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조경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8년 6월 8일 | ISBN 9788932031064

사양 변형판 125x192 · 274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동인문학상 · 현대문학상 수상 작가 조경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5년간의 여정

 

조경란의 일곱번째 소설집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일요일의 철학』 이후 단편소설집으로는 5년 만이다. 조경란은 1996년 등단 이후, 그간 여섯 권의 소설집을 포함해 총 열다섯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며, 한국의 대표 중견 작가로서의 자리를 지켜왔다.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진 이번 책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한 문장과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고백 조의 어조를 통해 작가가 지난 4년여의 시간 동안 고민해온 삶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수록 작품 중 다수에서 사람 사이의 시작되는 작은 변화들이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풀어내며, 개인과 타인의 문제를 각자의 삶과 연결해낸다. 더불어 조경란이 지속적으로 다뤄온 가족의 형태에 관한 문제를 섬세하게 파고드는 탐구 의식 역시 이번 소설집에서 이어진다. 온전히 나로서의 나, 가족 속의 나, 혹은 사회 속의 나 등 수많은 개인 ‘나’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해당할 수도 있는 소설 속 삶의 여러 모습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작가는 ‘어떻게’에 짓눌려 그 한 걸음을 망설이는 이들의 등을 가볍게 떠밀어주는 듯하다. 목적지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대신 그저 걸으라고, 이미 그것만으로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고. 목적지를 몰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속아왔던 과거가 떠내려간다. _황예인(문학평론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자리, 광장
아주 작은 인연이 모이고 모여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곳

 

고개를 내저으면서 훈은 노란 불빛을 따라 걸었다. 어른이 되는 시점 같은 건 분명하게 알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그저 하루를, 지금 여기를 통과하고 내일과 그 후의 날들을 통과할 수 있을 뿐이라고. 어떤 슬픔과 어떤 실망을 통과해나갈 수밖에 없듯. 그렇게 말하면 애늙은이였다던 찬은 알아들었을 거라고, 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결집된 인파 속에 홀로 서 있었다. (「11월 30일」, pp. 60~61)

광장,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 혹은 시시때때로 지나치는 곳. 어느 도시에 가든 우리는 곧잘 광장을 통과하곤 한다. 아주 새로운 도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도시에서도 광장의 모습은 그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 따라 같다가도 다르다. 조경란의 이번 소설집에서 광장의 이러한 특성은 작품 곳곳에 자리한다. 19년 동안 같은 일을 해온 ‘그녀’는 낯선 도시의 광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거리음악가를 만나고(「매일 건강과 시」), 작가 ‘나’는 로마의 수많은 광장들을 엄마와 함께 걸어 다닌다(「492번을 타고」).
그중에서도 「11월 30일」 속 주인공 ‘훈’이 머무는 ‘광장’은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며, 광장의 의미를 좀더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훈은 “미래를 위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사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다. 지하철역 앞에서 미키마우스 탈을 쓰고 어학원 홍보 일을 하는 훈에게 지하철역 앞의 공간은 엄청난 사람들이 오가는 동네의 광장이자, 스스로를 노출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심부름차 한 농장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미처 광화문에서 환승하지 못한 채 버스에서 내리게 되고 떠밀리듯 훈은 집회 무리에 섞이게 된다. 도심 집회 행진을 위해 모인 많은 인파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기 어렵지만 훈은 그저 “지금 여기를 통과하”는 데에 집중한다. 앞선 지하철역 앞의 광장에서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각자의 목적을 갖고 그저 ‘유동’하고 있었다면, 여기서의 광장에서는 “밀고 나가야 해요”라는 시위 참가자의 말처럼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각기 다른 곳에서 모인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곳에서 훈 역시 미키마우스 탈을 벗은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한 장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을 지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다. 마치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한 발 내딛는 일뿐이라는 듯이.
도심 집회와 촛불, 광화문, 인파 등의 키워드는 우리로 하여금 2016년 많은 사람들을 결집시켰던 집회 현장을 연상케 하면서 그 안에 우리를 그리고, 청년 ‘훈’을 떠올려보게 한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 생활하던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공개된 장소에서 공개된 모습으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서로 하나의 거대한 무리가 될 수 있는, 서로에게 서로가 힘이 될 수 있는 희미하지만 거대한 공동체를 상상해볼 수 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따로 또 같이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말이다. 결집된 무리를 지나 개방된 길에서 훈은 소리 내어 말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 오늘이 말해주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는 내, 내 내일이 말하게 하라.” 미래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살고, 내일은 내일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훈의 말은 결국 작가 조경란이 좀더 나은 내일을 위해 매일매일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지지가 아닐까.


쌓이고 쌓였던 말들이 더듬더듬 풀려나오기 시작할 때
나의 삶은 달라지고, 우리의 삶은 연결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공간에 단순히 모여 있는 것만으로는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모여 있다는 것은 그저 모여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 유리문을 열고 신발을 찾아 신으면서 나는 경아가 시장 왔다가 들러봤다는 말을 어떻게 질문으로 할지 궁금했다. 경아가 질문하면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해버린다는 걸 이제는 그 애도 알 거다. 벤치 뒤 성긴 숲에서 매미 소리가 울렸고 내가 옆에 앉자 경아가 무덤덤한 소리로 물었다.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p. 84)

서른일곱 살의 ‘나’는 ‘아버지’의 양자이다. 나는 “친구도 없고 누구를 깊이 사귀어본 경험도 없지만 부모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 아버지에 따르면 “다른 집”에서 온 사람이 바로 ‘나’다. 그리고 두 남자의 집에 새로운 가사도우미 ‘경아’가 찾아온다. 경아는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나에게 경아는 “가시 없는 저 늙은 오이로 요리를 할 줄 아는 젊은 여자애”, 무엇보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내 삶에 성큼 들어온 사람이다. 경아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면 나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를 경아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경아의 질문들.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경아의 등장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나와 아버지, 그리고 경아, 이 세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는 사이, 즉 가족으로 발전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말’이다.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고리로서의 말은 이 소설집 내에서 매우 일상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짧은 문장들로 시를 쓰는 그녀(「매일 건강과 시」), 김진희라는 여자아이에게 전하는 정미의 말(「김진희를 몰랐다」), 선생님과 자신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더듬더듬 털어놓는 남자(「봄의 피안」), 오랜 이별을 앞두고 미처 얼굴을 보고 하기는 힘든 이야기를 서간체로 풀어내는 남자(「오랜 이별을 생각함」) 등 작가는 마음에만 머물던 자신의 이야기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즉 말을 건네는 행위, 말이 시작되는 순간의 너와 나의 관계성은 조경란의 이번 소설집이 계속해서 주목하는 것이다. 그간 작가의 소설에서 말은 군더더기 없고 매우 정돈된 형태와 정확한 단어들로 신중하게 씌어졌음을 상기해볼 때 일상적인 대화 하나하나일지라도 작가가 일상의 문장들에 얼마나 큰 무게를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표제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경아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태풍과 홍수로 떠내려가는 집에서 구조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헬리콥터에서 내려온 밧줄이 한 명 한 명을 다시 생(生)으로 끌어당길 때 그렇게 연결됨으로써 그들에게 또 다른 내일이 주어졌듯이, “떳떳하지 못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던 나에게도 작은 일상이 모여 만들어진 이들과의 관계는 나를 구해내는 끈처럼 작용하며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게 한다. 어쩌면 우리를 잇는 말들은 거창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일상적인 안부 인사, 서로를 향한 관심 어린 질문 하나하나에서 시작된 서로의 이야기, 이런 ‘말’들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최초의 점이 아닐까. 아주 작은 말들에서 시작된 대화가 우리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따로 또 같이 오늘을 통과할 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세번째 일이 앞의 두 일보다 크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순종해버리고 지나갈 수 없는 일이었다. 대개의, 앞날이나 미래에 관해 짐작하게 하는 일들처럼. 시인이 되겠다거나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지만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한 명이라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싶다는 바람같이 혼자 애를 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최소한의 반경만을 오가던 그녀는 마흔이 되기 전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B에 관한 마지막 소식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찾아온, 그녀가 한 결심을 부추기려는 속삭임 같았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자신에게 그런 힘이 된다는 걸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이전처럼은 살 수도 없었다. _「매일 건강과 시」

그녀가 듣고 보고 말한 것들. 편지도 시도 아닌 그저 문장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시와 비슷한 것을 쓰게 될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을지 몰랐다. 그것이 길을 잃는 것과 비슷하다면 잠시 한 번 크게 돌아가는 것일 뿐, 살고 있으면 지금보다는 가까이 가 닿게 될 거라고.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B였는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이 오고 있는데 모든 것이 희미해지려고 했다. 이 방학의 마지막 순간은 그랬다. 그녀는 돌아서서 나머지 짐을 꾸렸고 그리고 자신이 쓴 그 몇 개의 문장들도 가방에 담았다. _「매일 건강과 시」

우리는 침묵했다. 너는 고개를 더 숙였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덮어버려서 너는 그 속으로 숨어버린 듯싶었다. 우리는 다시 시장 쪽으로 걸었다. 나는 너의 또래 친구가 될 수 없고 너는 밤의 산책이 언제까지나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이 옳지 않다고. 너도 그 밤에 다 알아버렸을 거다. 그렇지, 진희야. _「김진희를 몰랐다」

지루해졌는지 남자가 다시 와인 한 잔을 따라주곤 차오, 하고 옆 테이블로 돌아갔다. 이런 밤도 한 번뿐인데요 쌤. 아쉬운 기색으로 남자를 눈으로 좇던 안 선생이 말했다. 어떤 밤요? 쌤, 저랑 할까요? 이야기. 어떤, 이야기요? 이 순간에 대해서. _「492번을 타고」

제 삶을 뚫어지게 응시해봤자 돌아오는 건 역시 후회와 숨을 데가 없다는 사실뿐이더군요. 그 숨을 곳이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정직한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_「봄의 피안」

목차

매일 건강과 시
11월 30일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오랜 이별을 생각함
김진희를 몰랐다
492번을 타고
봄의 피안
저수하(樗樹下)에서

해설|기억에 없지만 잊고 싶지 않다는 말 _황예인

작가 소개

조경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불란서 안경원」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일요일의 철학』, 중편소설로 『움직임』, 장편소설로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혀』 『복어』, 짧은 소설집으로 『후후후의 숲』, 산문집으로 『조경란의 악어이야기』 『백화점—그리고 사물ㆍ세계ㆍ사람』 등을 펴냈다. 문학동네작가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동인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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