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에서의 하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515

김선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8년 7월 26일 | ISBN 9788932034522

사양 변형판 128x205 · 144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기척 없이 기적 없이 일상에 스미는 움직임
마음의 자취를 새기는 위상기하학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재의 두번째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문학과지성사, 2018)가 출간되었다. 첫 시집 『얼룩의 탄생』에서 흐리마리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상실의 슬픔을 담담하게 기억해냈던 김선재는 소설집(『그녀가 보인다』), 연작소설집(『어디에도 어디서도』), 장편소설(『내 이름은 술래』) 등 여러 소설을 선보이며 ‘기억’과 ‘관계’를 미학적으로 풀어냈다는 평가 또한 받아왔다. 감각적인 문장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쓰는 사람’으로서의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준 김선재는, 이번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를 펴내며 또 다른 도약을 보여줄 채비를 마쳤다.


구석에서부터 타전된 작고 분명한 진동

 

갈 곳이 없을 때마다 위와 아래를 바꿨지만 여전히 위와 아래는 자랐다 누군가 빠져나가면 누군가 들어오고 고개를 흔들수록 선명해지는 그늘
– 「철봉」 부분

첫 시집이 불분명한 기억 속의 슬픔과 재회하는 과정을 담았다면, 두번째 시집은 일상을 미세하게 진동시키는, 마음의 한구석에서부터 전해져온 감정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처연하지만 담담하게 우울을 응시하는 시적 태도가 유지되면서도, 이번 『목성에서의 하루』는 표현의 절제와 언어의 조직을 통해 가닿고자 하는 감정의 공간을 좀더 자유자재로 변주한다. 특히 경계를 지시하는 시어들을 빈번하게 등장시키며 이 효과를 증폭시키는데,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시집 해설에서 이를 물리적‧심리적 위치와 연결 방식의 변형을 통해 마음의 궤적을 추적하는 ‘위상기하학’이라고 명명하며 경계와 관련한 시어들이 기능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안과 바깥, 위와 아래라는 물적·심적 ‘방위사(方位辭)’들이 시집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공간의 규모를 수시로 조절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지평선, 해안선, 테두리, 가장자리, 모퉁이, 구석 등이 심리적 변경의 수축과 확장을 주관하고 있다.”


가도 가도 덥고 슬픈 꿈은 계속될까

 

가도 가도 여름이었죠. 흩어지려 할 때마다 구름은 몸을 바꾸고 풀들은 바라는 쪽으로 자라요. 누군가 길을 묻는다면 한꺼번에 쏟아질 수도 있겠죠. 쉼표를 흘려도 순서는 바뀌지 않으니까. 곁에는 꿈이니까 괜찮은 사람들. 괄호 속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 잎사귀처럼 바닥을 굴러 몸을 만들면, 바람을 숨긴 새처럼 마디를 꺾으면, 안은 분명할까요. 뼛속을 다 비우면, 바깥은 안이 될까요. 아직 가도 가도 어둠이에요.
– 「열대야」 부분

감정의 공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한다고 해도 마음의 자취를 좇는 일은 만만치 않다. 서시 「열대야」의 맨 첫 문장에 놓인 “가도 가도 여름”이라는 표현은 한계에 부딪친 상황 속에서의 힘겨운 모색을 잘 보여준다. “쉼표를 흘려도” “바닥을 뒤집어도” 혹은 “마디를 꺾”거나 “뼛속을 다 비”워도 순서는, 안과 밖은, 어둠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만 같다. “창문이 정지하고 안은 쏟아진다 쏟아지는 안을 닫을 길이 없다 그곳에 닿을 길이 없다”(「한낮에 한낮이」)라거나 “갈 곳이 없을 때마다 위와 아래를 바꿨지만 여전히 위와 아래는 자랐다 누군가 빠져나가면 누군가 들어오고 고개를 흔들수록 선명해지는 그늘”(「철봉」)에서 보이듯, 마치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사방의 경계가 무너지고 전복되는 와중에도 실패는 반복되고 모색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오늘을 밀고 가는 힘, “내일은 다시없는 사람들이 되어요”

 

무한의 방 그 방의 구석, 구석의 한가운데 앉아 있다. 주위에는 무수한 창. 창은 풍경을 되비추지 않는다. 다만 어떤 예감이 되어 지나갈 뿐. 흰 물방울이 흐를 뿐. 버려진 공처럼 구를 뿐. 그러니 점이 되기로 한다. 잠잠히 점이 되기로 하자. 어제 지운 상처와 내일의 상처 사이에서.

때로 사람의 기록과 사랑의 기록 사이에 갇힌다. 기억은 종종 기억을 버리고 기록이 되는 쪽을 택한다. 나는 기록을 지우는 사람. 지워지는 사람. 서쪽의 구름처럼 모여드는 이름을 되뇌는 사람. 어떤 겨움의 겹은 계단처럼 희다. 셀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부드럽고 고소하게, 고소하고 따뜻하게.

[……]

마지막 계단에서 처음의 계단을 향해
기록되지 않은 사실에서
기록을 버린 기억 쪽으로

기적 없이 나는 잘 살고 있다.
– 「희고 차고 어두운 것」 부분

방은 한정된 공간이지만 공에게는 넉넉한 공간이 되고, 점에게는 거의 거의 무한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어제 지운 상처와 내일의 상처 사이에서” 내밀해지면서 무한을 얻는 법을 알아간다는 점이다. 어제와 오늘이 상처만을 통로로 지닌다면 누구에게도 넓고 따뜻한 방이 주어질 수 없겠지만, 상처와 상처 사이가 무한이 되는 변환을 통해 “겨움의 겹”을 “부드럽고 고소하게, 고소하고 따뜻하게” 발표시키는 효소가 첨가될 수 있다. ‘기억’과 ‘기록’ 사이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방, 그 한구석을 멀리멀리 확장해나가는 힘, 그 꾸준한 저력이 도드라진다.

젖은 바깥이 안이 되는
거기에는
내가 있고 내 뒤에는
바닥없는 당신이 있어서
기척 없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도
내일은

사람이 되어요
다시없는,
사람들이 되어요
– 「머리 위의 바람」 부분

막혀 있던 구석이 또 다른 밖을 향하는 하나의 경계로 다시 설 때, 우리는 다시없는 사람으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오늘 닿은 “여기도 거기는 아니”(「십일월」)겠지만, 당신과 나는 또 “겨우 어긋나”(「거리의 탄생」)겠지만, 그렇게 시로써 나아가면서 내일의 상처와 삶, 사랑을 만날 것이다. 김선재는 시인으로서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미묘한 감정의 경계를 더듬으며 마음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 본문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은 벌써 이렇게 했다는 말일까

과거에 일어난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이를테면 어디서나 달려오는 자전거나 어떻게든 헤어지는 사람들 미끄러지는 사람들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필요 없는 일들이 필요한 날이 있다

풍선처럼
풍선을 부는 일처럼

바람은 바람의 의지일까 지구의 의지일까 우리의 의지일까 풍선만큼 줄어들며 생각했다 잠이 든 새를 대신해서 생각했다 누군가 있는 힘껏 옆구리를 꼬집을 때까지 대신 살고 대신 웃었다

돌아오면
탁자 위에는
반쪽만 남은 사과

화투 점을 치는 엄마는 자주 뒤집혀서 입을 다 닦고서야 나갔고
우리는 닦아도 닦이지 않는 검버섯처럼 아무렇게나 피었다

그러면 못쓴다는 말은 이미 못쓰게 됐다는 말이다

하루아침에
다른 얼굴이 되어

각자의 주름 사이로 몸을 숨기고

검게 그을렸다
– 「오늘 하루 무사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문

사탕이 녹는 동안, 한 세상이 지나간다. 오래된 표지를 넘기면 시작되는 결말. 너는 그것을 예정된 끝이라고 말하고 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옮긴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사람들. 멀리 있는 사람들. 그것이 인생이라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 새롭지는 않았으나 아는 노래도 아니었다. 다만 열꽃을 꽃이라 믿던 날들을 돌이키며 각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뿐. 후회와 미련에 붉은 줄을 그어놓고 오늘도 어디선가 새는 울겠지. 내일도 어디선가 새는 새로 울 거야. 흔들리는 시선이 고요해질 때까지 우리는 몸을 낮추고 눈을 낮추고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끝의 시작은 보는 것. 본 것을 읽는 것. 읽은 것을 잊는 것. 잊은 것을 다시 잊는 것. 이제 우리 앞에는 흰 종이가 놓여 있다. 검은 물이 흘러나오는. 천천히 낡아가는.

개미가 줄지어 간다 녹아버린 사탕을 끌고

마지막까지 마지막을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든 어디로든
– 「사탕이 녹는 동안」 전문

지난밤은 하얗고 지날 하루는 길어요
넘어질 때마다
벽이 되는 상상을 하죠
자라지 말고
울지도 말고
단단하게
절벽처럼 단단하게
젖어도 흐르지 않아서
무너져도 아프지 않을
꿈에는,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꿈에는,
엄마와 당신이,
본 적 없는 엄마와 외로운 줄 모르고 외로운 당신이
마른 얼굴을 닦아줄 때
슬픈 얼굴을 쓸어줄 때
서로의 그늘이 되고
그늘이 그늘로 짙어져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제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옛날의 마음

웅크렸던 새들이 날아올라요
하나인 것처럼
둘인 것처럼
빛이 퍼져나가듯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듯
잎들이 흔들리는 거기에는
어깨와 어깨가 모여들어
젖은 바깥이 안이 되는
거기에는
내가 있고 내 뒤에는
바닥없는 당신이 있어서
기척 없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도
내일은

사람이 되어요
다시없는,
사람들이 되어요
– 「머리 위의 바람」 부분

 

 

■ 추천의 말

이 시집은 자신의 자취를 조정하는 내밀한 방에 비견되며, 변화무쌍한 자취를 조율하는 시어는 안과 바깥, 위와 아래라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방위사方位辭’들이 시집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공간의 규모를 수시로 조절한다. “유머가 된 사랑”이나 “추억이 된 혁명”과 같은 소문과 비밀 들이 영토 확장에 따라 하강과 상승을 거듭하는 세계들의 기저에 기입되고 그것은 이따금 일상적 지각에 기별을 전해온다. 마음의 모양을 결정하던 사람과 사실과 사태와 사랑이 모두 해가 기우는 쪽 어딘가로 옮겨지고 이제 그것은 변경을 밀고 가는 이에게는 무한이 될 “지상의 영토 끝까지” 동행한다. 덤덤하고 수일하며 수일하고 덤덤한데 어쩌면 이리도 처연하랴…… – 조강석 (문학평론가)

 

■ 뒤표지 글

숲이 흔들리면 바람이 된다
바람이 된 숲으로 들어가면
낯선 바람 없이도
기다릴 줄 알게 된다

아무것도
아무려나
어떻게든

나무를 열고 들어간다

열어둔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열대야/백白/부정사/담장의 의지/한낮에 한낮이/하지/오늘 하루 무사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서쪽으로 난 창이 있는 집/사실과 취향/거리의 탄생/그날 이후/우리는 누군가가 되어/모임/방의 미래/눈사람/열리는 입/반성의 시간/한낮의 독서/관계 후의 자세

2부
목성에서의 하루/가벼운 나날/사탕이 녹는 동안/순서/꿈의 서사/평면 위에서/달리기/남은 것과 남을 것/Biei/적선동/밤의 동물원/그곳/희고 차고 어두운 것/남아 있는 부사/그린란드/흔들리는 노래/바람이 우리를/이상한 계절/없어요

3부
중얼거리는 나무/뜀틀/철봉/오늘의 기분/십일월/새가 새로/1인용 식탁/전날의 산책/언덕들은 모른다/믿음/주말의 영화/언젠가의 석양/큰 새/구석의 세계/어떤 날의 사과/머리 위의 바람

해설
구석으로부터의 타전・조강석 125

작가 소개

김선재 지음

통영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2006년 『실천문학』에 소설을, 2007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 『얼룩의 탄생』,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연작소설집 『어디에도 어디서도』, 장편소설 『내 이름은 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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