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밤나무 바이러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7년 9월 20일 | ISBN 9788932030418

사양 변형판 125x192 · 224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시공과 언어, 물질성마저 초월한 이야기

서사의 변이, 장르적 혁명을 예고하는 선명한 징후

 

 

문지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놀라운 신예”로 주목받아온 작가 김솔의 첫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가 출간되었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지적인 소재를 기발한 이야기로 직조해내며 다양한 소설적 가능성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해왔다. 첫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에서 ‘쓰기’에 대한 깊은 사유와 사회 전반에 대한 성찰적 시각을 독특한 실험적 기법으로 구사해냈다면, 기존 단편소설의 길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창작한 짧은 소설들을 모은 『망상,어』에서는 어딘가 어그러지고 결핍된 존재들에 주목하여 왜곡된 현실을 풍자하는 동시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몽상 위에 올려 강렬한 이야기들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변이’에 가깝다. 왜냐하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또 한 번 변태를 일으키려는 장면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형중)

신인으로서의 패기만만함과 더불어 분야를 망라한 넓은 지식, 그리고 책-이야기에 대한 깊은 관심이 서사적 변주를 넘어 변이로, 장르적 실험을 초월한 혁명으로 나아가는 김솔의 여정을 추동해왔다.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는 지난 5년간 김솔이 감행해온 실험의 결정판이다. ‘지식과 서사를 둘러싼 모든 고민거리’들은 작가 고유의 상상 영역에서 위트 있는 문장들로 풀려나온다. 독자들은 꿈과 현실, 시작과 끝, 이야기의 안팎이 뒤섞인 한바탕 요동을 경험하며 낯설고도 빠른 속도감에 눈을 빼앗길 것이다.


 

책의 장소들에서 시작된 혁명과 도래하는 미래

 

작가와 독자, 그리고 책의 등장인물이 지니고 있던 모든 권위는 부정되었고 그들을 격리시키던 시공간은 무너져 뒤섞였습니다. 이야기는 무한히 증식하여 어느 곳에서 시작하여도 언제나 같은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자들은 작가가 부여한 역할의 경중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의 이야기로 전체의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p. 121)

우리는 책의 물리적 형식을 바꾼다. 그러면 현존하는 도서관은 더 이상 그것을 담을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형식의 책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 일단 국제적 표준에 맞춰 기계어로 코딩된 책들은 무한히 복제 가능하기 때문에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류의 정신이 영구히 파괴되는 위험에서 해방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장점은, 바벨탑이 붕괴되고 인간의 언어와 문자가 파편화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표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머지않아 새로운 운명의 책들이 마치 빅뱅처럼 한꺼번에 태어날지도 모른다. 좋은 책은 거울과 같아서 서로를 반영하면서 증식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증식을 막을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알고리즘을 설정해두면 적어도 기계어로 코딩해야 할 목록에서 그것들을 누락하는 실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몇 개의 검색어를 입력하는 행위만으로도 책의 가치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탄생의 순간부터 굳이 인위적으로 검열할 필요는 없다. (pp. 127~30)

 

작가의 상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헌책방, 도서관, 서점 등 책이 모인 장소들에서 이웃한 책의 인물들이 서로 교류하고 뜻을 모아 시작된 어떤 혁명. 그것은 책에 묶여 있던 존재들의 속박을 향해 영원히 시도되며, 실패하고 또 일어서는 운동적 순환으로 지속된다. 한편 책의 미래는 물성이 해체되고 모든 것이 전산화되는 외적 혁신의 흐름이 다가온다. 7년 전 세계적인 미래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종이책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실제로는 아직까지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는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지만, 김솔은 물질성을 초월하고 언어의 장벽마저 사라진 ‘책의 미래’를 그려본 것이다. 도서관이 사라지고 사서가 해고된 자리 위에 세워진 거대한 바벨탑은 일견 극단적 가정으로 느껴지지만, 매체‧플랫폼 등 형식과 기능에 치중한 채 그 안에 담긴 여러 내용 간 개연성과 전체 짜임, 질적 차이 등이 긴밀하게 고려되지 못한 오늘을 풍자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저본을 파괴하는 책바이러스의 출현

 

너도밤나무 숲을 빠져나온 직후부터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나가는 곳마다 역병이 번져 책 속의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 역시 기괴하게 일그러져서 도무지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또한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 저의 모든 노력과 동료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역병은 더욱 거세게 창궐했습니다. 사서들뿐만 아니라 주정부에서 파견된 전문가들까지 나서서 도서관 전체를 폐쇄하고 수십 톤의 소독제를 살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회복 가망이 없는 책들과 집기들을 도서관 밖으로 꺼내어 불태웠습니다만 역병의 기세를 제압할 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병을 주도한 바이러스는 그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최신 변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너도밤나무 바이러스로 명명되었는데, 책의 어원이 시작된 나무와 책의 미래를 파괴하는 바이러스가 하나의 이름으로 묶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였지요. (pp. 172~76)

고대 게르만족이 너도밤나무 판자 위에 룬문자를 기록하여 보관한 것에서 비롯하여 고대 고지 독일어에서 너도밤나무를 뜻하는 ‘Buohha’는 현재 책을 일컫는 단어 ‘Buch’의 뿌리가 되었다는 내용을 밝히며, 작가는 책의 어원이 되는 너도밤나무를 책의 미래를 파괴하는 바이러스 이름으로 명명했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은 기록의 뿌리가 책의 미래와 만나는, 책에 대한 모든 이야기이다. 책의 오래된 자리부터 물성을 떠난 위치까지를 가로지르며, 그 안에 존재한 역사와 서사, 내적 외적 요소를 망라한다. 작가는 책 안에서 기획된 혁명보다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책이 황폐화된 채 저본과 고유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디스토피아적 책의 미래를 다양한 시선을 동원해 그려나간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 구축법으로 새로운 소설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작가 김솔의 책-이야기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총 42장으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저마다 여러 화자가 출몰해 수다스럽게 자기 서사를 늘어놓아 언뜻 파악하기 어렵게도 느껴지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낱낱의 사연이 모여 “책-이야기”라는 하나의 주제로 완벽한 콜라주를 이루는, 이미 당도한 미래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 본문에서

 

파국은 어느 날 밤 알비노 여자가 유대인 거인의 숙소로 숨어드는 걸 멕시코 난쟁이가 목격하면서 시작되었습죠. 관객이 떠난 무대 아래에서 괴물들이 밤새 할 수 있는 게 딱히 뭐가 있을깝쇼?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금시계나 동전을 토해내는 것 말고, 어둠을 나눠 주는 대가로 허기를 채우는 것 말고, 기도의 응답을 듣지 못한 쓸쓸함을 푸념하는 것 말고. 하지만 서로의 언어가 달라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죠. 알비노 여자의 뇌는 분명히 멕시코 난쟁이에게 진 빚의 무게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사랑을 관장하는 기관이 뇌는 아닙죠. 차라리 뇌는 죽음을 관장합죠. 그러니까 죽음은 사랑보다 훨씬 논리적이란 말입죠. 죽음이 개입하기 전까진 알비노 여자에게서 유대인 거인을 몰아내고 멕시코 난쟁이를 대신 앉히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죠. 알비노 여자는 멕시코 난쟁이에게 여러 번 감사하고 사과했습죠. 그리고 금시계와 동전을 건네기도 했습죠. 하지만 그런 행동은 멕시코 난쟁이를 더욱 괴롭혔을 따름입죠. 모든 생명체에겐 여러 편의 사랑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생물학자가 있었다면 아마 멕시코 난쟁이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주장을 철회했을 게 분명합죠. (pp. 27~28)

 

그중 가장 최근에 실현된 몽상 하나가, 모든 도서관을 네트워크로 연결한 다음 그 네트워크를 통해 책들을 도서관에서 독자의 서재까지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책이 지닌 물질성을 해체해야 하는데, 개별 문자가 아닌 국제 표준의 전자 코드를 사용하여 책을 다시 쓰고 분류한다면 전혀 실현 불가능한 방법만은 아니었다—각국의 언어로 된 사전을 공통의 전자 코드로 바꾸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으니, 시공간이나 국경, 인종은 물론이고 역사와 윤리의 장벽이 해체되는 순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유롭게 네트워크를 따라 이동할 것은 책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바이러스는 변이와 파괴와 재생의 운명을 무작위로 선택한다. 세상 모든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그것의 폐해에 대처하려면 책이 태어난 모든 곳과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노아의 방주에서 착안하여, 세상의 모든 책을 보관할 수 있는 도서관을 가상이 아닌 현실 위에 세우되 외부와의 네트워크를 끊어서 절멸을 대비하자고 제안했다. 한정된 시공간에다 세상의 모든 책을 보관하려면 물방울이나 모래알 안에 책의 물질성을 압축하는 방법부터 개발되어야 했다. (pp. 125~26)

 

그래서 여섯 권의 잉여의 책을 발견한 사서는 동료들의 일상과 미래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 찜찜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잉여의 책이 담겨 있는 가방을 메고 도난 방지 시설이 작동하고 있는 도서관 출입문을 통과할 때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무릎이 꺾여 바닥에 주저앉는 바람에 동료들의 의심과 조소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선배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그녀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한 시간가량 배회하다가 헌책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의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의 얼굴로 들이닥치던 열기와 냄새는, 자신이 마치 베를린 광장에서 불타고 있는 책들 속에다 자신의 일기장을 던져 넣은 유겐트 단원이라도 된 것 같은 수치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나치는 비독일인의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책을 불태운다고 선전했다. (p. 172)

목차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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