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문학상 11회 - 1999

최하림 /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선정 개요

제11회 이산문학상 수상작이 최하림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로 결정되었다. 김주연·오규원·김인환, 이 세 분의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올라온 여러 시집들 가운데서도 이 시집이 개별 시들의 고른 질적 수준과 탄탄한 구성, 그리고 곳곳에 격조 높은 수작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단연 빼어난 시집이었다고 평가했다. 최하림씨는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등장한 이후 30여 년 동안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줄기차게 시 창작에 매달려왔던 시인이다. 양으로 보면 같은 연배의 동료 시인들보다 과작일지는 모르나 그 질적 수준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목소리로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온 중견 시인이다. 오히려 그의 시적 업적에 비한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모자랐으며, 그는 항상 논의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에 대해 한 비평가가 그의 시 창작의 방식과 연결시켜 해석한 적이 있듯이, 그러한 그의 자발적인 소외는 그의 삶의 태도와 작품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었다.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겸손한 태도가 작품의 성격과 수준을 결정짓는 시집으로, 시인의 투명한 시선이 사물을 온전하게 드러나게 한 다음 시인은 행간 속에 그 자취를 숨기는 방법으로 시행을 이끌어나간다. 그래서 이 시집 속에서 세계는 한껏 열려 있고 사물은 서로서로를 제한하지 않으며, 시인은 이 모든 것들이 제 스스로 빛날 수 있도록 자신을 고독 속에 유폐시킨다. 수상을 하게 된 최하림씨에게 축하를 드리며, 늦었지만 이 상이 그의 지난한 작업에 따뜻한 격려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심사평

「시가 뭐길래 삶을 걸었을까」(김주연)

김광규·노향림·정진규·최하림·천양희 등 다섯 분의 시인이 본심의 대상이었으나 최종 심사에 올라 우리를 즐겁게도 하고, 괴롭게도 한 분들은 정진규·최하림 두 시인이었다. 이러한 진술은, 다른 세 시인들이 앞의 두 시인들보다 그 작품들의 질이랄까 수준에 있어서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와는 별로 깊은 관계가 없다. 작품의 질·수준에 있어서는 우리 시와 시인들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더불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큼 다섯 시인들이 호형호제(呼兄呼弟)의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최 두 시인이 앞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여러모로 보아, 이들이 아무래도 형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판단과 관계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다른 시인들보다 문단 선배라거나 연배가 위라는 단순 사실 때문에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 아니다. 보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정·최 두 시인이 시에 건 압도적인 진정성에 심사 작업이 압도되었다고나 할까.

정진규 시인은 1960년 등단 이후 40년 간 시 이외의 인생이 딱히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외길을 걸어온 모름지기 시단의 중진이다. 그가 내놓은 수많은 시집들, 그가 힘들여 경영하고 있는 유수한 시 전문지를 통해 배출된 숱한 시인들은 확실히 금세기 후반 우리 시단의 중요한 버팀목으로 상당한 기여를 해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특히 근년에 들어 그가 왕성한 정력과 명민한 감수성, 그리고 삶의 깊은 지혜로 일구어온 연작시 「몸詩」와 「알詩」들은, 현란한 췌사와 전위적 몸짓으로 시의 새로움을 분식해온 비슷한 계열의 불확실한 시들을 제압하면서 원숙의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어왔다. “이번 여름 전주 덕진공원 연못 가서 햇살들이 해의 살들이 이른 아침, 꼭 다문 연꽃 봉오리들마다에 플러그를 꽂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로 시작되는 저 말들의 농염하면서도 능숙한 자유자재로움을 보라. 어떤 상도 최근의 그의 시작업에는 결코 충분할 것이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감회이다.

수상자로 결정된 최하림 시인의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는 시를 읽고 싶어하고, 쓰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읽어볼 시집이라고 나는 권고하고 싶다. 그 이유는 시를 대하는 이 시인의 진정성, 그리고 작품들이 보여주는 투명성에 있다.

시가 잠들면 고단한 하루도 잠들고
무명의 시간 속을 나는 가게 되리니
무명의 꽃인들 어느 길목에 피어
기다려주지 않으랴.

비관과 낙관이 즐겁게 손잡고 있는 그 시집의 끝부분을 읽으며 나는 심사를 잊고 그 조용한 평형과 명징한 명상에 문득 눈시울이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평면적 단순성이 폭삭 주저앉은 상황 깊숙한 곳에서 온갖 복잡함을 가볍게 감싸안고 떠오르는 저 투명성! 그렇다, 이제 우리 시는 감동을 되찾아야 한다. 서정시의 허위성을 갈파한 시의 이론은 이미 반세기가 지났고, 죽음과 절망의 아방가르드 혹은 표현주의적 절규도 마찬가지로 이제 맛이 가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나는 쉽게 읽히는,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이 사색의 시인을 이산문학상과 관련하여 추천하는 작은 기쁨을 고백한다.

「따뜻한 한 몸 또는 세상 안아들이기」(오규원)

마지막까지 남은 다섯 사람의 시집을 다시 읽고, 나는, 정진규와 최하림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수상자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두 심사위원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고, 그 결과는 최하림이었다.

정진규는, 이번 시집 『알詩』에서도 그렇지만, 『몸詩』 이후부터 그의 이름을 지우고 작품을 내놓아도 즉각 알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는 시인이다(스타일에 관해서는 두려워하며 말해야 한다. 스타일이란 예술가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옥」 「맨발」 「잠적」 「눈물」 「이별」 「그리움」 등등이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일차적으로 그의 시 특성은 구어체 어조의 잘 조직된 시구에서 나온다. 문어체 성격의 구문까지도 짧게 나누고 변화시키고 또 병치 병렬해 독특한 리듬까지 동반시킨다. 그런 수사적 특성 속에서, 우리는, 직관과 관조,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부터 유래한 활발한 연상이 이룩해놓은 생명 감각과 미적 쾌락을 맛볼 수 있다. 그의 시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따뜻한 한 몸”이 거기에 아름답게 숨쉬고 있는 것이다.

최하림의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는 대단한 서정적 인식의 깊이를 얻고 있는 시집이다. 그 깊이는,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사물 사이의 “애매한 파동”과 그 흐름을 안정시키기 위한 새들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수준까지 닿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황현산의 뛰어난 해설에 나와 있는 지적을 그대로 옮기면 “시인이 주체를 비워 세상을 안아들이고, 주체의 말이 타자의 말에 대한 좋은 번역어”가 되도록 할 수 있었던 결과이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새가 애매한 파동을 집 밖으로 물어내듯, 주체가 애매한 주관적 판단이라는 이름의 관념을 세상 밖으로 내보낸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그의 모든 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관찰과 관조를 통해서 또는 상징화를 통해서 타자의 말을 번역하는 대신 타자의 말 위에 주체의 말로 또 다른 의미 질서를 만들고 있다. 「구천동 시론(詩論)」이나 「반세기가 번뜩 지나간 어느 해 저녁」 등등 많은 작품이 그렇다. 이 시집을 낸 후 발표한 「빈집」(『동서문학』, 1999년 여름호)에서도 상징화 작업을 여전히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집」이 더 좋다. 이 세계가 실존 속에 더 철저하게 발을 넣고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탓이다. 개인적 입장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언제나 선택이 아니라 선택 이후이다. 「나무가 자라는 집」도 「빈집」도 세계와 닿아 있기는 마찬가지이며, 어느 쪽의 문에서도 열리는 것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명의 세계로 떠나는 순례자」(김인환)

제11회 이산문학상을 심사하는 자리에 참석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불편한 느낌에 갇혀 있었다. 첫째는 이산 김광섭의 생애 자체가 풀기 어려운 암호가 되어 나를 갑갑하게 했다. 어려운 한자어로 가득 찬 관념시를 쓰다가 시 대신 언론과 정치를 택하여 오랜 시간을 보내던 분이 무엇 때문에 시로 돌아왔을까? 그리고 그 다시 찾은 시가 어떻게 그토록 명징할 수 있었을까? 이산이 이룩한 놀라운 비약 앞에서 나는 기가 죽는다. 나의 문학에 대한 정열이 하루하루 흐려지기만 하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나보다 고수인 선배들에 대하여 무어라고 운위(云謂)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황이 나를 갑갑하게 했다. 이문재와 황지우의 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으나 그들에게 시의 우열을 떠나서 조금 비켜달라고 부탁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싶었다. 그러나 정진규와 최하림-내가 개인적으로 우리 문단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선배에게 그 아닌 다른 시인의 이름을 거명한 이유를 대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만사를 불고하고 욕망을 따라가는 욕망의 순례자이고 욕망의 희생자이다. 시인은 항상 한정된 것들을 넘어 움직이는 욕망의 벡터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 시인에게는 과욕(寡慾)과 지족(知足)의 지혜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시와 선(禪)은 다 같이 세속을 거슬러 나아가는 형제라고 하겠지만 시는 욕망을 따르고 선은 무욕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시선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정진규와 최하림은 육십 평생 세속의 직업을 버리고 욕망의 외길을 따라왔다. 40년이 넘는 그들의 시력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잔인하게 짓밟힌 고통의 역정이었으나 바로 그 욕망의 용광로 속에서 빚어져나온 보석들은 누가 보아도 희생의 응분한 보람이 될 만큼 찬란하였다. 평생토록 여자의 다리를 따라다니던 사내가 병상에 누워 뜻밖에도 간호사의 다리에서 완벽한 다리라는 평생의 갈망을 이룬다는 트뤼포의 어느 영화처럼 욕망은 끝내 대가를 지불한다. 시의 역사는 자잘한 계보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넘어가는 기념비적 역사이다. 정진규란 산과 최하림이란 산 중에서 어느 쪽이 높을까?

두 차례의 심사 회의에서 나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두 분 심사위원의 말씀을 들었다. 동업자로서의 추억과 우정과 염려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는 시의 역사와 문화의 힘에까지 도달했다가 급전직하로 떨어져서 한국 시의 수준을 대표하는 시인들 중에서 누구를 가릴 것이냐라는 실질적인 문제로 돌아왔다. 정진규는 우리 삶의 핵심을 이루는 무언가 절실한 것을 탐색하는 여행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얼이라고 하건 알짬이라고 하건 그냥 단순히 우리라고 하건 인간에게 간절하고 절실한 것들을 만나는 순간은 항상 지복(至福)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정진규의 시들은 시에 대한 믿음과 삶의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최하림에게 절실한 것들은 그가 탐색하기 이전에 그를 습격한다.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의 공격을 받고 그는 휘청거린다. 어느 날 나뭇가지 하나가 갑자기 전율하면서 침묵을 강요하고 또 어느 날은 새들이 찾아와 절대의 현존을 드러내준다. 최하림은 시를 불사르고 시 없는 무명(無名/無明)의 세계로 가라앉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정진규와 최하림의 차이는 교회주의자와 무교회주의자의 차이이다. 최하림은 시밖에 모르면서도 시라는 교회를 믿지 않는다. 무교회주의의 어떤 분위기가 마지막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예심평

「시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작품들」

올해의 이산문학상은 규정에 의해 시집에게 주어질 순서였다. 지난 두 해 동안의 시집들을 검토하면서 새삼 발견한 것은 아직 엄연하게 존재하는 시의 영토였다. 물론 90년대적인 문화 상황 속에서 시에 대한 대중적·문학적 관심이 엷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시는 그런 문화적 상황 이전에 있다. 여전히 많은 시인들이 이 시대의 가장 예리한 언어를 담금질하고 있고 눈이 밝은 독자들은 언제든 그것에 마음의 살을 벨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시장’에서 대접받기 힘들었던 시는, 근대 이후 어떤 특정한 ‘시의 시대’도 누려본 적이 없었고, 그렇다면 풍문으로 떠도는 ‘시의 종언’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의 영토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시장’이 아닌 어떤 다른 공간에서 문학이 아직 소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비한 증거이다.

우리는 18권의 적지 않은 시집을 본심에 올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시대의 시적 징후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서이다. 예심위원들은 어떤 특정한 문학적·세대적 편향을 지우고 우리 시언어의 다채로운 결과 무늬들을 보려 했다. 우리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시언어의 미적 합리성만을 심사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 축제적인 자리에 이토록 아름다운 시인들의 풍부한 작품들을 초대할 수 있게 되었다.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문학과지성사, 1998)
김정란,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세계사, 1997)
노향림,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창작과비평사, 1998)
박남철, 『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평사, 1997)
박영근,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 1997)
백무산,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작과비평사, 1999)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
연왕모, 『개들의 예감』(문학과지성사, 1997)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열림원, 1999)
이문재, 『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
정진규, 『알시』(세계사, 1997)
주창윤, 『옷걸이에 걸린 양』(문학과지성사, 1998)
채호기, 『밤의 공중전화』(문학과지성사, 1997)
천양희, 『오래된 골목』(창작과비평사, 1998)
최하림,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문학과지성사, 1998)
함성호, 『성 타즈마할』(문학과지성사, 1998)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

최하림

수상자: 최하림

작품: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수상 소감:

시골로 내려온 뒤, 제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환경이 변하고 방언들이 변하고 유리창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슬픈 시선도 얼마쯤은 해소되었으며, 자연이 넘치는 생명력으로 역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여름 햇빛은 나무 이파리들을 타고 리드미컬하게 흘러내리는가 하면 강에서 안개는 피어올라 산을 지우고, 나무들을 지우고, 또 그것들을 복원해놓습니다. 자연에서는 경이와 기적이 무시로 일어납니다. 오늘 저에게 주신 이 뜻깊은 상도, 자연이 가져다준, 경이에 속하는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저는 시가 구원의 형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유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작되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 탓이었던지 수년 전 저는 병으로 쓰러졌고,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조금 끌고 다닙니다. 지팡이를 짚고 다닐 때도 있습니다.

지팡이는 세상을 오래 산 노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팡이에는 머잖아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구부려 하늘에 인사드린다는 겸손의 겸(謙)자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실로 저는 하늘에, 나무들에게, 새들에게, 벌레들에게, 풀꽃들에게, 우리가 더불어 이곳에 살고 있으며, 그러므로 동등한 권리와 위의를 갖고 있다는 뜻의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도, 젊은이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꿈꾸는 목소리로 말하자면 제 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인사이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 말을 건네고 감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깊은 가을밤, 귀를 모으고 있으면 금강 상류에서는 오리떼들이 갈갈갈갈 울고 있으며, 일렬 횡대로 기러기들이 날아갑니다. 지난 여름 산행 길에서는 뻐꾸기들이 뻐꾹뻐꾹 울었습니다. 저는 그 울음 소리를 색다르게 느낄 수 있도록 전감각을 동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뻐꾹’ 소리는 ‘꿀꿍’ 소리로 들렸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뻐꾸기를 꿀꿍새라고 하며 ‘꿀꿍꿀꿍’ 운다고 합니다. 저는 순간이나마 고향 소리를 회복했습니다. 시인은 고향을, 모국을, 시원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라는 것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놓는다는 것은, 역으로 현실의 문을 꼭꼭 닫고 오두막에서 숨쉬려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속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담장은 실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이 속담은 시인 범대순 선생께서 제게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담장을 튼튼하게 하고, 그 속에서 개인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개인이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고 개인이 행복하지 않는 공동체는 의미를 잃습니다. 개인이 그의 존재성을 확인하며, 가장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에 이르는 감각을 총동원할 수 있는 순간이 올 때 초월은 이루어지고 영혼의 울림이 울린다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도 오늘도 강둑을 걷고 산행을 합니다.

꿈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이런 ‘꿈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상의 영광을 저에게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이산문학상 운영위원회, 문학과지성사 제위께도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 아내와 딸과 아들, 두 사위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작가 소개:

1939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散文時代)’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64년 「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 『침묵의 빛』 등이 있으며, 그 밖의 저서로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이 있다.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산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