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112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5년 11월 27일 | ISBN

사양 변형판 223x152 | 가격 15,000원

책소개

겨울호를 엮으며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역사학계를 비롯하여 시민사회의 거센 비판을 야기하면서 우리 사회를 다시 한 번 거친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하다. 역사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교과서’라는 매체를 통해 전면 봉쇄하려는 정부의 정책이 국가라는 권위와 권력의 이름으로 역사 해석의 권한을 독점하려는, 이른바 전체주의적 발상의 소산이라는 지적이 과도한 우려는 아닐 것이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움직임이 헌법의 가치와 배치된다는 일부 지적처럼, 그것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대화와 토론의 장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일견 탈정치적 욕망을 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선택된 언어들은 그런 의미에서 이 논란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 의식 구조를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올바른’ ‘진실한’ ‘비정상적인 혼’ 따위의 비정치적인 용어들이 정치 공간에서 버젓이 횡행하는 현실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의식적 보수화가 도덕의 언어를 통해, 혹은 탈정치성의 언어를 통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도덕의 형식으로 강요되는 이데올로기는 정치의 무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다양한 입장들의 공존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역사와 정치에 대한 혐오와 패배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그리 편안하지가 않다. 무엇보다 신경숙 표절 사건을 계기로 문단 안팎에서 쏟아진 비판들 역시 넓게는 교과서를 둘러싼 세간의 논쟁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불안하게 유지되어온 한국 문학 특유의 시스템이 어느새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의와 무관하게) 문학을 둘러싼 다양한 문학적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독려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문예지들이, 다양한 문학적?이념적 차이들을 보여주지 못하는 가운데 대동소이한 활동에 안주할 뿐만 아니라, 비평이 출판사의 이익을 위한 광고 매체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뼈아픈 것임에 틀림없다. 문학권력이라는 단어는 이를 총체적으로 환기하는 상징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 개인의 윤리성에 대한 지적으로 귀결될 때 문학권력이라는 단어는 심정적인 반감을 유발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좀더 넓은 틀에서 보자면 한국 문학장 및 비평이 문학 활동의 자유로운 생산을 위한 제도적 장을 충분히 지탱해주고 있냐는 의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냉정한 현실 인식에 가까울 것이다. 이른바 오늘날의 문학장이 큰 틀에서 볼 때 소수 출판사들에 의한 독과점의 구조에 안주하고, 그로부터 다양한 문학적 목소리가생산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하여 창작의 영역에서부터 비평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저 독백적인 소통 구조에 함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문학동네』 가을호 좌담에서 작가 손아람이 던진 냉소적인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쉽게 흘려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모전의 순기능을 진지하게 말하고자 한다면, 저는 정말로 등단의 국가제도화를 논의해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공모전이 국가고시가 되더라도 그 순기능은 다 충족이 되거든요. 국가제도로도 문학적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문학 장르별로 나누어서 작가 자격증을 발급할 수도 있죠. 과거시험이 되는 거죠. 오십 종, 백 종으로 세분화해서 문학 자격증을 발급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런 방식이 터무니없다고 느끼지 않나요?”(「한국문단의 구조를 다시 생각한다」,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p. 92) 공모전을 국정화하자는 말처럼 들리는 손아람의 발언은 일종의 풍자에 가깝지만, 오늘날 한국 문학 생산의 유력한 제도적 장치로 지목되는 공모전을 비롯하여 한국 문학 시스템 자체가 공정성과 다양성의 차원에서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비관주의적 시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층 비관적인 것은 지난 가을호를 통해 제출된 일부 문예지들의 반응에서 이러한 비판의 심각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기미를 찾아보기 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언론이나 대중의 거센 비판에 내몰려 이 사태를 재빠른 사과와 손쉬운 자숙의 제스처로 무마하려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지성주의적인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출판사 및 그에 속해 있는 비평가들이 이러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어설픈 양비론에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들이 연일 계속되는 것은 신경숙 표절 사건이 일으킨 쟁점들이 아직까지도 공적 지평에서 책임 있게 논의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과사회』 와 문학과지성사는 표절이 제기한 여러 논란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비판의 사각지대에 놓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자체가 『문학과사회』 가 표절 논란과 무관하다는 알리바이가 될 수 없음을, 아울러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정당성을 입증해주는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문학권력이라고 통칭되는 상징 질서의 한 축으로 『문학과사회』 가 호명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며 『문학과사회』 역시 그동안 한국 문학의 상징 질서 속에서 편안하게 안주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일각의 시선까지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천문학』 가을호에서 문학평론가 서영인이 던졌던 비판을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문학과사회』 가 “표절로부터 번진 상업주의나 그와 관련된 문학 제도에 대해 미리 비판적 경계의 태도를 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문학과지성사 역시 신경숙 문학의 신화화에 일조한 것도 사실이며, 출판 자본과 담론 생산의 공유 구조라는 문학 제도 속에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사건과 전혀 무관한 태도를 보일 처지는 아니”(「한국문학의 독점 구조와 대중적 소통 감각의 상실」, 『실천문학』 2015년 가을호,p. 162)라고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평소 『문학과사회』 가 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의식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최근 『문학과사회』 가 보인 비판적 노력들이 현실적으로 충분하지 않고 유의미한 실천적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편 그것은 『문학과사회』 가 근래 내세웠던 비판들이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까지도 암시한다. 물론, 출판사와 문예지의 공조 관계 자체가 전적으로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냉정히 따져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섣부른 반론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우리는 『문학과사회』 와 문학과지성사가 지닌 한계에 대한 비판과 의혹을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다양한 비판적 목소리가 표출될 수 있는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작업을 앞으로도 끈질기게 꾸려나가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대화와 토론이 그저 원론적인 논의의 반복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소위 문학과 문학주의에 대한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인 인식이 문학에 대한 순수한 신념으로 통용되는 오늘날의 상황과, 문예지가 담론적 공공성이 촉발되는 장소로 기능하지 못하는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사유와 모색을 보다 근본적으로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고민이 그저 공허한 이론적 논의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통한 실천적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내외부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를 모색하고, 아주 머지않은 시일 내에 그 고민의 결과를 가시화할 것을 독자들에게 약속드린다. 이번 호 <기획>을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준비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는 신경숙 표절 사건이 비화시킨 문학권력론 그리고 문학 비평에 대한 비판이 그저 소모적인 인정투쟁에 그치지 않고 생산적인 논의와 토론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광호의 「문학 장치의 경계에서?‘문학권력론’의 재인식」 은 이번 기획의 총론 격에 해당하는 글로서, 최근 제기된 문학권력론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최근 논란을 보다 생산적인 토론으로 전환하기 위한 일환으로 ‘문학 장치’라는 대안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작품이나 비평 모두 문학을 둘러싼 장치들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라고 보았을 때, 그는 모든 장치 속에 잠재되어 있는 탈주체화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독려할 문학적, 비평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장의 구조가 안착되는 과정에 대한 자기 반성적?비판적 서술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이광호의 글은 『문학과사회』 가 1990년대 이후의 문학사를 바라보는 자기 성찰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동호의 「비평의 장소」는 최근 논쟁에 대한 각론적인 개입을 수행하고 있는 글이다.

그는 문학권력 비판에 대한 대응들이 ‘문학’ 혹은 ‘문학주의’에 대한 탈역사적 신념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비평의 탈정치화를 유발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같은 맥락에서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표절을 사유하는 원론적인 입장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평등과 환대의 이념이 상호 텍스트성의 정치적 이념일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비평의 열린 대화가 가능한 상호 텍스트적 공공성이 비평의 새로운 장소임을 역설하며 비평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다. 이광호와 강동호의 글에서 독자들은 현 사태에 대한 『문학과사회』 의 진전되고 구체적인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진의 「영구한 질문의 형식에 대하여」 는 앞의 글들에 비해 원론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근의 논쟁들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지적한다는 점에서, 현 사태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비판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의 글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객관성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비평의 당파적 태도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처럼 문학에 대한 구체적인 이념이 실종되고, 그저 문학에 대한 추상적인 이념이 화폐처럼 통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비평의 당파성이라는 오래된 신념을 제기하는 이강진의 글은 그 자체로 생산적인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유운성의 「밀수꾼의 노래」 는 영화비평가로서의 그의 경험과 현실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그는 영화 비평에 대한 위기론이 일종의 풍문처럼 만연해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 일종의 가짜 문제에 함몰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비평의 위기’라는 상투적인 표어가 대중과의 유리라는 관점으로만 좁게 이해될 때,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비평의 상업주의로의 투항을 유발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상투적인 대중성에 대한 경계를 바탕으로 영화의 존재론을 사유하는 것에 영화 비평의 윤리가 있으며, 더 나아가 “당대의 흐름의 체계와 대결하는 사유 혹은 사상으로서의 영화 비평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사유 혹은 사상으로서의 비평의 가능성’이라는 매력적인 테제는 대안적인 문학 비평의 미래를 고민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해 오래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모든 필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독자들의 각별한 관심을 희망한다. <지성>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인 지성인 도미야마 이치로의 글 「말의 정류 停留와 시작-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을 소개한다. 이 글을 통해 도미야마 이치로는 말을 한다는 것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함의와 수행적 성격을 논하고, 발화를 둘러싼 검열과 탄압의 정치적 기제를 분석한다.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즉 말의 정류 상태가 발화 주체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면, 이 부정에 대항하는 존재론적 정치와 근본적 증언의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하는 그의 글은 매력적이다. 결국 말을 한다는 것이 자유에 대한 인간학적 꿈의 원시적 발현 방식이라면, 억압 없는 자유로운 말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그의 논리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한 여러 현실에 메시지를 던지며 막대한 동시대성을 확보하고 있다. 정확한 번역를 위해 수고해준 심정명 씨에게 특별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동향〉에서는 양경언의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를 통해 최근 시집을 상자한 임승유, 안희연의 시 세계를 조망한다. 양경언의 글은 단순히 두 시인에 대한 충실한 해석에 머물지 않는데, 그것은 그의 글이 최근의 시적 흐름을 시적 주체의 왜소화로 설명하는 일반적인 독법에 맞서려는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주체가 예민한 감각으로 지금-여기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잠재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을 때 왜소한 주체라는 프레임이 오히려 그 잠재적 운동성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글의 요점일 것이다. 이 잠재적 운동성에 대한 독려가 시의 정치성에 대한 비평의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게 한다는 그의 유려한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해 가을에 타계한 비평가 김치수의 1주기를 맞아 <추모 특집>을 마련했다. 김광규의 추모 시를 통해 우리는 “환한 웃음으로 빛나던” 인간 김치수의 넉넉한 품격과 그를 향한 친구들의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김치수와 반세기 가까이를 함께해온 김병익의 회고 「김치수, 그와의 동행 반세기」 는 우리에게 숙연한 감동을 주는 글이다. 그의 글은 그 자체로 문학사적 풍경을 조망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면서 동시에 반세기 가까이 유지되어온 문학적 우정을 증명하는 일종의 공적 기록이다. 더불어 김치수와 함께 수학한 일본의 학자 사사키 겡이치의 글 「감동의 미학(소묘)」 은 문학에 있어서의 ‘감동’이 지닌 위상을 논한 글이자, 김치수 비평의 본령을 말해준다. 한국 문학을 둘러싼 냉소와 비관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오가는 가운데, 문학에 대한 첨예한 자의식을 잃지 않은 작가들에게 각별한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번 계절에는 황동규, 이준규, 이성미, 하재연, 김안, 박시하, 박준, 황유원, 안태운의 시와 김원일, 정용준, 송지현의 단편소설, 그리고 편혜영의 장편소설을 만날 수 있다. 아울러 백민석의 장편 「공포의 세기」 연재가 마무리된다. 그가 창작의 과정에서 견뎠을 공포와 고독 그리고 즐거움이 앞으로 많은 독자들과 공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_문학과사회

목차

겨울호를 엮으며

<기획>
비평 제도 권력
이광호_ 문학 장치의 경계에서?‘문학권력론’의 재인식
강동호_비평의 장소
이강진_영구한 질문의 형식에 대하여
유운성_밀수꾼의 노래 ―「영화 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이후,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

지성
도미야마 이치로_말의 정류停留와 시작―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김치수 1주기 추모 특집
김광규_그대가 있는 곳
김병익_김치수, 그와의 동행 반세기
사사키 겡이치_감동의 미학(소묘)

동향
양경언_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황동규_폴 루이스의 슈베르트를 들으며|기억의 집에서 나오며|미래 더듬기
이준규_1|2|3
이성미_형식|읽는 동안|오늘
하재연_27글자|합주곡|유리의 창
김 안_파산된 노래|우리들의 방|우리들의 유리
박시하_사라지는 그림들|새벽|센 강
박 준_9월 6일|여름의 일 2|파주 5
황유원_첩첩산중|겨울 탱화―圓通寺|백지상태
안태운_동양|산양|감은 눈으로

소설
김원일_울산댁
정용준_선릉 산책
송지현_구석기 식단의 유행이 돌아올 때
백민석_장편 연재 마지막회 공포의 세기
편혜영_장편 전재 홀 The Hole

색인 『문학과사회』 102 ~1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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