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판을 타고

윤고은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7년 10월 30일 | ISBN 9788932030494

사양 46판 128x188mm · 227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우리는 단지 마당을 빌려준 것뿐이었다”
마당에 감춰진 수상한 이야기들, 이곳의 출구는 어디인가.

 

윤고은의 세번째 장편소설 『해적판을 타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을 출간했다. 작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면서 사회문제를 환기시키는 힘에 더해 위트 있는 문장력과 재치 있는 서사를 꾸준히 선보이며 문단과 독자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작품은 YES24 블로그를 통해 2017년 1월부터 총 3개월간 독자들과의 호흡 속에서 인기리에 연재를 마친 바 있다.

『해적판을 타고』는 한 가족의 마당에 유해 폐기물이 묻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결할 수 없는 미로에 갇힌 듯 점점 마당 밖의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가는 가족의 이야기에 주목함과 동시에, “이게 저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닌 거 아니에요?”라며 의문을 던진다. 더불어 어른들의 삶과 대비되는 ‘중2’ 채유나와 뒤뒤의 이야기가 작품의 다른 한 축으로 등장하면서 재난에 가까운 상황에 묘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내 발아래 묻힌 유해 폐기물, 이곳을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유나와 그의 가족은 폐기물의 악몽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유해 폐기물을 발밑에 묻은 한 가족
무책임한 말들과 흉흉한 소문에 갇힌 사람들

 

잔꽃초등학교 5학년 채유나의 가족은 마당에서 채소를 기르고, 채송화를 심고 가꾸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센터’라고 불리는 아빠의 회사에서 사람들이 비닐자루들을 싣고 와, 이들의 집 마당에 자루들을 파묻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 집 마당에 묻는 것인지 수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불길한 징조와 불안한 예감만을 남긴 채 폐기물들과의 동거가 시작된다.

어차피 인간의 나이란 한 자리, 두 자리, 그리고 드물지만 세 자리 숫자, 그 세 종류 중 하나일 테고, 벌써 내 나이는 두 자리로 진입한 지 오래였다.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란 게 기껏 다른 사람 집에 잿빛 자루를 묻거나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전조 증상만으로 충분히 얼룩져 본편은 시작할 지면도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p. 97)

유나의 엄마는 잡지 촬영 등을 준비하며 마당에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행동하려 하지만, 오히려 동네에는 집 마당에 대한 불길한 소문만이 무성해질 뿐이다. 마당 아래 자루를 가져가겠다던 아빠의 회사에서는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말로만 약속을 반복한다. 미성년인 유나에게 아직 시작되지 않은 본편, 즉 어른들의 삶은 남의 집에 수상한 폐기물이나 묻는 것, 불안한 와중에도 자신의 마당을 빌려주는 것 정도의, 기껏 그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 집 마당에서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책임지는 어른은 없는 세계, 말만 무성할 뿐 행동이라고는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이제 막 두 자리 수의 나이에 들어선 유나의 삶까지 물들인다.

가까운 곳에 유해 폐기물이 묻혀 있다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과연 환상일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우며 현실 사회의 단면을 폭로해왔던 윤고은의 전작들을 떠올려봤을 때 우리 가족의 일을 모른 척하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은 상상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사건들만 간단히 꼽아봐도 이러한 상황은 이미 소설적 상상이 아닌 현실이다. 재난에 가까운 현실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해적판을 타고』는 시작된다.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이야기
위안을 주고받는 존재, 희망을 상상하는 사람들

 

유나의 집에 자루를 묻으러 왔던 아빠의 회사 동료, 일명 ‘루’는 유나에게 『어린왕자』 해적판을 선물한다. 정식으로 유통되기 전에 출판된 책이기에 때로 책의 내용은 정식 판본과 다를 수도 있다고 ‘루’는 설명한다. 특히 ‘루’가 선물한 해적판은 마지막 결말이 빠져서 결말조차 알 수 없다.

해적판이란 말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그게 해적이 등장하는 소설인가 했는데, 해적판이란 건 정식 루트가 아니라 어둠의 경로로 출판된 책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루는 이 해적판 『어린왕자』를 중학교 때 읽는 바람에, 나중에 정식 판본으로 『어린왕자』를 읽었을 때 오히려 시시했다고 말했다.
“왜요? 이야기가 달라요?”
“결말이 살짝.”(p. 94)

성년의 삶이 무언가를 정식으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생의 본편, 정식 판본에 가까운 삶이라면, 미성년 시절은 본편으로, 정식 판본으로 다가가는 준비 단계라 말할 수 있다. 즉, 결말이 어떻게 날지 누구도 모르는 해적판인 것이다.

그리고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이 된 채유나의 삶에는 동갑내기 ‘뒤뒤’가 등장한다. 유나에게 뒤뒤는 “진짜 나쁜 놈들이 뒤, 뒤에” 있는 시기에 만나게 된 “뒤, 뒤에 좋은 사람”(p. 176)이다. 본편으로 가기 전 얼룩져버린 유나의 삶에 등장한 ‘좋은 사람’인 것이다. 둘 다 아직 어른은 아니지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로, 이 둘의 이야기는 ‘마당에 묻힌 폐기물’과 아빠의 회사 사람들로 대변되는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는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유나의 가족 일을 모른 척할 때 바로 뒤에서 유나의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뒤뒤이다. 뒤뒤는 해결되지 않는 가족의 문제로 인해 고립감과 답답함으로 점철되었던 유나의 삶에 위안이 되는 존재로서, 그와 유나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은 마치 청춘 드라마를 보는 듯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결론을 알 수 없는 해적판 『어린왕자』처럼 두 사람의 에피소드들은 어른들의 세계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결론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 해적판이 고스란히 원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와 뒤뒤에게 그랬다.”(p. 203)

결말이 뜯긴 해적판은 그 해적판을 손에 쥔 사람이 그리고 싶은 대로 결론지어질 수 있다. 유나와 뒤뒤 혹은 유나의 가족들에게 남겨진 결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이 해적판처럼 우리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희망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윤고은의 『해적판을 타고』가 보여주는 환상적 세계는 불안, 재난에 가까운 삶이 아니라, 재난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치유를 발견하는 사람들, 그 가능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그때 ‘쿵’ 소리가 들렸다. 이제 배롱나무에 매미 껍질 같은 건 더 없는데 말이다. 그건 두 개의 물체가 충돌하는 소리였고, 두 개의 세계가 서로를 겨누는 소리였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우리 차가 소장의 레인지로버를 들이받은 채 서 있었다. 미숙한 게 있다면 엄마의 운전 실력이 아니라, 이 위협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감싸주던 어떤 보호막이었다. (pp. 71~72)

 

그러나 세상엔 우리보다 더 큰 거인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개미를 내려다볼 때처럼 거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우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죽어라 달려봤자, 거인이 볼 땐 겨우 한 뼘 정도 이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마당이 그대로 실험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거인이 우리 마당에 비소로 오염된 토끼를 넣어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는 게 아닐까. 창밖으로 보이는 동그란 달조차 의심스러운 밤이었다. (p. 79)

 

우리 집 바로 앞 동에 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둘째는 불쾌해했다. 이렇게 이사까지 하고 보니 아무래도 루가 우리 마당에 자루를 들고 왔던 그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게 불행의 시작이라고 믿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모든 건 시작되었고, 시작을 만든 우두머리들은 뒤에, 뒤에 숨어 있었다. (pp. 90~91)

 

아빠가 말했다. 나는 풍력발전기가 도시의 흔한 가로등처럼 멈춰 서서, 일몰 후 두 시간 동안 불을 켰다 끄는 걸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느끼는 차분함이란 모두가 바람에 시달리고 있으니 차라리 공평하다는, 그런 위안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였다. 모두가 이 태풍의 경로에 대해 말하는 동안 우리 가족만 앓고 있는 그 토끼냐 비소냐의 문제가 잠시 휴전을 선언한 것처럼 느껴졌다. (p. 152)

 

말이 먼저 튀어 나가 상황을 견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말이 가장 늦는 경우도 있다. 말보다 앞서 걸어간 것이 더 많은 세계, 나와 뒤뒤가 산책한 건 그런 세계였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저렇게 말이 떨어지자,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일순간 긴장한 듯 도열했다. (p. 184)

 

우리는 이제 각자 마음에 구멍 하나를 뚫고, 저장고를 만들었다. 끌어 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그 안에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물론 도로를 달리는 그 문장처럼, 모든 게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가능성은 늘 있다. (p. 204)


■ 작가의 말

 

소설의 탄생은 별의 탄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안에서 부유하던 먼지들이 서로 만나고 뭉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언제나, 먼지다.

유해 폐기물을 내 집 마당에 묻은 건 소설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 선점한 장면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를 다룬 뉴스에서 방사능 폐기물을 묻은 어느 집 마당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표정도. 그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채로, 길을 걷다 우연히 ‘마당을 빌려주세요’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보게 됐다. 그 현수막은 폐기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었는데, 그 순간 내 안의 먼지들이 합쳐졌고 첫 문장과 둘째 문장과 셋째 문장과,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이 소설을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상한 폐기물을 발아래 두고 자라는 십대.’ 그러나 그게 과연 유나네, 십대, 잔꽃마을만의 이야기일까? 생각해보면 내 집 아래에 뭐가 있는지, 내 산책로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책이 되기까지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 소설을 일주일에 두 번씩 연재할 때, 3+1+3으로 한 계절을 함께 통과했던 독자들께도 감사드린다. 참고로 3+1+3이란 사흘 쓰고 하루 쉬고 또 사흘 쓰는 방식을 말한다. 그 결과 일주일은 7일이라기보다는 3+1+3의 합이 되어버렸다. 3+1+3은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조합이다.

이제 책으로 마주하게 될 독자들께도 반가운 마음을 전한다. 언젠가 카페에서 내 책을 읽는 사람을 보고는 너무 설렌 나머지 그 카페를 뛰쳐나간 기억이 있다. 폭발적인 즐거움으로 팽창했다고나 할까? 『해적판을 타고』와도 그런 식의 만남을 꿈꿔본다.

어떤 글은 쓰고 나면, 창작물이라기보다 되찾은 유실물 느낌을 준다. 이 여섯번째 책도 그렇다. 그게 어느 부위에 필요한 것인지는 몰라도, 오래 찾았던.

2017년의 한 번뿐인 어느 오후
윤고은

목차

해적판을 타고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윤고은 지음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이 있다.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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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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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 =

  1. 설탕
    2017.11.03 오후 4:36

    출간 기다리고 있었어요. 축하드립니다. 🙂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