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제물

정영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8년 12월 17일 | ISBN 9788932034850

사양 변형판 128x188 · 448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역사의 뒤안길에서 잃어버렸던 한국 문학의 소중한 한 조각
정영현 『꽃과 제물』, 반세기 만에 부활하다

1968년 11월 『여성동아』 복간 기념 공모의 첫 당선작인 정영현의 『꽃과 제물』이 출간됐다. 해당 공모전은 1970년 박완서가 등단하는 등 꾸준히 여성 문인을 배출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꽃과 제물』은 당시 『여성동아』에 부록으로 게재되었으나, 이후 작가가 도미하면서 한국 문학사에서 잊혀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는 50년이 지난 2018년, 묻혀 있던 4・19문학의 한 장면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특히 이 책은 드물게도 4・19혁명의 역사적 순간들을 정면으로 재현하여 보여준 장편소설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단순히 1960년뿐 아니라 일제하 식민 시대, 6・25전쟁의 참혹상, 분단 체제의 비극 등 우리 민족이 겪어온 격동의 역사가 한 가족 삼대를 정통으로 관통해 서사를 이루는 거대한 작품이다. 이 소설이 첫 출간 이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출판되어 독자의 손에 들렸을 때에 우리 문학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을지 상상하면, 흘러간 지난 50년의 세월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이제라도 온전히 새로운 그릇에 담겨 21세기 독자 곁에 머물 수 있음을 우리는 축복으로 여기고자 한다.


네 장의 봄과 세 번의 여름들
제물로 바쳐진 목숨 위에 신화처럼 피어난 꽃

 

『꽃과 제물』은 네 장의 봄과 세 번의 여름이 교차되며 구성된다. 세 번의 여름은 주인공 준의 가족이 겪는 일제하 식민지 시대의 서글픈 여름, 외세에 의해 해방된 뒤 1년이 지난 시기의 뜨겁고 혼란스러운 여름, 마지막으로 6・25전쟁이 한창인 참혹한 여름으로 현대사의 태생적 질곡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격동기의 복판에서 자신에게 지워진 책무를 다하고자 애썼던 각 등장인물들의 삶이 생생하게 육박해 들어온다.
이 세 여름과 교차되는 네 대목의 봄은 그에 비해 단 하나의 봄이다. 주인공인 네 명의 남녀 대학생들, 성규와 준, 수미와 형주가 각각의 삶 안에서 겪어내는 1960년의 봄이 이른 초봄을 지나 4월 19일의 절정으로 치달으며 전개된다. 대학로에서 출발하여 세종로를 거쳐 경무대(현 청와대) 앞까지 이르는 서울의 정치적 문화적 공간과 권력의 힘에 대항하는 젊은 주인공들의 피와 죽음이 세밀하게 묘사되며,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와 사유를 통해 당대 사회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과 성찰이 펼쳐진다. 4・19혁명의 주역들이라 할 수 있는 당대 학생들이 절망과 고뇌 끝에 새로운 길을 찾는 선연한 여정은, 지금까지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미완의 현실 너머를 꿈꾸는
찬란한 문학의 성취

 

더불어 『꽃과 제물』은 사람들의 내면과 심층을 밀도 깊게 보여준다는 데에서 귀중한 문학적 성취를 찾을 수 있다. 개인과 조국 간의 관계와 갈등, 사랑과 삶의 가치에 관한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들이 넓고 큰 시각으로 다뤄진다. 이러한 문학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4월 이후에 다가올 앞으로의 ‘다른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끝없이 확장시킬 수 있다.
특히나 대학생 신분으로 홀로 어린아이를 낳고 기르며 거침없이 핏빛 대열로 나서는 형주, 북에서 활약하는 남편을 둔 죄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강인하게 가족을 책임지는 소희, 집안 간에 약조된 정혼자보다 진실한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수미 등,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부활한 당대 여성들의 존재가 각별하고 반갑다.

“누가 적인데? 우리에게 적이 있다면 전쟁이야.”
[……]
“그리고 또한 현실을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이지.”
“내겐 그런 현실이 없어. 형제와 같은 동족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절실한 현실이 말야.”
(p. 352)

이렇게 오늘 하루가 인간의 생명을 잃어가며 숱한 기이한 얘기를 낳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제물로 바쳐진 목숨 위에 신화처럼 꽃을 피우고 있었다. (p. 387)

제물을 바쳐야 대가를 허락하는, 우리 민족사가 함께 걸어온 이 경로를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1960년 4월의 봄, 1980년의 봄, 1987년의 봄, 그리고 2017년의 봄에 이르기까지의 “봄의 역사”라 명명하고 있는바, 그 도정에서 『꽃과 제물』은 미완으로 열린 채 끝난 4월의 신화, 4월의 목숨들을 찬란히 부활시키고 있다. 오로지 문학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저 미학의 영역을, 놀라운 성취로서 증거하는 셈이다.
덧붙여, 작가의 친동생인 정희현 박사가 표지화를 그려 의미를 더했다. 김병익은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세세한 대조와 교정까지 일일이 챙겨보며 온전한 정본(定本)이 태어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 본문 중에서

 

형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준이 말했다.
아버지도 같이 오실까,
아니, 못 오실 거야,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하고 옥이 누나가 말했다.
왜 감옥에 갇혀 있는 거야, 아버지는 나쁜 사람인가,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야, 아버지를 잡아간 일본 사람이 나쁘지,
훌륭한 사람을 왜 잡아가,
일본 순사는 훌륭한 한국 사람을 다 잡아갔어,
그럼 우린 훌륭한 사람 안 되는 게 좋겠네,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형들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나무 그늘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여름날의 길고
긴 해가 기울어질 때, 현 형과 기철 형이 아범과 함께 집으로 돌
아왔다. (p. 107)

아, 망령들이여, 허깨비들이여, 세월이여, 강물이여, 그러나 만세를 부르다 젊어서 죽은 삼촌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라고 했다. [……] 민족은 천성이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을 피할 수가 없고, 그래서 별안간 저항의 꽃을 피우고 젊어서 죽어간 삼촌의 죽음은 끝난 게 아니라 영원히 시작이라고 했다. 그런데 준이 보지 못한 삼촌은 항상 열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삼촌은 영원히 열아홉 살로 살아 있을 것이다. 열아홉 살. 기철 형도 그랬다. 기철 형도 열아홉 나이로 그의 생을 끝맺고 있었다. 옥이 누나 역시 열아홉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는 현 형은, 아버지는, 그런데 그들을 끌고 간, 그들의 핏속에 영원히 지배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p. 118)

그러나 그동안 이 나라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애국자나 지도자는 어떠했던가. 그들은 민족의 분열 상태를 초래하면서까지 자기 주장과 자기 세력 확보에만 급급했고, 그들의 갈등 속에 정국은 날이 갈수록 더욱 혼란해져만 가고 있었다. 이 조국은 얼마 만에 되찾은 조국이냐, 이처럼 주어진 조국의 건국 앞에 배반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용서치 못했다. 욕된 과거는 과거로만 충분했다. 그리고 조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있는 윤, 그는 마땅히 조국이 용서치 못했다. 기철 그가 살아 있는 한 윤은 죽어야 했다. (p. 225~26)

“조국을 위해서라면.”
“조국이라고요? 어떤 조국 말예요? 자기가 없는 미래의 조국을 말예요?”
“그럴지 모르지, 미래의 조국이지, 허지만 차라리 미래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아.”
“그럼 미래도 없이 더욱 그런 일을 왜 해요?”
“현재가 그래야만 하니까, 현재에 살려면 미래도 동시에 살아야 하는지 모르지.” (p. 244)

목차


1. 반복

여름
2. 강물은


3. 슬픈 계절

여름
4. 혼탁한 시대


5. 다시 한 걸음

여름
6. 언제나 젊은이들은


7. 종말과 시초

발문 시대의 고통과 역사에의 열정 _김병익

작가 소개

정영현 지음

1940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여성동아』에 장편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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