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귀족 이야기 (양장)

이청준 전집 32

이청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7년 1월 10일 | ISBN 9788932021522

사양 변형판 140x210 · 360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두 개의 『원무(圓舞)』와 두 개의 『이제 우리들의 잔을』
진술과 연애, 예술의 불가능성에 대한 질문

 

〈이청준 전집〉 32권으로 장편소설 『신흥 귀족 이야기』가 출간되었다(문학과지성사, 2017). 이청준의 첫 장편소설 『조율사』와 두번째 장편소설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에 이어 이청준의 초기 장편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원제(原題)는 ‘이제 우리들의 잔(盞)을’이다. (『조율사』는 1967년에 작가가 집필을 마치고서 4~5년이 흐른 뒤에야 『문학과지성』 1972년 봄호부터 1972년 가을호에 걸쳐 연재되었다.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은 『문화비평』 1969년 봄호부터 1970년 봄호에 걸쳐 연재되었고, 연재 당시 제목은 ‘선고유예’로 1972년에 첫 단행본으로 발표되면서 지금의 제목으로 굳어졌다. 이청준의 작품들 가운데 여러 장편과 단편들이 ‘개제(改題)’의 운명을 밟았다.)

 

 

이념과 제도에서 자유로운 여성지와 신문 연재소설에의 도전

앞서 장편소설 『조율사』와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을 발표한 후 이청준은 한동안 “창작 행위와 그것을 수용하는 현실 사이에 제도와 이념이라는 이중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 는 느낌과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그에게 대중성과 통속성의 첨병이라 불리는 여성지와 신문 지면에 소설을 연재하는 일은 이념과 제도의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독자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경험을 기대하게 했다. 이청준은 1969년 10월 30일 자 『조선일보』에 장편 『원무』의 연재를 시작하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그래서 모처럼 만난 독자들이 잔뜩 즐거워지고 말았으면 좋겠다. [……] 재미의 질이 문제다. 우선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 그래야 독자들이 아무리 즐거워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테니까. 이 일을 위해서 나의 젊고 성실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작정이다. 잘 해낼지 미리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 딴에는 이번 기회에 신문소설의 새로운 영토를 열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하다.”

 

 

두 개의 원무(圓舞), 두 개의 이제 우리들의 잔을

『신흥 귀족 이야기』(문학과지성사, 2017)는 위의 장편소설 『원무』 연재를 시작하고 마치기 전,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란 제목으로 월간지 『여성동아』에 1970년 1월부터 1971년 2월까지 총 14회로 연재된 잡지 연재소설이다. 연재가 완료되고 46년 만인 오늘에야 단행본으로 묶이면서 지금의 제목 ‘신흥 귀족 이야기’로 개제(改題)되어 독자들과 만난다. 작가 나이 삼십대 초반의 비슷한 시기에 연재소설에 도전하여 남긴 두 편의 장편소설에는 제목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 공존한다. 그중 앞서 소개된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청준 전집 5, 문학과지성사, 2011)은 신문 연재 당시 제목이 ‘원무(圓舞)’이다(『조선일보』에 1969년 11월 15일부터 1970년 8월 14일까지 총 230회 연재되었다). 집필 시기가 대부분 겹치는 두 소설 『원무』(『조선일보』)와 『이제 우리들의 잔을』(『여성동아』)의 연재가 끝난 후, 이청준은 먼저 연재를 마친 『원무』를 『이제, 우리들의 잔을』로 개제(改題)해 단행본으로 출간한다(예림출판사, 1978). 두 소설이 작품의 완성도에서 특별히 우열을 가려야 할 만큼 차이가 나지 않는 한편, 주제와 소재에서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무』가 『이제, 우리들의 잔(盞)을』로 출간될 때 덧붙여진 작가의 말을 참고하면, 제목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 함의한 뜻이 『원무』의 내용에 보다 잘 부합된다고 짐작만 할 따름이다.

 

 

갈등과 인고의 끝에 닿아 있는 석씨 별장의 내력

『신흥 귀족 이야기』의 표제는 이청준이 작품의 초고에 남긴 제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소설 본문에 ‘신흥 귀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로, 주인공 지상민이 제목을 밝히지 않은 채 내용만 요약하는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후일 그의 아내가 되는 정숙이 읽는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모두 ‘몰락하는 신흥 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작품 속 주요 화자인 지상민은 소설가이다. 소설은 지상민이 잡지사에 근무하는 민 형의 도움으로 T시 근교 석은영 모녀가 기거하는 별장(일명 ‘석씨 별장’)에서 지내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복했으나 몰락해가는 가문(‘신흥 귀족’으로 불린다)의 여인들―석씨 부인, 은영, 정숙의 비밀스런 내력과 그 내력을 관찰해 소설을 쓰고자 한 지상민이 소설의 두 축을 담당한다. 석씨 부인은 쇠락해가는 가세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꼿꼿한 여인의 표상으로 그려지며(지상민의 표현을 빌면 그녀는 ‘오만과 인내’의 인물이다), 아랫동서가 시어머니에게 혹독한 누명을 쓰는 바람에 맡기고 간 딸(은영)을 거둬 친딸처럼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다. 이 집안의 출생에 얽힌 비밀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불문율처럼 오랫동안 밖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석씨 집안의 기구한 이야기를 쓰고자 객으로 들어앉은 지상민이 여인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삶에 조금씩 관여하게 되고, 이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재구성하여 잡지에 연재를 하면서 변화와 갈등을 촉발시킨다. 지상민은 먼저 은영과 사랑에 빠지지만 소설은 소설대로 끝마치지 못한 채, 결국 자신을 짝사랑하던 정숙과 결혼하게 된다.

 

“저는 그 여인들에게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끝내는 스스로 용납할 수 있는 타협의 손길이 발견될 수는 없었던 한 사랑스런 인간들의 순수한 숙명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의 숙명의 숨결을 깊은 체념 속에서 조용히 응시해 보고 있는 체념이 깊기 때문에 더욱 침착하고 끈질기게 그것을 견디어가고 있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오만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되풀이 말씀드리지만 그 오만과 인내야말로 그 여인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몫으로 들고 간 가장 소중스런 인생의 잔이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잔인 동시에 또한 우리들의 잔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신흥 귀족 이야기』, pp. 355~56.

 

 

상호 텍스트성의 원리로 중첩되고 연결되는 이청준의 소설 세계

소설은 전체적으로 지상민이 민 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이야기와 상민, 석은영 모녀와 정숙 등이 등장하는 3인칭 서술의 이야기를 교차하는 구조를 띤다. 중간에는 제법 긴 분량으로 석은영의 일기가 삽입되기도 하는데, 도예를 전공하는 은영을 통해 이청준 소설의 오랜 주제의식 가운데 하나인 예술의 불가능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도 잠깐 드러내보인다. 이렇듯 『신흥 귀족 이야기』는 편지와 일기 등의 내러티브가 (지상민이 잡지에 연재하는) 소설과 (석씨 별장에서 벌어지는) 실제 삶 사이에 끼어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의 형식은 “내러티브의 안과 밖이 넘나드는, 삶과 이야기가 서로 얽혀 있는 ‘원무’를 서사구조로 취하고 있는 셈이다(이청준은 이와 같은 독특한 서사구조를 한참 후에 장편 『축제』에서 다시 차용한다)”(손정수, 해설 「내러티브들의 원무(圓舞)」, 『이제 우리들의 잔을』, 이청준 전집 5, 문학과지성사, 2011). 『신흥 귀족 이야기』는 이야기의 소재와 주제의 측면에서 그의 단편소설 「꽃과 뱀」 「바람의 잠자리」 「불의 여자」와 온전히 겹친다. 그 밖에 묘사나 인물 관계, 이름과 직업 등이 겹치는 작품들 역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장편소설 『젊은 날의 이별』, 단편소설 「행복원의 예수」 「귀향연습」 「치자꽃 향기」 「금지곡 시대」 등).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청준의 단편 「가수(假睡)」(『월간문학』 1969년 8월호; 『꽃과 소리』, 이청준 전집 3, 2012에 수록)에 등장하는 특이한 에피소드를 떠올려볼 수 있다. 정확히 1년 간격을 두고 같은 자리에서 두 사내가 기차에 몸을 던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먼저 죽은 사람은 주영훈이라는 사내였는데, 문제는 뒤에 죽은 남자가 자신이 사실 진짜 주영훈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기자 유상균, 검사 한치윤의 시각을 통해, 그리고 사고 열차의 기관사, 소설가 허순, 주영훈의 아내 등의 진술을 통해 사건에 대한 탐구가 진행된다. 한 사내가 주영훈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내에게 빌려주었는데 그 사내가 기차에 몸을 던져 사망하자 그는 자신이 이름으로는 죽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이름을 빌려간 사내의 삶에 자신을 대입시킴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마침내 회복한다. 두 명 모두 주영훈이지만, 둘 중 누구도 온전히 주영훈일 수 없다(이 주영훈이라는 이름은 한참 후에 『자유의 문』(1989; 『자유의 문』, 이청준 전집 22, 2016)에서 한 소설가의 필명으로 다시 등장한다).

『원무』(=『이제 우리들의 잔을』)와 『이제 우리들의 잔을』(= 『신흥 귀족 이야기』) 사이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가수」 속에 등장했던 두 명의 주영훈과 동일한 운명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제목을 내어주고 난 뒤 『이제 우리들의 잔을』은 유령과도 같은 소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두 소설 중 어느 쪽도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제목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편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원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실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제목의 두 소설 안에서, 그리고 두 소설 사이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원무』가 『이제 우리들의 잔을』로부터 제목을 취했다면, 『이제 우리들의 잔을』은 『원무』의 구조를 내재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두 개의 『원무』, 그리고 두 개의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 생긴 셈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의 잔을』과 『축제』의 서사구조적 상동성을 떠올려보면, 그리고 두 편의 『이제 우리들의 잔을』과 「가수」 속의 두 명의 주영훈의 관계와 『자유의 문』에서 다시 등장하는 주영훈을 생각해보면 이 『원무』는 두 편의 『이제 우리들의 잔을』과 이청준의 다른 소설들 사이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호 텍스트성의 원리에 의해 이청준의 소설들은 서로 중첩되고 연결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논의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미출간 작품들과 이청준 소설에서 배제되었던 작품들, 그리고 만년의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상호텍스트성을 그보다 더 전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편의 『이제 우리들의 잔을』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이 상호 텍스트의 세계에 두 가지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가 이후의 텍스트들에서 확장, 진화될 모티프의 싹을 앞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그 다른 하나는 반복의 원리를 통해 텍스트들 사이의 수평적, 순환적 차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두 편의 『이제 우리들의 잔을』을 포함한 초기 이청준 소설의 요소들은 이후 점차 진화하고 확장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원무』, 『선고유예』(=『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에서의 자서전 쓰기의 불가능성의 문제는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에서 더욱 심화되고, 또 소설 쓰기, 글쓰기의 일반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백조의 춤』(『여학생』, 1971. 2~1972. 3 연재. 이후 『젊은 날의 이별』(이청준 전집 6, 2014)로 개제), 『사랑을 앓는 철새들』(이청준 전집 33, 2017)에서 연애의 불가능성의 문제는 좀더 분명한 서사적 윤곽 속에서 변주되고, 『이제 우리들의 잔을』에 씨앗처럼 뿌려져 있던 예술의 불가능성의 문제는 더 진전되어 「남도 소리」 연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원무』에서 안 선생을 통해 제시되었던 ‘신념의 우상’의 문제는 「소문의 벽」의 김 박사, 「자서전들 쓰십시다」의 최상윤을 거쳐 『당신들의 천국』의 조백헌 대령에서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성격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기 구제로서의 소설 쓰기의 문제는 사회적 지평과 만나 균형 있고 완성도 높은 근대 소설의 면모를 획득해나갔던 것이다.

손정수, 해설 내러티브들의 원무(圓舞), 이제 우리들의 잔을, 이청준 전집 5, 문학과지성사, 2011, pp.528~30.

목차

프롤로그 7
말하는 나무들 17
조롱(鳥籠)과 새와 하늘 121
전설(傳說)들의 고향 181
우리들의 잔(盞)을 273
에필로그 344

자료 | 텍스트의 변모와 상호 관계_이윤옥 359

작가 소개

이청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40여 년간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춤추는 사제』 『이제 우리들의 잔을』 『흰옷』 『축제』 『신화를 삼킨 섬』 『신화의 시대』 등이, 창작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가면의 꿈』 『자서전들 쓰십시다』 『살아 있는 늪』 『비화밀교』 『키 작은 자유인』 『서편제』 『꽃 지고 강물 흘러』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 있다. 한양대와 순천대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한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산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 인촌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후에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7월, 지병으로 타계하여 고향 장흥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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