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란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라는 것을
첫사랑에게 배웠다고 적으리라.”
개인적인 마음의 역사에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상처의 기억……
우연이 만들어낸 농담 같은 불행, 그 속에서 발견하는 사소하지만 기적 같은 이야기
현대문학상, 올해의 예술상, 이수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작가
윤성희 신작 소설집!
자신만의 독창적인 소설 세계를 구축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더욱 탄탄하게 형성해온 작가 윤성희의 신작 소설집 『웃는 동안』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올해 펴낸 첫 장편소설 『구경꾼들』에서, 그간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소설 세계를 훌륭하게 확장하여 선보인 바 있는 작가이기에 장편 이후 찾아올 소설집에 대한 기대 역시 컸다. 소설집으로는 2007년 펴낸 『감기』 이후 4년 만이어서 그 반가움이 더한 이번 소설집에는 올해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부메랑」을 비롯하여 총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세부적인 전후 상황 설명을 배제하고 철저한 단문 위주의 글쓰기를 고수하는 윤성희의 소설은 짧은 이야기소들을 풍성하게 활용하면서 상처받고 빈곤한 이들의 삶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유머로 그려내어 특유의 힘을 발휘한다. 그 안에는 우연한 불행이 늘 농담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하여, 우연이 만들어낸 희극적 상황 앞에서 울어야 하는데 웃거나 웃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는 독특한 경험을 하며, 독자들은 종종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혹독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어쩌면 잔인해 보일 정도로 혹독한 이 우연성을 불가피하게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일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비참의 극을 달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겪고, 잘 웃는 인물들을 우리는 윤성희의 작품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강동호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태도는 “우연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는 “불행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짓눌리지 않고 불행 이후의 삶을 도모하는 일이다. 윤성희가 90년대적인 내면성의 미학을 초연하게 내어준 대신, 상처 입은 인물들 사이에서 맺어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조망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첫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에 이어 『거기, 당신?』과 『감기』를 거쳐 장편 『구경꾼들과』 이번에 펴내는 네 번째 소설집 『웃는 동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그리고 더욱 풍성하게 이어지는 윤성희 소설만의 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웃는 동안』의 특별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앙상한 서사의 별자리가 아니라 무수한 여담들의 은하수를 보는 즐거움은 여전히 윤성희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다._김형중(문학평론가)
윤성희의 소설은 감당하기 힘든 사태 앞에서 방어기제로 유머를 구사해왔다. 그러나 『웃는 동안』에서 주인공들이 유머로써 방어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태의 비참함이 아니다. 자신이 언젠가 누구에게 준 상처, 그 가해의 기억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윤성희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잘 놀고 잘 웃지만, 그것은 자기 연민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의도치 않게 일그러뜨렸다는 자책과 부끄러움을 감내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모두 개인적 마음의 역사에 은밀하게 각인된 어떤 근원적인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상처가 어느 날 문득, 우연히 드러날 때, 자신의 삶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과거에, 친구와 함께 가기로 한 여행에 가지 못하고 결국 그 친구 혼자 여행을 떠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는가 하면(「5초 후에」), 오랜만에 연락을 해온 동창에게 모욕을 주기도 했고(「부메랑」), 원숭이가 그려진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놀리던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도 있다(「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 뿐만 아니라 사생아라고 놀렸던 옆집 아이의 코뼈를 부러뜨리고, 배다른 형제의 신발을 우물에 버렸던 기억도(「공기 없는 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빛바랜 삶 속에 타인의 흔적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과 대면하기까지, 윤성희 소설 속 인물들은 딴 짓을 하고, 유머를 가장하고, 강박에서 기인한 행동들을 하고,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내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삭제된 타인의 고통, 타인에게 자신이 가한 위해의 기억으로 인해 그 모두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의 인물들이 노년이거나 이미 죽은 자인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삶의 진짜 모습은 앞을 보며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지금 이 순간엔 알 수 없기 마련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지금 이 순간이 ‘웃는 동안’이라고 이번 소설집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짜이든 가장이든, 어쨌든 ‘웃는 동안’은 잠깐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시간이다. 저 도저한 우연과 불행을 견디면서 끝내 살아 있는 바로 이 순간. 아주 사소하고 아주 당연하지만, ‘살아가는’ 기적을 만들어주는 이 시간이 바로 ‘웃는 동안’은 아닐는지. 내 손에서 우연히 빠져나간 ‘부메랑’이 필연적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동안, 그리하여 내 삶의 실마리를 풀게 되는 순간, 그것마저 소중한 깨달음으로 간직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마도 “공중부양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를 주는 ‘웃는 동안’의 힘이다. 그리고 윤성희의 네 번째 소설집을 읽는 시간도 그 ‘웃는 동안’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현재만을 보며 살아가는 지금의 ‘웃는 동안’과 내 손에서 빠져나간 부메랑이 다시 돌아와 거짓으로 포장된 자서전을 처음부터 고치게 하는 그 순간까지, 삶의 시간을 폭넓게 아우르는 깊이를 윤성희의 네 번째 소설집 『웃는 동안』에서 독자들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또 하나의 사소한 기적이 아닐까.
그녀의 긍정은 인간이 선험적으로 선하다는 대책 없는 믿음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 소통이 한 순간에 비약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어떤 맹신과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그 긍정의 뒤편에는 항상 어떤 고통의 순간과 고독과 침묵의 세계가 고여 있음을 직관하는 일을 동반해야 하니 말이다. 이처럼 우연이 야기한 필연적 불행과 더불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마음과 자책의 시간이 섞여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번 소설집의 분위기가 이전의 윤성희 소설에 비해 한층 쓸쓸해졌지만,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바야흐로 불가능한 자서전 쓰기라는 윤성희의 독특한 소설 쓰기를 통해 새로운 윤리적 지평에 대한 사유 가능성이 열리는 중이다. -강동호(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
네 번째 소설집의 제목을『웃는 동안』으로 정한 것은 오래전이다. 세 번째 소설집을 막 출간했을 때쯤. 그땐「웃는 동안」이란 단편을 쓰기 전이었고, 동일한 제목으로 단편을 쓰게 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쓸 단편들에 웃는 장면을 하나씩 넣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주인공들에게 웃는 동안만이라도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어떤 소설에는 웃는 장면이 있고 어떤 소설에는 없지만, 여기 들어가 있는 모든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자주 웃었다. 즐거웠다.
「어쩌면」은 죠스바를 먹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쓰는 시간보다 네 명의 여고생들과 노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 귀신들 덕분에 한 동안 내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이 소설을 쓴 뒤, 일 년 넘게 소설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를 그만 쓰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듣기도 했고, 매년 서너 편의 단편을 쓰다보니 좀 지치기도 했다.「5초 후에」라는 단편이 좀 어수선한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욕심이 앞섰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그래서 반성하는 의미로「웃는 동안」을 썼다. 시 쓰는 K선배가 내게 극장에서 소파를 훔치던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는 그걸 언젠가 소설로 쓰리라 마음먹었다. 소설이 잘 안 풀릴 때. 슬럼프 비슷한 것이 찾아올 때. 그때를 위해 아껴두었던 이야기였다. 쓰다 보니, 이 친구들에게, 「웃는 동안」이라는 제목을 선물해주고 싶었다.「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는 서울에 관한 테마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이다. 서울에서 한 번도 안 살아봐서 소설이 이렇게 되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사라진 육교들과 사라진 구멍가게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목은 신동옥 시인의 시「별들의 옷」을 읽다 떠올렸다. 시에 나오는 구절은 이렇다. “소년과 고양이는 한사코 담장 위를 걷지.” 초등학생 때 나는 담장 위를 걷는 걸 좋아했다. 양팔을 뻗고 담을 걷는 기분. 그 기분을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매일 매일 초승달」 이 소설은 소매치기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가 관절염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쓰게 되었다. 첫줄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보니, 혼자 소매치기를 하는 것보다는 자매들이 같이 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다른 이야기로 바뀌었다. 발표를 할 당시에는「매일 매일 초생달」이었는데 표기법에 맞춰 변경했다. 주인공의 나이를 생각하면 초승달이란 말보다 초생달이란 말을 더 자연스럽게 썼을 것 같았고 그래서 표기법이 틀린 걸 알면서도「매일 매일 초생달」이란 제목을 고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나 혼자만의 고집처럼 느껴졌다. 이 단편을 발표한 후 장편 연재를 시작 했고 그래서 일 년 정도 단편을 쓰지 않았다. 「공기 없는 밤」을 쓸 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등단한 이후로, 일 년 이상 단편 쓰기를 쉬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오래 보기 대회에 나가는 할아버지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사이 몇 번 시도하다 실패하기도 했다.「공기 없는 밤」을 쓰고 나니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비슷한 소설을 한편 더 쓰고 싶어졌다. 그러던 중, 오래된 선풍기 청소를 하다가 가짜 자서전을 쓰는 여자가 떠올랐다. 선풍기를 청소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선풍기를 다시 조립한 뒤, 책상으로 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부메랑」이 그것이다.「눈사람」은 신문 기사를 보고 떠올린 소설이다. 일본의 최고령자가 실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다는 기사였다. 죽은 뒤 방에 갇힌 유령을 상상하게 되었다. 또 귀신 이야기야! 라는 말을 들을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쓰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게 되는 유령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 섬세한 소리를 표현해내는 일이 내겐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문장은 눈 내리는 소리를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투박했다. 「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을 쓸 당시 나는 자주 산책을 했다. 어떤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아주 느린 공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쓰다 막혀도 초조해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다 한 줄. 그렇게 썼다. 나이 든 주인공이 나온 소설을 연거푸 썼더니 좀 지루해졌다. 다시 소년이나 소녀가 나오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폴짝, 팔짝, 이런 단어에 어울리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한 달 정도는 매일 폴짝, 팔짝,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녔다. 그렇게 해서 제자리멀리뛰기를 하는 소년이 내게 왔다.「구름판」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보니, 그냥 이 소설이 좋아졌다.
작가의 말이 길어졌다. 자신감이 없어질 때 말이 길어지는 법인데. 그렇게 보이더라도, 이번 작가의 말에는 열편의 소설들을 하나하나 호명해주고 싶었다. 문장이 되기 전에 내게 찾아왔고 문장이 된 후에도 내게서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열편의 소설 안에 와글와글 모여 있다. 그들은 사소한 계기로 나에게 와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그저 매일 썼다 지우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들 스스로 알아서 했다. 고맙다. 내 문장이 그들의 삶을 따라가지 못해 미안하다.
어쩌면
매일매일 초승달
웃는 동안
공기 없는 밤
부메랑
눈사람
5초 후에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
구름판
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
영원히 우연적인 것이 기적을 구원한다_강동호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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