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오칠언절구

두보 지음 | 강민호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8년 3월 26일 | ISBN 9788932030876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16쪽 | 가격 14,000원

책소개

“말[語]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쉬지 않겠다”

 

거침없는 시어, 직설적인 표현
자신만의 개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성(詩聖) 두보의 시정신이 담긴 절구 138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절구 138수를 엮은 『두보 오칠언절구(杜甫五七言絶句)』(대산세계문학총서148)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한시(漢詩)에서 가장 짧은 양식인 4구로 이루어진 절구(絶句)는 그윽한 멋과 운치가 느껴지는 시체(詩體)이다. 그러나 중국 최고의 시인인 두보(杜甫)의 절구를 감상할 때에는 이런 기대를 버리는 것이 좋다. 두보의 절구는 대체적으로 떫고 거칠다. 굳이 그윽한 운치를 추구하려 하지 않고 마구 울부짖으며 자신의 감정과 사회 현실을 노래했다. 전아한 울림을 추구하는 당시의 풍조에서 두보의 거칠고 새로운 노래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의 이면에는 자신만의 개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두보의 시정신이 깔려 있다.
절구는 대중가요의 가사에 가까운데, 유행과 인기에 따라 보편적인 정서를 따르다 보니 다루는 제재가 한정되고 방식도 유형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두보는 굳어진 유형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비록 당대의 인기는 얻지 못했을지언정 두보의 절구는 송대의 시가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한시의 세계를 확장했다. 두보의 절구를 보면 두보와 한시에 대한 이해가 더 폭넓어질 것이다.

“두보의 절구는 종횡무진 거침이 없는 것이 많으며, 의론으로 흉금을 펴는 데 능하다. 기풍이나 재주, 정취가 일반적인 시의 정조와는 아주 다르다.” _ 구조오(仇兆鰲), 『두시상주(杜詩詳註)』


 

실패한 노래, 두보의 절구

 

포기룡(浦龍)의 『독두심해(讀杜心解)』를 기준으로 헤아리면 두보의 절구는 오언절구(五言絶句) 31수, 칠언절구(七言絶句) 107수로 총 138수인데, 이는 당시까지의 시인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이다. 두보는 여러 시체에 능했는데 특히 율시(律詩)의 격률을 완숙하게 구사하였고 고시(古詩)도 탁월했으나, 유독 절구(絶句)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두보의 절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두보의 칠언절구는 다 변체이며, [……] 대부분 법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예원치언(藝苑巵言)』), “두보의 절구는 가슴속의 생각을 곧바로 펴내었으니 자연 대가의 풍도가 있다. 그러나 정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당시별재(唐詩別裁)』). 이러한 평가를 보면, 두보의 절구는 절구의 정해진 양식을 벗어난 변격(變格)이기에 격식을 중시하는 고대 시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확실히 두보는 짧은 시보다 긴 율시나 고시에 뛰어나며, 그의 절구는 당시의 일반적인 절구와 시풍이 다르다. 절구는 4구의 짧은 시형이기에 전아한 시어로 함축성과 여운을 추구하며, 이러한 작품이 널리 애송되었다. 그러나 두보의 절구는 강한 문체에 의론(議論)이 잦으며, 연작시가 대다수이고 대구를 즐겨 사용해 마치 율시나 배율(排律)의 중간 부분을 끊어둔 듯한 인상을 주는 작품도 많다. 그래서 독창적이지만 변격으로 치부되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진연(陳衍)은 『석유실시화(石遺室詩話)』에서 두보의 절구 중 높이 평가받는 “「화경에 주다」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와 같은 작품들이 두보에게서는 진정 변조이며, 우연히 당시의 체제를 본받았다”라고 평했다. 결국 무심코 시류를 따라 지은 작품은 널리 노래로 불리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자기 나름의 개성을 살린 작품은 모두 흥행에 실패한 것이다.


새로운 노래, 두보의 절구

 

절구는 당대(唐代)의 악부(樂府)로 요즘의 대중가요 가사에 가깝다. 대중가요는 보편적인 정서를 절제 있고 아름답게 노래해야 널리 호응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절구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인 그리움과 이별의 정을 노래하거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의 한적한 경지를 읊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두보의 절구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보다 밀착되어 있고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런 면에서 두보의 절구는 낯설게 느껴지고 흥행에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두보는 절구의 미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짧은 시를 지을 줄 몰랐던 것인가?
두보의 절구는 표현이 직설적이고 시어도 거침이 없기에 당시의 독자들도 의아했을 것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쓰이는 구어나 속어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전아한 표현을 사용해야 좋다는 절구 창작의 관념을 깼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의 이면에는 자신만의 개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두보의 시정신이 깔려 있다. 두보가 당시에 쉽게 호응을 얻을 절구 창작의 풍격과 창작법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말[語]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쉬지 않겠다”라는 창작 정신을 가진 두보에게 자신만의 새로움이 없는 시 창작은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두보의 절구가 그의 율시와 고시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은 분명하지만, 차라리 실패할지언정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추구한 것은 진정 대시인의 면모라 할 것이다. 그리고 두보의 절구가 시도한 이러한 새로움은 후대의 절구 창작을 보다 자유롭고 다양하게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보의 시들이 후대 시의 흐름을 선도한 것이다. 또한 두보의 다른 시체의 시와 마찬가지로 그의 절구에 담긴 창신성이 뒤늦게나마 인정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두보의 삶의 방식이자 존재의 이유 시(詩)

 

두보는 일찍부터 시인,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벼슬길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고 싶어 했으나, 좀처럼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오랜 노력 끝에 벼슬을 얻었으나 안녹산의 난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벼슬에서 물러나 시작(時作)에 열중하며 가난하게 삶의 후반부를 보냈다.
그런 두보의 삶에서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은 바로 시(詩)로, 시는 두보의 삶의 방식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두보는 절구로 자신의 감정과 풍류를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편지 대용으로도 자주 지었다. 「왕녹사가 초당 보수할 자금을 허락해놓고 부치지 않아 그저 조금 꾸짖다」나 「소실 현령에게 복숭아 묘목을 구하다」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시들은 시를 받는 당사자에게는 의미가 크지만, 일반적인 독자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일상적인 편지를 시로 대신하며, 절구를 일상생활과 밀착되게 활용한 것은 중당(中唐) 이후와 특히 송대(宋代)에 두드러지는 창작 경향이다.
또한 시국을 걱정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읊으며 현실을 반영하는 두시의 경향은 절구에서도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 『절구 세 수』는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과 백성들의 고통을 읊은 작품이다. 도적들의 수탈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한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을 읊고 백성들을 위무해야 할 군관들의 횡포를 탄식한다. 『근심을 풀다』 『다시 근심하다』 등에도 시국에 대한 걱정이 드러난다. 이처럼 두보는 절구의 형태로 당시의 시대상을 잘 표현했다. 또한 두보의 절구가 의론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장난삼아 지은 여섯 절구」는 당시 문단을 풍자하며 자신의 시론(詩論)을 전개한 것인데 중국 최초의 ‘논시절구(論詩絶句)’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보는 기쁨이건 근심이건 다 시로 풀며 나아가 시를 통해 자신의 성령(性靈)을 도야하고자 했다. 그의 생애에서는 자신이 지은 시를 계속 읊으며 끊임없이 퇴고하는 엄밀한 작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이전 훌륭한 시인들의 성취를 배우고 한계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개성을 더해 한시에 보다 자유를 부여하고 운용 폭을 넓혔다.


■ 작품 속으로

錦城絲管日紛紛, 금관성에 음악 소리 날마다 어지러워
半入江風半入雲. 반은 강바람에 들고 반은 구름에 드네.
此曲祗應天上有, 이 노래는 응당 천상에만 있어야 하니
人間能得幾回聞. 인간 세상에서 몇 번이나 들을 수 있겠나?
「화경에게 주다(贈花卿)」(120쪽)

江上被花惱不徹, 강가의 꽃 때문에 번뇌가 그치지 않는데
無處告訴只顚狂. 어디 하소연할 데 없어 다만 미치고 환장하겠네.
走覓南鄰愛酒伴, 술친구를 찾아 남쪽 마을로 달려갔지만
經旬出飮獨空牀. 술 마시러 나간 지 열흘도 넘어 그저 빈 침상뿐이네.
__「강가에서 홀로 걸으며 꽃을 찾다(江畔獨步尋花七絶句)」의 제1수(124쪽)

不是看花卽索死, 꽃을 보고파 죽을 지경이 아니라
只恐花盡老相催. 꽃이 다 지면 늙음이 재촉할까 두려울 뿐이네.
繁枝容易紛紛落, 꽃이 무성한 가지는 쉽게 분분히 떨어져 내리니
嫩葉商量細細開. 여린 꽃잎이여 상의해서 부디 천천히 피려무나.
__「강가에서 홀로 걸으며 꽃을 찾다(江畔獨步尋花七絶句)」의 제7수(135쪽)

岐王宅裏尋常見, 기왕의 저택에서 늘 만났었고
崔九堂前幾度聞. 최구의 집에서 몇 번이나 노래를 들었던가.
正是江南好風景, 정말 이곳 강남은 한창 풍경이 좋은데
落花時節又逢君. 꽃잎 떨어지는 시절에 다시 그대를 만났구려.
__「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江南逢李龜年)」 (287쪽)

목차

I. 오언절구(五言絶句)
卽事 ∙ 춤추는 여인을 보고 | 因崔五侍御寄高彭州一絶 ∙ 최오시어를 통해 고적에게 절구 한 수를 부치다 | 絶句 ∙ 절구 | 王錄事許修草堂貲不到聊小詰 ∙ 왕녹사가 초당 보수할 자금을 허락해놓고 부치지 않아 그저 조금 꾸짖다 | 絶句二首 ∙ 절구 두 수 | 絶句六首 ∙ 절구 여섯 수 | 絶句三首 ∙ 절구 세 수 | 答鄭十七郞一絶 ∙ 정십칠랑에게 절구 한 수를 답하다 | 武侯廟 ∙ 제갈량의 사당 | 八陣圖 ∙ 팔진도 |復愁十二首 ∙ 다시 근심하다(12수) | 歸雁 ∙ 돌아가는 기러기

II. 칠언절구(七言絶句)
贈李白 ∙ 이백에게 드리다 | 虢國夫人 ∙ 괵국부인 | 蕭八明府實處覓桃栽 ∙ 소실 현령에게 복숭아 묘목을 구하다 | 從韋二明府續處覓綿竹 ∙ 위속 현령에게 면죽을 구하다 | 憑何十一少府邕覓榿木栽 ∙ 하옹 현위에게 부탁하여 오리나무 묘목을 구하다 | 詣徐卿覓果栽 ∙ 서경에게 가서 과일 묘목을 구하다 | 憑韋少府班覓松樹子栽 ∙ 위반 현위에게 부탁하여 소나무 묘목을 구하다 | 又於韋處乞大邑瓷碗 ∙ 또 위반에게 대읍의 자기 그릇을 구하다 | 絶句漫興九首 ∙ 흥이 나는 대로 쓴 절구 아홉 수 | 春水生二絶 ∙ 봄물이 불어나다(2수) | 少年行二首 ∙ 소년의 노래(2수) |
少年行 ∙ 소년의 노래 | 贈花卿 ∙ 화경에게 주다 | 李司馬橋了承高使君自成都回 ∙ 이사마의 다리가 완성되었을 때 고사군이 성도에서 돌아오다 | 江畔獨步尋花七絶句 ∙ 강가에서 홀로 걸으며 꽃을 찾다(7수) | 重贈鄭鍊絶句 ∙ 정련에게 절구를 거듭 드리다 | 中丞嚴公雨中垂寄見憶一絶奉答二絶 ∙ 엄무 중승께서 비가 오는 가운데 날 생각해주는 절구 한 수를 부쳐주셨기에 절구 두 수로 답하다 | 謝嚴中丞送靑城山道士乳酒一甁 ∙ 중승 엄무께서 청성산 도사의 마유주 한 병을 보내주신 것에 감사하다 | 三絶句 ∙ 절구 세 수 | 戲爲六絶句 ∙ 장난삼아 지은 여섯 절구 | 惠義寺園送辛員外 ∙ 혜의사 밭에서 신원외를 전송하다 | 答楊梓州 ∙ 양재주에게 답하다 | 得房公池鵝 ∙ 방공 연못의 거위를 얻다 | 官池春雁二首 ∙ 관가 연못의 봄 기러기(2수) | 投簡梓州幕府兼簡韋十郞官 ∙ 재주 막부에 편지를 부치며 아울러 위 낭관에게 편지를 전하다 | 戲作寄上漢中王二首 ∙ 장난삼아 지어 한중왕께 두 수를 부치다 | 黃河二首 ∙ 황하 두 수 | 絶句四首 ∙ 절구 네 수 | 奉和嚴鄭公軍城早秋 ∙ 정국공 엄무의 「군성의 초가을」 시에 받들어 화답하다 | 三絶句 ∙ 절구 세 수 | 存歿口號二首 ∙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즉흥시 두 수 | 虁州歌十絶句 ∙ 기주의 노래(10수) | 解悶十二首 ∙ 근심을 풀다(12수) | 承聞河北諸道節度入朝歡喜口號絶句十二首 ∙ 하북의 여러 절도사가 입조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절구 열두 수를 쓰다 | 上卿翁請修武侯廟遺像缺落時崔卿權夔州 ∙ 최경 옹에게 글을 올려 무후묘 유상이 결손된 것을 수리할 것을 청하였으니,당시 최경은 기주자사를 대리하고 있었다 | 喜聞盜賊總退口號五首 ∙ 도적이 다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다섯 수를 쓰다 | 漫成一首 ∙ 멋대로 한 수를 짓다 | 書堂飮旣夜復邀李尙書下馬月下賦絶句 ∙ 서당에서 음주를 마쳤는데 밤에 다시 이상서를 불러 말에서 내리게 하고 달 아래서 절구를 읊다 | 江南逢李龜年 ∙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옮긴이 해설 · 실패한 노래, 새로운 노래―두보 절구의 특징과 의의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작가 소개

두보 지음

두보杜甫(712~770)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이백(李白, 701~762)과 더불어 중국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손자로 7세 때부터 시를 지은 그는,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으며 벼슬길에 나아갈 준비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735년 진사 시험에 떨어지자 다시 유람을 떠나고, 이백, 고적(高適)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755년 마침내 작은 벼슬을 얻었으나, 한 달 뒤 안녹산의 난으로 당 제국은 붕괴 위기를 맞는다. 이때 떨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러 간 두보는 어린 아들이 굶어 죽은 사실을 알고 장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반군에 억류되었던 두보는 목숨을 걸고 장안을 탈출해 숙종(肅宗)을 배알한 공을 인정받아 벼슬을 얻었으나, 정쟁 속에서 파직당했다. 지방 관리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사회시로 유명한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다.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다시 벼슬을 받기도 했으나,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혼란스러운 세상과 피폐한 서민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 열성적으로 시를 창작했다. 768년 이후 그는 주로 선상에서 생활했고 궁핍한 가운데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사망했다.

두보의 시는 사회 현실을 잘 반영하여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에서 시사(詩史)라고도 불리며, 침울비장(沈鬱悲壯)한 풍격의 시가 많다. 여러 시체에 능했으며, 특히 율시(律詩)와 고시(古詩)에 탁월했다. 두보는 중국고전시사에서 집대성적 성취와 창신(創新)의 업적을 겸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강민호 옮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두보 배율 연구』 『풀어쓴 대학한문(초급편)』(공저)이, 옮긴 책으로 『유장경 시선』과 『문선역주』 『진자앙 시』 『두보전집 8』(이상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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