의 ‘시작하는 빛’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문법의 규약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이 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물과 언어가 하나를 이루어 움직이고 변화할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가 반짝이는 것처럼, 『시작하는 빛』에 실린 시편들은 시인이 구현해낸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 안에서 더없이 빛난다.

한편 이번 시집 끝에 놓인 제5부에는 「입석리」라는 장시 한 편이 차지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이자 위선환 시의 향수이기도 했던 장흥의 방촌리, 옥당리, 접정리, 건산리, 행원리, 기동리, 신풍리가 시 속에 있다. 이 시에서 농경사회가 쇠락하는 풍경(풍속)과 그 풍경(풍속)에 겹쳐져 있는 쓸쓸한 정서를 몽타주 기법으로 언어화한 시인은 “장흥과 그곳에 펼쳐진 언어와 장場을 시로 써내는 마지막 작업이 될 것 같은 이 시편에서 대상을 골라 배치하고, 언어로 형상화하면서 시편 전부의 질감과 색감과 광도와 어조를 고르는 작업”을 했으며, 그것은 “바라보며, 뒷걸음하며, 외떨어지는 일을 길게 말한”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시집 안에 수록된 다른 시들과 결을 달리하는 이 장시가 더욱 지극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전작 『수평을 가리키다』의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불편하다. 남은 시간은 고작 짧은데, 나는 아직 시도試圖한다”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한국 시의 선두에서 전위를 펼치고 있으며, 이번 시집은 이전의 그의 시와는 또 다른 시도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위선환이 말하는 전위는 “당대의 시와는 다른 시를 지향하고, 그렇게 지향한 바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는 “전위한 시가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에게 익숙해지고, 그래서 흔히 읽히고 말하는, 언필칭 보편성을 실현한 시로서 양식화한 경우에도, 전위는 선제적이거나 또는 ‘다시’ 실천하는 전위로서, 다른 시를 지향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그의 시가 늘 전위적인 이유이다.

“​시인은 젊었다./나에게 물었고,/나는 내가 못한 일을 말했다./‘큰 시를 쓰시게.’” 역시 전작 『수평을 가리키다』의 뒤표지 글이다. ‘시인’은 물리적인 나이를 뛰어넘어 시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늘 언어를 변혁하고 전복하며 다른 시를 시도하는 위선환은 누구보다 ‘젊은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시인이 스스로에게 건넨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큰 시를 쓰라는 전언은 그의 입에서 다시, 그의 시로 옮겨 와 『시작하는 빛』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가 밝히는 시의 빛은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고 있다. 『시작하는 빛』이 그 하나의 증거로 지금, 한국 시에 당도했다. 이 긴장감 넘치는 시의 전위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 시집 속으로

창밖에, 나뭇가지에
앉아서
주둥이를 들고 우는 새가 보인다
창 안에, 탁자
위에
유리컵이 놓여 있다

창유리는 밝고
새와, 새소리와, 새소리가 울리는 공중과, 새소리는 못 가 닿는
저어
하늘까지

투명하다

하늘은 조용하고, 조용한 하늘이
새소리 울리는 공중으로 번졌고, 공중이 조용해졌고
조용한 공중은
번져서
나뭇가지로, 나뭇가지에 앉아서 우는 새에게
닿았고
뚝, 울기를 그친 새가 고개를 돌리더니
조용히
나를
보았고

내가 조용해졌고

조용하므로 투명한
것이
창유리를 투과했다고,
팅,
유리컵이 울렸다고,

가슴 바닥이
문득
차갑다고,

찬 물방울 하나 떨어진 것이다,
라고
―「새소리」 전문

여자가 손가락을 만지더니 금색 반지를 뺐다 여자의 손가락에 금빛 햇살 오라기가 감겨 있다

<잎은 지고 없는 나뭇가지다 넓은 잎사귀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벗은 발로 걸어온 여자의 발바닥이 흙투성이다 땅바닥에 찍힌 여자의 발자국에 흙이 묻었다

<찬물 담아서 물그릇을 놓던 자리다 물그릇의 물빛 윤곽이 남아 있다>

이마는 희고 이맛살이 파인 여자는 눈자위에 실핏줄이 말라붙었다 속눈썹이 젖고 지금 운다

<동풍이 지나가고 젖은 구름이 걷힌 뒤다 갠 하늘에서 물냄새가 난다>

목 길고 허리는 가는 여자의 그림자 안으로 눈은 크고 어깨는 좁은 여자가 들어가서 눕는다

<물방울 여럿이 수면에 얹혔다 무거운 몇 개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다>

여자가 여기에 서서 건너다본 물 건너편에 어제 죽은 여자가 서서 여기를 건너다보고 있다
―「여자와 물그릇이 있는 풍경」 전문

 

■ 시인의 말

 

시집 『새떼를 베끼다』 이래 나는
사물에서 사물을 찾고, 언어에서 언어를 찾는다.
아울러서
사물과 하나 된 언어가
큰 시를 가늠하게 하는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설령 그것이
고작 지체이고 실패일지라도 나는
말을 바꾸지 않는다.
곁을 지켜준
여러 평론가와 시인과 ‘문학과지성사’에
감사한다.

2019년 1월
위선환

 

■ 뒤표지 글

사물은 낱이고 자체自體다. 그러므로 나는 시문에서 사물을 비유로, 상징으로, 다만 부가치附加値로 드러내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비유하는 말로, 상징하는 말로, 다만 부가치로 드러내는 말로 되새기는 언습을 경계한다.

언어는 사물을 드러낸다. 사물을 드러내는 언어와 언어가 드러내는 사물은 하나다. 언어는 사물이다.

사물과 하나로서 언어는 ‘온갖’이며 ‘모든’이다. 예로서 상상, 가 상, 허상, 환상, 예상, 추상, 관념, 토씨가 그렇다. 나는 관념이나 관념어를, 혹은 비구상이나 비구상어를, 또는 기성 문법과 다른 문법이나 구문을 거부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그러하게 언어는 ‘온갖’이며 ‘모든’을 드러내는 능력이다. 그러해서 언어는 ‘온갖’이며 ‘모든’으로 드러나는 자유다.

사물은 있고 움직이고 변화한다. 사물이 그 능력을 잃고 그래서 언어가 틀에 박힌 때에, 정직正直한 언어는 반드시 사물이 있고 움직이고 변화하도록 변혁하고, 또는 전복한다.

언어의, 그 능력과 그 자유와 그 정직이 시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가능성이다. 언어의 이 가능성이 나에게는 ‘서정적 전위성을 확보한, 사유가 있는 큰 시’를 가늠하게 한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죽은 뼈와 인류와 그해 겨울을 의제한 서설 / 돌에 이마를 대다 영원은, / 첫 / 창 / 물비늘 / 가리키다 / 소설小雪 / 소실점 / 돌을 집다 / 간극 / 새소리 / 자작나무 그늘은 희다 / 투광透光 / 자국 / 그 뒤에 / 월식 / 지문 / 여자와 물그릇이 있는 풍경 / 겹, 들 / 두물머리 / 실루엣

제2부
물빛 / 묻다 / 문득 / 저녁에 / 설렘 / 벌레소리 / 손 / 투영投影 / 눈 결정 / 첫눈 / 석탄기 / 줄임표 / 빗금 / 점 / 밑줄 / 물방울 1 / 물방울 2 / 물고기자리 / 구름의 뼈 / 적막 / 하늘은 멀고

제3부
빗방울을 줍다 1 / 빗방울을 줍다 2 / 과수원 / 순간에 / 초승 / 늪 / 해안선 1 / 해안선 2 / 동지 / 남자 / 음각陰刻

제4부
공중에 / 바위 아래에 머문 아홉 날의 기록 / 웅덩이 / 소한 / 삼한일三寒日 / 전정殿庭에서 / 비문증飛蚊症 / 균열 1 / 균열 2 / 균열 3 / 종장終章 / 겨울 나그네 / 모서리 / 4월 16일을 주제로 한 목관 소나타의 젖음과 맑기의 변주

제5부
입석리立石里

해설 | 뼈와 물의 노래―권혁웅

작가 소개

위선환 지음

시인 위선환은 1941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60년 서정주, 박두진이 선한 용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1970년 이후 30년간 시를 끊었고, 1999년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새떼를 베끼다』 『두근거리다』 『탐진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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