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123호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8년 8월 31일 | ISBN 1227285X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62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가을호를 펴내며

만인의 미래와 역사의 연극

죽음은 만인의 미래다. 그런데 이 미래는, 특이하게도, 균일하지 않은 동시에 획일적인 성격을 가진다. 오직 예감할 수 있을 뿐 결코 실감할 수 없다는 점에서 획일적이지만, 모두가 각기 다른 삶을 살아냄으로써 대비하거나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균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의 죽음은 모두 다른 죽음인 셈이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눈에 비친 미래, 다른 이의 죽음으로 비스듬히 도래한 미래는 대체로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죽음”으로 어슴푸레 인식되고 그래서 곧바로 망각된다. 죽음에 대한 일양한 지각이 절대적으로 다양한 죽음을 압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 괴리로 인해 삶의 질서에는 어지러운 입체감이 부여되고, 다시 이 무질서 덕분에 혹은 때문에 수많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생이 그치듯 이야기도 끝난다, 언젠가는. 이야기 역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스스로의 죽음을 향해 펼쳐진다. 그러나 거의 모든 “또 하나의 이야기”는 모든 타인의 죽음처럼 그저 “그렇고 그렇게” 읽히고 잊힌다. 아니, 읽히면서 잊힌다. 혹은, 읽히는 순간 곧바로 잊힌다. 그렇게 독자는 이야기의 죽음을 삼키고 지나간다.
죽음은 작가의 미래다. 그런데 이 미래는, 당연하게도,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다른 모든 인간처럼 작가도 실제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며, 다른 모든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로 기억하고 구상함으로써 제 죽음을 거듭 연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수하다. 그러니까 모두의 죽음은 글쓰기 속에서 모두 고유한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읽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처럼 글쓰기로 구현되는 독특한 죽음이라 해도 하등 다를 게 없다. 그것은 없는 죽음, 한갓 “허구적으로” 매장된 죽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글쓰기의 죽음에 대한 둔중한 무관심은 절대적으로 고유한 죽음을 손쉽게 압살한다. 바로 이 압력으로 인해 문학의 질서에는 숨 막히는 기시감이 만연하게 되고 , 다시 이 피로감 때문에 수많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쉼 없이 사산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펜과 종이가 작가에게서 등을 돌리듯 쉼표와 마침표 역시 홀연 이야기를 떠난다. 짧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독자가 책장을 탁 하고 덮는 순간에 말이다. 인간처럼 이야기 역시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다. 마치 목숨처럼 이야기는 느닷없이 끊어진다. 그렇게 독자는 죽음의 이야기를 만들며 무심코 지나간다.
영원한 미래는 죽음의 죽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미래는 인간과 작가와 독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한 미래는 다만 이야기의 몫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독자가 읽는 순간 이야기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게다가,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 부활이 영원한 미래로 이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영원한 미래가 죽음에 비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죽음을 죽일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며, 혹여 있다 해도 그것이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 필연성은, 말하자면,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또한 이야기는 불가피하게 특정한 죽음에게 특권을 주게 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바로 이 특권이 이야기하기. 글쓰기를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위로 만든다. 이야기를 읽는 모든 독자는 바로 이 정치성에 직면하여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 특권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저항할 것인가. 그러나 이야기의 특권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또 다른 이야기를 쓰는 것뿐이다.
지난여름 우리는 작가와 정치인 그리고 비평가의 죽음을 나란히 목도했다. 저명인사의 죽음을 두고 우리는 흔히 “또 한 시대가 저문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경우 저물어간 한 시대는 세 곱절 이상의 구체적인 파문을 남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 세 사람의 업적과 유산이 비교를 불허할 만큼 혹은 시공을 초월할 만큼 위대하거나 경이롭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역사와 싸운 그들의 기록이 말하자면 “역사 이후”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숙제로 남겨진 까닭이다. 무릇 역사는 언어로써 빚어지고 또 부서지는 것일진대, 언어를 조감하고 조립하며 조탁하는 일이 이제는 너무 쉽고 우습고 하찮은 일이 되어버린 탓에 더 이상 역사가 역사로서 씌어질 수 없게 된 상황인 까닭이다. 언어가 지면에 새겨져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 인쇄량과 출판 부수가 더 늘어날수록 그 가능성은 줄어든다. 너무 많아서 읽을 수 없고 또 읽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더 이상 언어는 역사의 연극을 연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을 버린 정치인의 이념과 작가의 이상과 비평가의 이해는 먼지 낀 소품실에 안치 혹은 방치될 확률이 높다고 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활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품과 배우가 필요하다.
작품은 제대로 씌어져야 하고, 배우는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무대에는 죽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없는 연극이라 해도 죽음이 출연하게 되면 무궁한 장면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잘 연출된 역사.극은 죽음과 영원한 미래를 함께 아우를 수 있다. 비록 그 장면이 덧없는 순간처럼 지나간다 해도 말이다. 관객이 적으면 적을수록 이 연극은 더욱 장엄해질 것이다. “역사 이후”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역사. 극은 지나간 세대의 모든 죽음을 추도하는 제의도, 다가올 세대의 모든 이야기를 예언하는 축제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언어의 죽음을 연습하는 리허설이다. 침묵과 탄식과 암구호(暗口號)가 그 무대를 장악할 것이다. 장광설과 낚시 기사와 판결문이 공연을 방해할 것이다. 아마도 관객은 경악하고 경멸하며 자리를 뜰 것이고 또한 배우는 소진되어 끝내 탈주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만 작품만은 끝내 잔존할 것이다. 바로 이런 작품을 기다리고 기획하는 일이 『문학과사회 하이픈』이 스스로 설정한 과제이며 또한 목표다. 이를 향한 또 한 번의 노력인 가을호 하이픈의 주제는 “발생.흐름”이다. 젊은 시인 문보영, 백은선, 안태운, 안미옥, 장수진의 시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편집동인 김신식을 비롯하여 비평가 박상수, 안서현, 안지영, 장은정이 구체적으로 살펴주었고, 젊은 소설가 이주란, 강화길, 양선형, 김봉곤, 임현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젊은 비평가 선우은실, 신샛별, 윤재민, 인아영, 한영인이 비판적으로 개입해주었다. 본권에는 작고한 최인훈 선생을 추모하는 특집을 마련하여 김병익, 김주연, 방민호의 추모사와 이진명의 추모시, 유가족 최윤구, 최윤경의 산문, 그리고 비평가 우찬제와 김영찬의 비평 논문을 게재했다. 또한 이청준 선생 타계 10주년을 기념하여 비평가 이소연이 새로운 이청준론을 선보였다. 독자들은 또한 박상순, 김민정, 오은, 강성은, 김승일, 백은선, 안미린, 배수연의 시와 윤대녕, 조해진, 한정현, 한유주의 소설을 만날 수 있다. 이장욱의 장편 연재 「밤과 미래의 연인들」은 이번 호로 마무리된다.
편집동인으로 함께 일하던 금정연 , 황예인이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계속해서 『문학과사회』의 애독자로 함께해주기를 바라며, 그들의 앞날이 크게 번창하길 기원한다. 비평가 김형중이 다시 동인으로 합류하여 이들의 공백을 메워주기로 하였다. 2000년 이후 가장 활발하고 열정적인 현장비평가의 공력이 십분 발휘될 것을 기대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독자 제현의 질정과 격려를 동시에 구하며 매호 더욱 열심히 고민할 것을 약속드린다.

편집동인 조효원

하이픈 보기 -> http://moonji.com/book/16897/

목차

가을호를 펴내며


박상순 망치 같은 이별이었음 외 1편
김민정 철규의 감자 외 1편
오은 그것 외 1편
강성은 그것 외 1편
김승일 기계가 없으면 불안하다 외 1편
백은선 비천의 형식 외 1편
안미린 영혼의 구조 외 1편
배수연 곰에서 왕으로 1 외 1편

소설
윤대녕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
조해진 환한 나무 꼭대기
한정현 괴수 아키코
한유주 낯선 장소에 세 사람이
이장욱 밤과 미래의 연인들 [마지막회]

리뷰
오연경 당신, 사소한 것들의 신
서영인 어떤 마음의 궤적
정주아 믿는 것과 믿기로 한 것
최진석 이웃, 그 신성하고도 섬뜩한 이야기

故 최인훈 추모 특집
김병익 최인훈 선생님, 훨훨 날아오르소서
김주연 철학을 담은 문학의 깊은 바다
방민호 빛나는, 오연한, 고독한 항해사
이진명 여기 살아 있는 게 있다, 뭐냐?
최윤구 최윤경 유족 인사
우찬제 분단 상황의 초극을 위한 ‘문화형’ 문학의 발명
김영찬 분단시대 드라큘라의 꿈

故 이청준 10주기 추모 특집
이소연 낮은 기억의 뭍에서 가파른 망각의 하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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