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문학상 3회 - 1991

박완서 / 소설 / 미망(未忘)

황동규 / 시 / 몰운대행(行)

선정 개요

본사가 주관하는 이산문학상의 네 번째 수상자로, 시 부분에서 『한 꽃송이』의 정현종씨와 소설 부분에서 『먼동』의 홍성원씨가 결정되었다. 진지한 본심과 충실한 예심 과정을 거쳐 결정된 이번의 수상자들은 우리 문단의 중견으로서 이미 확실한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한 위에, 풍요한 세계에의 소망과 깊은 역사적 삶의 전망을 보여준 업적이 높게 평가된 것이다. 『한 꽃송이』는 순수한 자연에의 동화를 꿈꾸면서 그 꿈을 통해 더럽혀진 우리 삶의 모습을 비춤으로써 진정 살 만한 혹은 살아야 할 만한 세계에의 시적 열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5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먼동』은 국권을 상실해가던 20세기초의 상중하 세 집안의 변전하는 이력을 통해 역사의 변화와 그 변화의 틈새에 끼인 한국인들의 다양한 삶과 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두 수상자의 문학적 성취에 깊은 치하를 드리며 이들의 수상으로 이 문학상의 권위가 보다 높아져가고 있는 것에 우리는 자축하지 않을 수 없다.

박완서

수상자: 박완서

장르: 소설

작품: 미망(未忘)

수상 소감:

『미망』은 너무도 힘들게 쓴 작품입니다. 그 경황중에 어떻게 그 긴 소설을 썼을까,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다 저려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조금이나마 대견스럽다거나 작품이 만족스럽다는 얘기하곤 다릅니다. 오히려 그 와중에도 집필을 계속한 자신이 혐오스러워질 정도로 그 작품엔 처음부터 제 힘에 부치는 고난이 엎친 데 덮쳐왔습니다. 『문학사상』에 연재 예고가 나가고 첫회분을 쓰는데 막내딸이 교통 사고로 중상을 입었습니다. 첫회부터 구멍을 낼 수 없다는 어쭙잖은 사명감 때문에 병실에서 밤을 새우며 원고지 칸을 매웠습니다. 거듭되는 입퇴원과 재수술로 딸의 투병 생활은 일 년이 넘어 계속되었고 병실에서 원고지 칸을 메워야 할 때마다 연재를 처음부터 없던 일로 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며, 그런 상황에서도 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자신을 지겨워했는지 모릅니다. 딸이 다시 건강과 행복을 되찾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다시 암 병동에서 원고를 쓰면서 혹시 이 소설에 액운이 따르는 게 아닐까 하는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문득문득 전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까짓 글쓰기가 뭐관데 하는 쓸쓸한 허망감밖에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암과 싸우는 남편 곁에서 나 역시 액운과 싸우듯이 죽자구나 글쓰기에 매달렸드랬습니다. 그가 암에 지고 나자 저도 더 이상 액운과 싸울 기력도 없어졌거니와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액운도 그 정도로 끝을 보았으니 떨어져나갔겠거니 싶은 참담한 안도감 때문에 더욱 허탈했습니다. 그러나 액운은 액운답게 잔혹할 뿐 아니라 비열하기도 해서 제가 참담을 지나 거의 평화로운 패배감과 비탄에 잠겨 있을 때, 다시 한번 저를 강타했습니다. 반려를 잃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자식을 앞세우는 참척까지 겪고 나자 비로소 액운이 조금도 무섭지 않아졌습니다. 그 동안 소설 쓰기를 중단하지 않으려고 악전고투한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기조차 싫었고 다시는 글을 쓰는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 후의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순전히 살아내는 거였습니다. 어떻게 또 오늘 하루를 살아내나 하는 게 매일매일의 벅찬 과제였습니다. 태어난 이상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피할 길 없는 가혹한 명제에 어느 틈엔가 슬며시, 내가 만들어낸 작중인물들의 운명 또한 비롯됨이 있었으니 마무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이랄까 작가 의식이랄까 그런 것이 가중돼왔습니다. 붓을 꺾은 지 채 일 년도 안 돼서입니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고 여겼건만 막상 작품을 완결지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나니 액운에 대한 미신적인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천 장 가량은 마치 뒤쫓는 악마에게 덜미를 잡힐까 봐 죽자구나 달리듯 미친 듯이 써갈려 겨우 완결을 지었습니다. 순전히 제가 만들어낸 인간들의 운명으로부터 손을 떼기 위한 작업이었건만 그 결과는 완성을 위한 완성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시 조금씩 글을 쓸 수가 있었고,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제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이 없어진 이 세상이나마 다시 사랑하기 시작한 징후였습니다. 끔찍하고도 민망한 노릇이나 숨김없는 고백입니다.

작가 소개:

朴婉緖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재학 중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불혹의 나이에 『여성동아』 여류 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중앙문화대상(1993)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한무숙문학상(1995)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인촌상(2000) 황순원문학상(2001)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창밖은 봄』 『배반의 여름』 『도둑맞은 가난』 『엄마의 말뚝』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의 작품집과 『휘청거리는 오후』 『목마른 계절』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도시의 흉년』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의 장편소설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산문집과 동화책을 출간했다.

황동규

수상자: 황동규

장르: 시

작품: 몰운대행(行)

수상 소감:

교수직이 예술가, 특히 작품만을 써서는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시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마도 시간을 내려 들면 그 어느 직장 사람보다도 낼 수 있는 직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면 또 몰라도 시간이 없어 시를 못 쓰는 시인이 어디 있으랴? 보편적인 예는 아니겠지만, 나는 바쁜 때일수록 씌어지는 작품의 양이 많아진다. 한참 바쁘다 보면 이러다 정말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냐, 그에 앞서 쓸 것은 써놔야지, 하는 생물적인 위기 의식이 작용하는지는 모르지만.

교수직은 시쓰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시 혹은 예술은 보여줘야지 가르쳐서는 안 되는데, 대학에서는 가르치는 일에 몰두해야 되기 때문이다. 예술 혹은 시는 항상 체계화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대학 강의는 체계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대부분이 남의 이야기 반복인데도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그 착각은 온몸을 바쳐 작품을 제작하는 일을 방해한다. 호머나 굴원(屈原) 이후 전세계의 뛰어난 시인치고 대학 교수 혹은 그와 비슷한 직종에서 일했던 사람을 손꼽아보시라. 시인으로서 내가 마음 독하게 먹고 해낸 일이 하나 있다면 직업이 교수인 나 자신과 제대로 싸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냐 교수냐의 ‘실존적’ 갈림길에 선 적이 어디 한두 번뿐이랴. 우리나라 화가 가운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모두 대학과 관계가 없었거나 대학 교수직을 중간에 미련 없이, 당시의 경제 사정을 생각하면 정말 미련 없이, 버린 사람들이다.

작가 소개:

시인 황동규는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영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꽃의 고요』 등의 시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대산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산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