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119호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7년 8월 25일 | ISBN 1227285X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64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가을호를 펴내며

 

보기 드문 명쾌한 문체로 문학이론의 복잡한 지형을 개괄하여 명성을 얻은 영문학자 조너선 컬러는 1997년에 나온 그의 문학이론 입문서 『문학이론』의 1장 「이론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의 문학 연구와 문화 연구에서는 이론에 대해 아주 많이 떠든다.” 하지만 그가 10년 뒤에 새로 쓴 문학이론서 『이론에서의 문학적인 것』에서는 “이론이 죽었다고 한다”라며 이론의 죽음에 대한 풍문을 전한다. 대체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론은 호황을 누리다가 조용히 파산하고 만 것일까? 역시 널리 읽히는 문학이론 입문서를 쓴 테리 이글턴 또한 2003년에 낸 『이론 이후』에서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문화이론의 황금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글턴은 이렇게 첫마디를 떼고는 이론을 대변했던 별처럼 빛났던 이름들, 바르트, 라캉, 알튀세르, 푸코 등을 하나씩 헤아리며 잠시 비감에 젖는다.

물론 ‘종언’과 ‘죽음’이라는 수사가 어떤 것의 상실에 대한 불안을 조성하여 그것의 현재적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특유의 극적이고 미학적인 효과로 인해 과하게 즐겨 쓰인다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이론의 쇠락은 이론의 최전선을 기웃거리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체감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글턴의 『이론 이후』 외에도 2000년대 초부터 이론의 이후를 걱정하고 고민하는 연구들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렇게 이론을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와 사실상 등치시켜버린 영미권 비평의 전통이 얼마나 특수하고 편협한 것인가를 비판하기 전에, 한국의 문학 비평장에서의 상황이 얼마나 다른가를 잠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이곳의 문학 비평장에서도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이론이 소비됐던 방식은 1990년대 이후 문학에서의 이론 사용 방식을 어느 정도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사실인 듯하다. 다시 말해서 1990년대부터 한국 비평장을 숨 가쁘게 휩쓸고 지나갔던 이론가들의 러시는 2010년대에 들어와서 멈춘 것처럼, 적어도 뜸해진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비평가들 사이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론가들의 목록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목록이 예전의 속도만큼 바로바로 업데이트가 안 되거나, 그 목록에 들어갈 새로운 이름들에 대한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이자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이론을 투쟁과 변혁의 무기로 진지하게 벼려온 비평가들이 나를 꾸짖는다면, 이를테면 좌파 이론까지도 유행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후기자본주의적 행태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또한 계속해서 활발하게 생산되는 새로운 이론들을 보지 못하고 저렇게 말하는 나의 무식과 용감함을 누군가가 나무란다면, 이에 대해서도 정말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론에 대해 내가 느끼는 곤궁이, 이론이 진짜로 낙후했다거나 빈곤해져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우리(나와 같이 이론을 배워온,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가 이론을 사용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빈곤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변명 대신 던져볼 수는 있겠다. 이론을 작품 분석의 도구로 끌어들이고 문학을 다시 그 이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방식은 어디에서도 새로운 사유의 운동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결국 하나의 장황한—종종 지루하기까지 한—동어반복을 생산할 뿐이다. 따라서 이론을 작품에 적용하여 이론과 작품 양자의 유효성을 증명하는 식으로 문학 논문과 비평을 생산해왔던 관행은 이론과 작품 모두를 소진시키기 십상이다. 이런 식의 이론의 사용은 이론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다. 그들은 문학에서 이론은 전면에 등장해서는 안 되며 문학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론의 과도한 사용은 작품과 사실상 무관한 개념어들을 작품에 덕지덕지 붙여놓아서 작품 자체의 본래적 의미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이론은 문학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론을 위한 이론은 무의미하고 공허하며 위험하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이론을 위한 이론은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무해하다. 그렇다면 이제 이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질문이고, 이것은 곧 우리의 문제다. 우리는 이 질문과 좀더 잘 씨름하기 위해서 이론이란 무엇이고, 이론과 문학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며, 이론의 창조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즉 이론의 시학은 무엇인지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다. 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의 기획은 그래서 ‘이론을 위한 이론, 이론의 시학’이다. 이 기획은 최신 이론을 조망하거나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론의 사용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하고 이론의 고유성과 자립성을 톺아보는 자리로서 마련되었다. 이로써 ‘이론을 위한 이론’이 어떤 형식을 취할 수 있는지, 아니 그것은 대체 가능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하이픈』이 이론에 대한 다양한 불만들을 모아보는 자리였다면 본권에서는 동시대 한국 문학장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을 멍석을 깔아보았다. <기획—문학 속의 불만>에서는 소설가 강화길과 김봉곤이 문창과 출신의 등단 작가로서 느끼는 좀처럼 개념화하기 어렵고 전선을 긋기도 어려운 미묘하고 복잡한 경험을 들려준다. 문학평론가 이은지는 현재의 문학장에 새로 등장한 자율성과 도덕주의의 (가짜) 대립에 대한 문제의식을 피력하고, 문학 서점 ‘고요서사’를 운영하는 대표 차경희는 한국 문학장을 움직이는 여러 암묵적인 규칙들에 대한 불편함을, 또 편집동인 황예인은 한국 문학 편집자의 경험에서 편집자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한다.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 호에도 ‘리뷰 VS 리뷰’는 계속된다. 지난 호의 리뷰가 전적으로 소설에 할애되었다면 이번에는 시에 집중하였다. 시인 김언, 그리고 문학평론가 김영임과 함돈균이 최근에 출간된 시집들 가운데 비평적 주목을 요하는 시집 두 권을 각각 선정하여 검토했다. 현재의 시에 대한 관점들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지점들이 명료한 무늬로 도드라졌길 바란다.

그 외에도 뜻깊은 글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역사학자 임지현이 지난 5월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의 초청 토론회에 대한 소회를 들려준다. 알렉시예비치의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섬세히 짚고 문학과 기억의 정치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본지에서는 지난 7월 1일 타계한 소설가 박상륭을 추모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생전에 고인과 인연이 있었던 문학평론가 김주연과 시인 함성호가 그의 독특하고 치열한 삶과 문학에 대한 기억을 나눈다. 여기에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박상륭 문학의 컬트적 수용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그의 난해하고 비의적인 언어 세계를 정치하게 분석한 작가론을 보태주었다.

이번 호에도 다채롭고 새로운 작품들이 독자 여러분들을 기다린다. 마종기, 이기성, 신영배, 유희경, 유계영, 김민우, 윤지양이 귀중한 신작시들을 보내주었으며, 안드레스 펠리페 솔라노, 오한기, 김환, 윤해서의 새로운 단편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한국 체험에 기반한 작품으로 지난해 콜롬비아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안드레스 솔라노의 2014년도 작 「피그 스킨」을 『문학과사회』에서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또한 은희경 작가의 장편 연재 「빛의 과거」 2회도 기대해주길 바란다. 귀한 작품을 보내주시고 번역해주신 필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지난 1년간 잡지의 혁신과 궤를 같이했던 인류학자 김현경의 인문 연재 「재생산의 문제 설정」이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왜 진보적 주체와 능동성을 함께 사유하기 어렵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한 인문 연재가 어떤 전망을 타진하며 끝났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후속 연구를 기대해보며, 1년간 사유의 전개를 그대로 노출하는 위험을 기꺼이 무릅써준 필자에게 각별한 애정과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지난해 가을 혁신호를 출간하고 1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니 혁신을 우리가 한다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은데 혁신은 바깥에서 왔다. 그리고 그 혁신이 우리가 생각한 혁신보다 좋았다. 그런데 그것이 나쁘지 않다._「가을호를 펴내며」 발췌, 편집동인 이경진

 

하이픈 보기 -> http://moonji.com/book/13715/

목차

서문 이경진 가을호를 펴내며

시 마종기 마지막/시차 적응 외
이기성 시인은 질투 때문에 죽는다 외
신영배 물소파 외
유희경 참 작은 일들 외
유계영 다이얼 외
김민우 그분이 지구를 지배하는 날
윤지양 K끼리의 시대

소설 Andres Felipe Solano  피그 스킨
오한기 바게트 소년병
김환 기계
윤해서 맹목
은희경 빛의 과거 [장편 연재 2]

리뷰 김언 부자연이 자연이 될 때까지 외
김영임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외
함돈균 나의 프랑스 당신의 아프리카라는 부조리극 외

기획 <문학 속의 불만>
강화길 더 나은 말을 위해
김봉곤 조각보 만들기
이은지 한국 문학의 숭고한 타자를 기다리며
정한아 그 말은 움직일 수 없다
차경희 우리가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황예인 편집 일기들

추모 특집 정과리 신이 되고팠던 이의 행로는 애잔하나니
김주연 죽음의 또 다른 연구
함성호 정전의 파괴자 박상륭

인문 연재 김현경 재생산의 문제 설정 [마지막 회]

기고 임지현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침묵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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