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 시인선 508

유희경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8년 4월 6일 | ISBN 9788932030920

사양 변형판 128x205 · 134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세계의 일면을 적확하게 포착한 시어
“나는 말한다, 당신이 있다”

 

유희경의 새로운 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문학과지성사, 2018)이 출간되었다.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 2011),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아침달, 2017) 이후 쓰고 고친 66편의 시가 오롯이 담겼다. 이전 시집에서 탄생과 죽음의 시간을 넘나들며 형용 불가능한 감정을 정제해 보였던 유희경은 이번 시집에서 그 불가능성을 고스란히 수용한다.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과 관계의 불능성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이다. 시인은 한순간 분명하게 나타나 감미로운 전율을 주지만, 그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감각적 체험을 예민하게 포착, 적확하게 묘사해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우리가 놓쳐버리기 십상인 세계의 일면들을 시인 고유의 감각으로 섬세하게 풀어낸 결과이다. 일상적인 풍경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가능성과 그 장면들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의 의미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3부로 구성된다. 각 부의 첫 시 제목은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Ⅰ,Ⅱ),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Ⅲ)이다. 이 중에서 시집 제목이자 맨 앞에 놓인 시편을 살펴봄으로써 ‘신’의 정체를 가늠해볼 수 있다. 여기서 신은 ‘당신’이라는 이인칭으로 호명된다.

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부분

시인은 “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명명한다. 빛이 부재하는 순간, 즉 가시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순간에만 대상이 나타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듯 유희경에게 당신은 부재라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역설적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존재는 인칭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당신이 궁금하다
창틀의 형식을 데리고 온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
혹시, 이름을 벗었는가
그게 처음이었는가
[……]
당신이 젖었는지 웃었는지
그런 질문은 쓸모가 없다
당신은 생겨나는 물건이다
―「질문」 부분

이름을 벗은 당신은 호명 가능한 대상을 넘어선다. 나의 질문과 무관하게 생겨나는 당신은 (당)신으로 확장된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로서 (당)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대상의 비가시성과 불분명성으로 인해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 이 ‘나타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대상이 바로 시적 발화를 가능케 하는 결핍이자, 결코 메워지지 않는 세계의 균열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건넨다 이것이 그것으로 되길 바란다”(「가벼운 돌」). 유희경은 무구하며 무한한 마음으로 (당)신을 향한 시를 쓴다.


모름과 앎의 경계에서

 

유희경의 시는 대부분 일인칭 화자의 독백 형식을 띤다. 발견되는 화자의 특징으로는 ‘알 수 없음’을 꼽을 수 있다. 다수의 시편에서 시인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제”(「지난날의 우주와 사다리와」),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단어」), “어디가 아프냐고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르고 있어요”(「생활」)라고 쓴다.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이렇듯 시인은 머뭇거리는 방식으로, 즉 자신의 이야기에서 거듭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발화한다. 요컨대 유희경의 시는 ‘모름에 대한 앎의 기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아이에 대해 쓰는 시는 앞을 보지 못한다 우묵한 저물녘 아이가 길을 배워가는 그런 시를 나는 쓰고 있다 [……]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라고 적은 문장은 지우기로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조마조마하다 [……]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무사」 부분

모름에 대한 앎은 (당)신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이 품는 불확실에 관한 확신은 맹목의 순간에만 가시성을 띠는 (당)신에 대한 인식과도 상통하기 때문이다. 유희경은 이 알 수 없음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순간들을 발굴하고, 그에 맞는 언어를 찾기 위해 고투한다. 끝내 도달할 수 없겠지만 그 불가능성을 향해 부단한 열망으로 시를 쓴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바로 그러한 시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풀어쓴 기록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느꼈으나 곱씹어보지 않았을 뿐인 감정에 관한, 보이진 않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가능성의 세계에 관한 탐구이다.


 

■ 추천의 말

 

유희경의 시는 이 세계의 다른 면을 그리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발견해낸다. 이것은 현실과는 무관한 세계에 대한 상상이 아니다. 시가 현실의 한 풍경을 새로운 방법으로 풀어낼 때, 그 일은 이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는 작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표정, 지나가는 말투, 그 순간 불어온 바람의 방향 같은 것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장면까지 심혈을 기울여 되새겨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일을 거듭 적확한 말로 들려주기란 더욱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려는 자의 고투가 거듭될 때, 결코 맺어지지 않고 시작되기만 하는 이야기가 씌어질 때 우리는 이 세계에 시가 필요한 이유를 계속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_김나영(문학평론가)

 

■ 시집 속으로

 

같이 앉아서 양손을 감추고
참 오래된 것 같네, 하고는
어둑해지는 두 사람의 시간이
한 사람의 사물로 변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만지고 또 만져본다
―「직선의 소리」 부분

 

계절은 밑동만 남긴 채 쓰러져버리고 잠마다 꿈마다 구멍이 뚫린 그것을 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소리를 내며 쓰러졌지만, 아직 아무 때도 아니었다 너의 이름을 썼다가 지운 자리마다 나무가 자라고 빽빽한 울음들이 가득했으나 아직 아무 때도 아니었다 지난 염소들은 말뚝으로 남았다 별만이 별을 삼킨다 그래도
―「벌목」 부분

 

수십 겹 덧대진 것들의 운명처럼 이런 아침은 반복된다 투명의 속으로 누가 손을 밀어 넣고 있다
―「아침」 부분

 

■ 뒤표지 글

 

알고 있었니 하고 물으면
누가 그러면,
몰랐다 대답하고 싶어진다.
그러고 나면
요란하게 닫힌 문의 안쪽처럼
정말 모르는 일이 되는 세계
모르는 세계의 힘없는 규범

지금 나는
뒤늦게 알아버린 사람처럼
후회를 뒤적거리는 중이다.
실은 몰랐으면서.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몰랐다고 대답하고 싶어 하면서.

오늘은 천사 같은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한 개만 사 주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오늘 정오의 일이다.

 

■ 시인의 말

 

나타나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는
우리들의 옛 마음에게

2018년 3월
유희경

목차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좋은 것 커다란 것 잊고 있던 어떤 것/봄밤, 참담/脫喪/합정동/지난날의 우주와 사다리와/사월/빈집/사월/조금 더 따뜻한 쪽으로/옷을 갈아입는 시간/사랑/얼룩/잠든 사이/새장/섬/조항/질문/어깨가 넓은 사람/무사/농담/가벼운 돌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폭우/主人/한낮/지옥/작은 일들/시를 읽는 시간/단어/음악을 가둔 방/MILK/안과 밖/여름 팔월/늦고 흔한 오후/장마/놀라운 지시/너의 사물/나의 처음에/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붉고 흐리고 빠른/가벼운 풍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겹겹, 겹겹의/작가/긴 밤/아무 일도/남아 있다/축복/상자/볕이 많은 골목/한겨울/그늘/잊어버린 이야기/직선의 소리/社員/새처럼 용수철처럼 일요일처럼/생활/벌목/공포/마음/內裏/到着/소식/아침/봄

해설
잠시 당신이 있던 풍경이 말해주는 것 ‧ 김나영

작가 소개

유희경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이 있다. ‘작란’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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