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문학리뷰] 얼굴에서 발견한 ‘얼’과 ‘굴’의 거리

081 정영 시집(시462)_앞

정영 시집, 화류(2014, 문학과지성사)

글_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어떤 시집은 마치 한 권의 유서처럼 읽힌다. 그 사람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장소에 이미 가본 것 같고, 오랫동안 같은 풍경을 보며 말해온 것만 같은 오해가 나의 감각마저 점등시켜버릴 때가 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무방비하게 했는가. 사는 내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처럼 늘 죽음과 동거하며, 수십 번쯤 죽고 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말[言]이라면 그러할까. 낭자하게 찢어지고 문드러지고, 통증을 간직하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들숨과 날숨 사이”(「시인의 말」) 그 어디쯤이 또 그러할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산 사람의 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음성들을 들을 때마다 나 또한 지워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는 왜 이토록 스스로가 지워지는 것을 모두 감내하며, 줄어드는 주체로 시편을 채우고 있는 걸까.

정영의 시집 화류에서 등장하는 대다수 주체들의 목소리는 이미 죽은 사람의 음성처럼 들린다. 아니 죽기로 작정한 자아이거나 귀신의 읊조림을 빌리지 않고서는 발화가 불가능한 주체들로 보인다. 자신의 탄생이나 삶의 알리바이를 넌지시 비추는 진술들을 종합해보아도 그러하다. 울음과 웃음이 혼동으로 뒤엉키며 “먼 꿈을 꾸는 신음”(「가련한 사전」)에서부터 시작된 시적 주체의 음색은 “제 태생의 흔적을 지우려는”(「사랑은 반항하는 새와 같아서」) 숨 가쁜 새들의 움직임과도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가 불투명하지만 끝끝내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운동성들을 통해 제 삶의 ‘없는 위치’들을 보장받는, 즉 다시 말해 여행 상태를 잠재하고 있는 주체다. ‘일상’이 아니라 ‘여행’ 혹은 ‘이동하는 과정’ 들이 삶이며, 일상은 오히려 삶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념의 가혹한 상승 상태를 이 시적 주체는 겪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현실에서 탈각된 주체의 행방은 다수의 시편들 속에서 새의 움직임이나 음성, 음악, 바람 등 분자 운동을 하는 여러 소재들과 결합하여 우리들을 갈 수 없는 곳,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홀린 듯이 인도한다. 그러므로 “이탈을 꿈꾸는 영혼을 붙잡아”(「잔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세상 모든 ‘조급한 탄생들’ 곁에 앉혀보는 일을 실행하는 이유 또한, 제 스스로가 “태어난 건 첫 한숨을 쉬기/ 바로 전”(「비망증명」)이었다고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태어난 이후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직전 그러니까 ‘삶의 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사이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채우고 있는 어떤 영혼의 운동 같은 것들이 이 시적 주체가 탄생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것은 “전생에 숨어 다음 생이나 기다리”(「수레국화가 그려진 집」)는 귀신 혹은 육신을 입지 않은 영혼의 시선으로 삶을 인지하는 시적 알리바이가 된다.

그렇다면 왜 삶 이전의 시적 주체가 이토록 ‘사랑’이라는 삶의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까. 죽은 이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라면, ‘사랑’을 제 정념 속에 각인하기에는 너무 모자라거나 넘치는 상황일 텐데, 종교적 사랑이 아님에도 이런 불가능한 사랑의 감각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의문스러운 일이다. 「간절」이나 「멍을 토하는 자」와 같은 시편들에서도 나타나듯, “먼 냄새”들에 이끌려 이미 “늙어가는 기술을 하나씩 알아채고 있는” 자신을 늘상 마주하는 시적 주체는 “사는 게 게워내는 일의 연속이라”는 것 또한 이미 알고 있다. 삶을 다 깨닫고 난 이러한 주체는 죽은 주체인 동시에 이미 삶을 다 살아낸 주체인 것이다. 즉 불완전하고,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정서를 내재할 수도 없는 죽은 영혼의 주체임에도, 삶에 깊숙한 뿌리를 인지하는 입체적인 정념 상태를 경유해 주체는 사랑을 발설한다. 물론 그것은 ‘다 겪은 사랑’, 그러니까 이별 이후의 사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오지 않는 공」에서 자신을 떠나보낸 모든 타자들과 물상들이 제 뿌리를 흔들고 있다고 언술하며 겨우 산 사람의 감각으로 “뿌리가 아픈 날”을 인지하려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서로를 버려주는 이 아름다운 사랑!”(「집 밖의 삶」)이라며 터져 나오는 육성을 다 내뱉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 존재 전부를 던지고 난 사랑에 대해 말해보겠다는 시적 의지가 강하게 노출되고 있다. 정영은 자신이 온몸(물론 이 몸 또한 없는 몸일 수 있을 테지만)으로 겪은 자아 바깥의 모든 “거인들”(「천 개의 서랍」)을 제 서랍 안에 가두고 “제 몸을 태우기”로 작정한 태양처럼 쓰린 정념들이 드나드는 입체화된 몸으로 사랑을 말한다. 생사를 오가듯 굳은 울음과 결심들로 타자를 겪어내겠다는 서늘한 사랑을 말이다. 그 끔찍하리만큼 어두운 정서의 통로에는 ‘얼’과 ‘굴’이 있다.

「얼의 굴」이라는 가편에서 정영이 직관해내는 제 얼굴의 입체성은 범상치 않은 폐허들로 가득하다. 얼굴은 주체의 외연이지만 얼굴에 나타나는 ‘얼’이란 그 주체의 생성 이전부터 존재를 흔드는 정신의 누각들이다. 그 안에 ‘굴’이라는 공간성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주체와 타자가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적 서사까지 확보해낸다. 다시 말해 정서 생성 이전의 의식과 정서가 생성되고 있는 시공간이 “내 끔찍한 얼굴” 속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셈이다. 이렇게 시인은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의 심사 모두를 이 짧은 시편 속에 압축해놓는다. “비밀이 생긴 건/ 말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이”(「피에타」)기도 하지만 “버리고 싶은 몸이 하나씩 는다는” 의미를 알아채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흐린 순간들을 가시화하면서, “숨을 참을수록 비참”한 스스로의 삶과 대면하는 통고 과정을 정영은 ‘없는 몸 이전의 에너지태’들로 발산하며 형상화한다. “들숨과 날숨 사이”를 오가는 동안 생사를 다시 건축하고 허무는 고된 고행의 반복들이 이 시집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러한 주체가 어쩌면 조금 무모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때문에 그 무모하고 불가역적인 자리 곁으로 스스로를 앉히려는 내 고행의 심사까지도 어쩌면 나의 교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의 유서 속에서 나를 훔쳐보는 일이 나를 살게 하는 또 다른 알리바이라면, 나는 그의 얼굴에서 서로가 모르는 끔찍한 ‘굴’을 긴 시간 지나가야겠다. 그것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몸으로 이곳을 지탱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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