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8년 2월 27일 | ISBN 1227285X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16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봄호를 펴내며

역사철학과 비평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백 년 전, 유럽에서 벌어진 최초의 세계 전쟁이 끝났다. 이 미증유의 전쟁이 초래한 가공할 ‘경험의 파괴’는 이른바 ‘국가의 신화’를 탄생시키는 강력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국가의 신화는 곧이어 터진 두번째 세계 전쟁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욱 강고해졌다. 종교사학자 게르숌 숄렘에 따르면, 다종다양한 신들이 (향후 ‘인간’이라는 흐릿한 개념으로 묶이게 될 ) 존재자들과 함께 거주하던 고대 신화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그리고 오롯이 ‘직접성’의 원리가 지배했다.1) 이 세계의 존재자들은 말하자면 신들과 ‘더불어’ 삶을 경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을 경배하지 않았고 , 다만 신성과 교제했을 따름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형태의 ‘믿음’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보편적인 상징을 구체적인 질서의 대응물로 설정할 수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 )던 신화의 세계, 독특한 ‘지역성’의 시간들로 넉넉히 운영되던 이 세계는 무한히 증폭하는 특수성을 단 하나의 시간 (성) 아래 억압하거나 흡수하는 일반성의 세계, 국가들이 보전하는 신화의 세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고대 신화의 세계는 보편성을 원천봉쇄했다. 반면 ‘신화 =국가’의 세계는 유사 –보편성을 과잉생산한다. 따라서 신화와 마찬가지로 국가도 제대로 된 상징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신화와 달리 국가 –신화는 상징을 필요로 한다. 무릇 상징이란 믿음과 약속의 표현이며, 국가의 질서는 개인들의 믿음을 소유물 (이 아니라면 적어도 담보물)로 거듭 확보해야 비로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상징 창출에 무능한 국가는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근본적인 상징들에 대한 해석을 독점적으로 전유하려 하거나 그 해석 과정에 폭력적으로 개입하며,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그들의 눈에 위험해 보이는) 해석의 유통을 통제하려 든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적인 동시에 가장 비근한 사례로는 다수의 거대 종교 단체들에서 (거의 매주) 행해지는 설교를 들 수 있는데, ‘국가의 신화’에 기꺼이 복무하는 저 사제들의 언설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유사 –신권정치적pseudo‐theocratic 해석은 어쩌면 한 세기 전 유럽의 청년들이 겪은 ‘경험의 파괴’를 훨씬 상회하는 위력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백 년 전, 패전국의 한 출판사에서 『유토피아의 정신Geist der Utopie』이라는 책이 출간된다.(참고로 이 책의 저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3년 후 발터 벤야민의 「신학적–정치적 단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고유명이 되며, 이 책을 낸 출판사 둥커&훔블로트Duncker&Humblot는 4년 후 카를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 세계 내에서의 신권정치theocracy의 가능성 및 정당성을 일축한 이 책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이 등장한다. “알아두어라, 모든 세계에 대해서는 이중의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세계의 외면, 즉 외적인 형식에 따른 보편적인 법칙들을 보여주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세계의 내적 본질, 즉 인간 영혼의 총합Inbegriff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에도 서로 급이 다른 두 종류가 존재한다. 일과 기도가 그것이다. 일이 외적인 관점에서 세계들을 완성하는 행위라면, 기도는 한 세계를 다른 세계에 복속시키는 것, 그러니까 이 세계를 하늘로 들어 올리는 행위이다.” 이어서 블로흐는 이렇게 선언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우리로(써 ) 채색하고 , 주파하며, 결정하는 것이다. 다채롭게, 모험적으로 , (마치) 귀향하듯이.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 아직 아무 결론도 나지 않았으며, (정말로) 속이 옹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부서진 낮은 부분의 파편들을 그러모으는 것, 우리의 머리를 역사 너머로 계속해서 들어 올리는 것, 국가를 인류공동체Brüdergemeinde와 발맞추도록 강제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의 만남Selbstbegegnung에서 얻은 수확을 저 가공할 묵시록의 추수 감사제Erntefest로 가져가는 것이다.”2)

45년 후 저자 스스로가 인정했듯, 이 책은 혁명적 낭만주의에 사로잡힌 영혼이 그야말로 거침없이 쏟아낸 언어의 폭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이 책의 역사철학적 잠재력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이 책은 내재의 시간성을 극한에서 사유하기 위해 분투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견줄 만한 것으로는 아마도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그리고 카를 바르트의 『로마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이는 무엇보다 벤야민의 마지막 저작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인데—역사를 사방으로 끝까지, 바꿔 말해서 ‘마치 끝난 것처럼’ 탐구하는 행위야말로 , 오직 그러한 노력만이, ‘역사철학’이라는 명칭에 제대로 값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철학은 역사를 둘러싼 각종 담론, 서사, 기록 들을, 비유하자면 미결 사을 붙들고 씨름하는 형사처럼, 뒤지고 뒤집는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비코가 준비했고 , 프랑스의 철학자—어쩌면 논객polemicist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수도 있을 텐데— 볼테르가 고안했으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재단하여 세계 무대에 등장시킨 이 용어는 성격상 논쟁적일 수밖에 없고 , 외관상 보편적이(어야 하)며, 본질상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머리가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가더라도 , 몸통은 여전히 역사 안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쳐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철학은 높은 곳에서 찬찬히 내려다보는 따위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작업일 수는 없는 것이다. 특별히 ‘국가의 신화’가 건재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철학자 블로흐의 일은 글쓰기였고 , 그의 기도는 비판이었다고 . 비평을 쓰는 작업이 역사의 팔림세스트palimpsest—문학의 자리는 여기에 있다—를 판독하는 작업과 최상의 형태로 합치될 때, 오직 그때에만 역사철학은 탄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평의 일과 주해exegesis의 기도가 하나로 결합하여 서로 구분 불가능해질 때, 오직 그때에만 역사철학은 등장한다. 블로흐의 글쓰기가 세계의 보편 형식 내지는 법칙들을 얼마나 잘 보여주었는지, 또 그의 비평이 세계의 내적 본질을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의 문제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주제일 터이다. 분명하고 중요한 사실은 그의 요청이 여전히 유효하고 , 그의 선언이 계속 메아리친다는 점이다. 실로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들어 올리기 위해 계속 무릎을 꿇어야 한다. 비록 언제 어떻게 ‘묵시록의 추수 감사제’가 열릴지 알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모든’ 우리의 고민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일’하고 있는가 ? 우리의 ‘기도’는 정녕 세계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 그러나 비판 혹은 비평을 이른바 ‘소명’으로 받긴 했으되 언어와 시대–상황과 능력의 한계에 갇혀 그저 허우적거릴 뿐인 모든 ‘우리’는 그보다 먼저, 소박하고 절박하게, ‘자기 자신과의 만남’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 ? 아니, 과연 만날 수 있을 것인가 ? 설령 운 좋게 만난다 해도 , 과연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 마지막으로 , 설혹 거둔다 한들, 그 ‘수확’이 정녕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 알 수 없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문학과사회』라는 ‘하이픈’으로 연결된 ‘우리’가 시도하 (려)는 것은 다만 이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다채롭게, 모험적으로 , 그러나/그리고 동시에 가본 적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작업들을 준비하고 고안하여 내놓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걸음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호 하이픈
의 기획은 ‘2000년대 이후의 비평’이다. 근과거는 가장 망각에 빠지긴 쉬운 시간인 동시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먼 과거에 발생한 전 지구적인 파국과 그에 대한 사유의 사투를 추 –체험하는 것이 작금의 역사철학의 중핵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여러 가지로 갈릴 수 있겠지만, 가까운 과거에 대한 반성을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한 첫걸음이라 부르는 데는 커다란 이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번 호를 통해 근과거를 거듭 심문하는 일의 필요성이 소명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우선 해당 시기에 현장평론을 가장 활발히 한 네 명의 평론가 김영찬, 김형중, 소영현, 신형철을 상대로 그들이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서면 인터뷰를 시도하였다. 다음으로 , 현재 활약 중인 젊은 평론가 강경석, 김영임, 김주선, 노대원, 박인성, 선우은실, 양윤의에게 그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혹은 문제적으로 각인된 비평문을 선정하여 단상의 형식으로 메타비평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복도훈, 조재룡, 권명아는 해당 시기의 역사를 각각 문학 논쟁, 시 비평, 페미니즘을 키워드 삼아 비판적으로 정리하는 글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또한 한국 비평 장르에 ‘거의’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클리셰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하고자 했다. 윤재민, 이재원, 장은정이 한국 비평에서 중심적인(?) 위상을 갖는 클리셰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개진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편집동인 김신식이 ‘픽션–에세이’의 형식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비평가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담백하게 술회하는 글을 실었다. 『문학과사회』 본권에서 독자는 황동규, 김혜순, 김언, 정영, 서효인, 성동혁, 장수진의 시와 김경욱, 편혜영, 김덕희의 단편소설 및 강영숙, 이주란의 짧은 소설을 만날 수 있다. 은희경의 「빛의 과거」는 4회째, 이장욱의 「밤과 미래의 연인들」은 2회째 연재된다. 『오정희 깊이 읽기』를 책임 편집한 바 있는 문학평론가 우찬제가 작가 오정희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한번 오정희의 문학 세계를 탐색하는 글을 실었다. 마지막으로 <지성>에는 문학평론가 오생근의 바타유론과 강우성의 아감벤론으로 채워졌다. 작가 백수린이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제14회 마해송문학상은 황지영이 수상하게 되었다. 두 분 모
두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문운이 더욱 크게 승하기를 더불어 기원한다. 봄호의 <리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한 호 미루게 되었다. 독자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우리로(써) 채색하고 , 주파하며, 결정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주어도 , 주체도 , 심지어 실체도 아니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상징으로 비약할 수 없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누구든 언제든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상징과 상품 사이에서, 신화와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미결된 역사를 읽고 또 만들어가는 모든 우리의 건투를 빈다.

편집동인 조효원

1) Gershom Scholem, 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 New York: Schocken Books, 1995, pp. 7~8 참조 .
2) Ernst Bloch, Geist der Utopie: Erste Fassung Faksimile der Ausgabe von 1918, Frankfurt a. M.: Suhrkamp,
1985, pp. 444~45.

 

『문학과사회』 보기 -> http://moonji.com/book/14566/

목차

인터뷰 <2000년대 현장평론가들에게 공통의 질문을 던지다>
김영찬
김형중
소영현
신형철

추천과 단상
강경석 퇴행과 역진의 시간에 맞서
김영임 비평은 변하지 않았다
김주선 문학의 사회적 지평을 열기 위해
노대원 꿈의 파산 시대, 문학적 파상력을 위하여
박인성 비평의 긴장 혹은 적대적 거리
선우은실‘문학성’과 문학 비평
양윤의 2000년대 이후의 비평

비평의 역사
복도훈 유머로서의 비평
조재룡 2000년대의, 시, 그리고 비평
권명아 여성 살해 위에 세워진 문학/비평과 문화산업

클리셰 사전
윤재민
이재원
장은정

비평가의 탄생
김신식 나는 어떻게 비평가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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