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기 그루브

서준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6년 11월 28일 | ISBN 9788932029276

사양 변형판 135x210 · 308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흐르고 순환하는 불안정한 세계
수많은 가능성을 낳은 채 유동하는 이야기

서준환의 네번째 소설집 『다음 세기 그루브』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고독 역시 착각일 것이다』(문학과지성사, 2010) 이후 6년 만의 소설집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편집증을 앓는 안드로이드, 기억상실증에 걸려 떠도는 남자 등을 다룬 수록작을 통해 실제와 망상 사이,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며, 현실의 항구성을 벗어 던진 불안정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특히 소설집 화자의 대부분이 ‘자기 진술’의 형태, 즉 타자와의 대화가 아닌 독백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감으로써, 화자의 언술 바로 앞에 독자를 앉힌다. 『다음 세기 그루브』는 독자가 화자의 진술 중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하느냐에 따라 무한히 생성, 변모하는 유동체로서 독특한 소설 읽기의 체험을 선사할 것이다.

 

우리가 서준환이라고 부르는 한 사람은,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계속 ‘들으면서’ 글을 쓰는 자, 또는 “말과 말하기의 자발적 동력학을 시연”하는 “말하기의 인공생명체” 같은 것으로 이 책에 출현한다. 그의 컴컴한 목구멍과 연결된 혀와 입천장 사이, 끈적거리는 침 속에서 우글대던 온갖 사물과 관념 들은 뜻하지 않은 몇 개의 말과 함께 마치 우연인 듯 바깥으로 뛰쳐나온다._박진(문학평론가)

 

 

 

망상과 착란의 무대에 오른 안드로이드,
실제와 망상 사이에 놓인 화자의 모놀로그

 

안드로이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과 닮은 행동을 하는 로봇. 또는 그런 지적(知的) 생명체. 공상과학소설 따위에 등장하는 인조인간을 이른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소설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자는 인간 같은 로봇, 즉 ‘안드로이드’의 존재이다. 흔히 인간과 로봇의 대립 속에서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서사의 수많은 공상과학소설이 있었다면, 이 책은 인간의 가장 아픈 고리인 혼란스러운 자아, 거기서 비롯된 정신 질환을 안드로이드가 닮을 수 있다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제부터 나를 압도하고 있는 자술의 무대 위에서 그런 모놀로그를 펼쳐가야 하는 배우다. 배우는 우울하고 신경증적인 안드로이드이다. 그러니 무대의 고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_「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

 

이 작품의 안드로이드는 무대 위에서 모놀로그의 형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의 말에 취해 이 말, 저 말 갖은 말들을 쏟아내는 작품 속 유일한 화자이기도 하다. 이 독백에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서 마음의 병을 옮아 신경정신과를 방문한 이야기, 거기서 만난 ‘마빈’이라는 의사에 대한 이야기, ‘강가딘’이라고 불렀던 엄마, ‘판다’라 불리는 와이프의 이야기(안드로이드에게 엄마와 와이프가 있을 리 없다!) 등을 끊임없이 풀어놓는다. 그의 많은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할 수 없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어지럽게 이어진다. 때문에 독자에게 그의 독백은 들으면 들을수록 망상에 젖은 ‘편집증자’의 언술로 느껴진다. 더욱이 그의 말을 뒷받침해줄 만한 타인의 진술이 없는 모놀로그의 특성상 그의 이야기 중 무엇이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점점 더 모호해지고 만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인간 세계로 내던져진 이 우주의 유민(流民)이니까. [……] ‘유민’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멋스럽게 들린다면 차라리 ‘난민’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다._「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

 

인간 세계에 그저 내던져진, (흔히 인간들이 그러하듯) 가족이나 고향 등 자신을 증명할 만한 무엇도 찾을 수 없는 안드로이드를 “우주의 유민”, 다른 말로 “난민”으로 칭할 수 있다면, 이러한 배경을 공유하는 인간 역시 “난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소설집 곳곳에서 ‘난민’을 등장시킨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기억 상실에 걸린 사람(「튜브맨」), 고향을 버리고 서울에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 가족(「창백한 백색 그늘」) 등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그중 「모조 노벨레 이어 하기」는 재벌가 딸 ‘미스 프랑신’과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난민 M’의 이야기이다. “고향이 지워진 사람”, 돌아갈 곳도 없지만 현실에 완전히 맞닿지도 못한 어떤 시공간에 난민 M이 있다. M의 이야기에서 독자는 난민 M의 존재뿐만 아니라, M이 하는 얘기 역시 믿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임을 발견한다. 재벌가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만 해도 의심스러운데, 거기에 더해 그녀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찾아왔던 이야기, 그녀의 가족들이 자신을 위협했다는 각종 믿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의심을 더하게 한다. “M 형,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요?”라는 작중 소설가 S의 말처럼, M의 사랑 이야기는 증거가 없는 망상일 거라는 확신만 가중된다.

그럼에도 독자는 읽는 내내 “난민 M이 강조한 대로 만약 이 이야기가 허구도 망상도 아닌 실제라면 어떻게 되나?”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모든 정황은 화자의 말이 실제가 아닌 망상일 거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실제일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든 것이다. 때문에 소설집은 망상과 실제를 구분하는 독자 개인의 판단에 따라 수없이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독존적 창조 정신을 무화시키는 창조의 등장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거듭 반복되는 글-글쓰기

 

「다음 세기 그루브」의 화자 ‘나’는 「나는 나다」라는 시를 준비 중인 시인이다. ‘나는 나다’라는 문장이 말해주듯, 나는 나-시인으로서의 자신, 개별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유난히 강한 사람이다. 이는 ‘시 쓰기’를 향한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그에게 시를 쓴다는 행위는 “주체의 절대적 창조성”을 바탕으로 한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적 우주”이다.

 

테크노 DJ란 이런 시인의 정의에 가장 날카롭게 부딪치는 창작 세계의 표현 주체입니다. 한마디로 이들한테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표현 세계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음악은 온통 남들이 이미 내놓은 음악적 결과물들의 부분적인 짜깁기거나 노골적인 혼성 모방의 흔적이니까요. [……] 그렇다면 창작 또는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개념 자체의 장(場)이 달라진 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시인의 창작 개념이 일렉트로니카의 필드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는 거죠._「다음 세기 그루브」

 

시 쓰기를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지내던 그는 디지털 피아노의 음향,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일렉트로닉 음악 등 자신의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소리를 접하면서 창작의 고유성과 독자성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시 쓰기로 채워져야 할 순수한 창작의 영역에 모방, 짜깁기 등으로 구성된 “혼종적인” 소리/텍스트가 자리하게 된 셈이다.

창조적 글쓰기에 대한 어떤 회의와 그에 대한 의구심 등이 이어지는 한편, 말로써 이를 다시 설명하고, 다시 이야기하고자 하는 화자들의 의지는 소설집 곳곳에서 다시 고개를 든다. 「창백한 백색 그늘」은 목사 손정목 씨의 사고를 두고 그 진실을 밝히려는 형사의 이야기다. 그는 자술서를 유독 중요한 자료로 여기기에, 목사의 아들 J 씨의 자술서를 중심으로 이 작품은 꾸려진다.

 

“그래서 자살한 형이 어떤 글에 그토록 매달렸다는 거죠?” 나는 J 씨가 자기의 말을 이어가도록 채근해야 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어떤 글이 형의 정신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습니다.”_「창백한 백색 그늘」

 

J 씨의 자술서를 토대로 J 씨를 심문하던 중 또 다른 ‘글’, 그의 형이 매달렸던 글이 튀어나온다. 형은 “죽음의 결단이 앞질러 형을 덮치고 말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결국 누구도 형이 그리고자 했던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글에서 다시 글로, 금방이라도 실체가 드러날 것 같았지만 형의 유고를 이어 쓰겠다던 J 씨마저 실종됨으로써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글쓰기, 언어에 강력하게 매달리는 화자들의 모습과는 반대로, 서준환의 글쓰기는 그들의 글을 사실상 ‘무(無)’로 되돌린다. 텍스트가 많아질수록 할 말이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만을 남긴 채 모호해진다. 즉, 다시 얘기를 해야 하는, ‘할 말’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오는 셈이다. “이 무한한 회귀의 움직임은 텍스트의 이면에 또 다른 텍스트가 일렁거리게”(박진 문학평론가) 만들며 소설집 전체에서 거듭 반복된다.

 

 

■ 본문 속으로

 

대뇌피질에 이식되어 있는 ‘순간녹화칩’은 언제 쓸 건가? 조만간 ‘원포인트 검색 서비스’도 부가 기능으로 딸려 나올 거라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그러면 방금처럼 궁금증이 생기는 매 순간 자네한테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해마에 바로바로 뜰 거야. 그런데 소문을 듣자 하니 그런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이 음악 접속만큼 쉽지는 않은가 보더군._「리핑Ripping」에서

 

얼마 전 어느 음악지에서, 다음 세기에는 방금 들으신 비렛 리암이나 요리보이 캄포스 같은 테크노 DJ들이, 언어로 시를 쓰는 지금 시대의 시인들을 대신해서 진정한 시인으로 추앙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사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그렇다면 다음 세기에는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쓰지 않고 어떠한 시인도 살아남지 않게 되고 테크노 DJ들의 짜깁기 예술이 그러한 시 창작의 독자적 영역을 대신 차지한다는 얘기일까요? 글쎄요, 다음 세기로 넘어가보지 않은 이상에는 알 수 없는 얘기겠지요._「다음 세기 그루브」에서

 

언뜻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모든 경우의 살인 사건에 죽은 자의 증언이 이처럼 다 절실하게 아쉬운 건 아니다. 어떤 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죽은 자가 입을 열 수 있다손 쳐도 사건 해결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망자가 난데없이 깨어나 살해당한 순간에 대해 증언하겠다고 나서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오히려 자신들이 다 풀어갈 수도 있을 일을 공연히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 몹시 부담스러워할 모범 경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수사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겠다며 일부러 죽음에서 깨어난 망자에게 경찰이, 구태여 수고스럽게 그러지 않으셔도 무방하니 계속 푹 쉬시라는 말로 모처럼 베풀어진 뜻밖의 호의를 사양하는, 그런 경찰의 진심 어린 사양에 몹시 무안해진 망자가 원망 어린 눈길로 허공을 흘겨보다 다시 새우잠 같은 죽음에 빠져들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서글프게 뒤척이는 장면 따위를 우스갯거리 삼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_「창백한 백색 그늘」에서

 

그렇죠. 미스 프랑신한테는 자기가 여진족 추장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남편이 있지요. 지금 저를 향한 질투에 가장 눈이 멀어 있는 사람. 하지만 두고보십시오, 제가 먼저 칠 겁니다. 이제는 저한테 저질 코미디를 강요한 여진족 추장의 토벌에 나서야죠. 그래서 삼배구고두례의 치욕도 갚고 난민의 저력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그러자면 우선, 당시 모습이 찍힌 동영상을 제 수중에 넣어야 할 텐데…… 어쩌면 또 하나의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할 수도 있겠죠. 그건 없던 현실을 새로 빚어내기도 하고 아예 지워버리기도 하는 슈퍼컴퓨터와의 싸움이 되겠지요…… 그 싸움이 무척 힘겨우리라는 각오쯤은 이미 단단히 다지고 있어요…… _「모조 노벨레 이어 하기」에서

 

이게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진 체험담이라는 것을 나더러 믿으라고? 나를 자기 망상의 공범 혹은 알리바이의 증인으로 감쪽같이 둔갑시켜놓고?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면 듣는 이들을 씁쓸하게 할 망상의 기록이다. 망상이 아니라면 망상을 빙자해서 제멋대로 꾸며낸 허구의 작화술이다. [……] 하지만 난민 M이 강조한 대로 만약 이 이야기가 허구도 망상도 아닌 실제라면 어떻게 되나? 실낱같은 반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_「모조 노벨레 이어 하기」에서

 

■ 작가의 말

 

依言離言 因言遣言(말에 의하여 말을 떠나고 말로 말미암아 말을 버린다)

글 쓰는 이로서 나는 아무 할 말도 없는 사람이다. 내 글은 어떤 ‘할 말’에서 시작하지 않고 아무 할 말도 없다는 데서 끝난다. 누구도 결백하지 않다.

해설을 써준 박진, 작가 프로필을 그려준 허남준 화백, 난민 친구 문상주, 김태환 선생, 김형중 형, 정영문 선배, 함성호 선배, 고등과학원 인디트랜스 멤버 여러분, 스마토나 판다,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와 편집부 조은혜 씨께 감사드린다.
2016년 11월
서준환

목차

리핑Ripping
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
튜브맨
다음 세기 그루브
전자인간 장본인
창백한 백색 그늘
모조 노벨레 이어 하기

해설 | 파괴하면서 생성하는 이 열광적 순환・박진

작가 소개

서준환 지음

200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소설집 『너는 달의 기억』 『파란 비닐인형 외계인』 『고독 역시 착각일 것이다』, 장편소설 『골드베르크 변주곡』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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