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노트] 방드르디가 보여주는 멋진 신세계

040_방드르디_앞

방드르디, 야생의 삶』(미셸 투르니에 지음, 고봉만 옮김)

글_에디터 김뚠뚠(편집4부)

방드르디(프라이데이)를 아시나요?

로빈슨 크루소.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고 외딴섬에 헝클어진 머리, 덥수룩한 수염, 억센 손을 한 초로의 사내가 절로 떠오른다. 홀로 28년간 무인도에 표류한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영화와 문학작품 등에서 변주되어 오며, ‘로빈슨류’라 불리는 아류작들을 낳았다. 신화적인 인물로 등극한 그의 입지는 문학사의 어떤 인물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그렇다면 로빈슨과 함께 섬 생활을 해나갔던 원주민 청년은 기억하시는지? 그의 이름은 ‘프라이데이’. 금요일을 뜻하는 말로 프랑스어로 하면 ‘방드르디’다. 로빈슨에 비한다면 그는 희대의 ‘듣보잡’ 캐릭터로,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속에서 마치 존재감 없음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미미하게 그려진다. 프라이데이는 문명의 수혜를 받지 못한 야만인으로, 계몽의 대상으로 비춰질 뿐이다. 투르니에의 눈에는 그러한 지점들이 마뜩지 않았던지,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색채를 거둬내고 ‘방드르디’를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로빈슨 크루소를 탄생시켰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와는 사뭇 다른 매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투르니에는 이 책에서 그들은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대니얼 디포-horz

대니얼 디포(왼쪽), 미셸 투르니에(오른쪽)

로빈슨, 그 역시 나약한 인간이었을 뿐

18세기 초 디포의 ‘로빈슨’은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열악한 환경을 딛고 문명을 일으키는 영웅적 면모가 강조되었다면, 20세기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고립된 인간의 절망과 고독감이 더욱 짙게 배어나온다.

“젊은 양반, 출발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도착은 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라오. (중략) 자연이 미쳐 날뛰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소. 그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밤, 로빈슨이 탄 배의 선장은 이 말을 끝으로 운명을 달리한다. 홀로 무인도에 조난당하게 된 로빈슨은 ‘스페란차’라고 이름붙인 섬에서 살아갈 방도를 찾아나간다. 하지만 로빈슨은 섬의 자연적인 질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동안 자신이 발을 담그고 있던 문명사회의 방식대로 섬을 개척해나가려 한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섬에서의 생활은 로빈슨을 절망에 빠뜨리고 그는 멧돼지들이 뒹구는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는 일에 더욱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으로 그것을 극복해내려 한다. 자신을 집어삼킬지 모르는 깊은 고독감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모른 채 아무 의미 없이 계속되는 ‘노동’과 ‘규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통제하려 하는 그의 모습은 문명사회의 질서가 내면화된 개인의 공허한 내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유로운 야만인, 방드르디

로빈슨의 생활은 ‘방드르디’의 등장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로빈슨은 우연히 죽을 위기에 처한 원주민 청년을 구한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의 말에 복종하지만, 왜 이 섬에서 유럽의 문명국가에서 하는 방식을 따라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방드르디는 감사의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로빈슨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방드르디는 이 모든 조직과 법률, 정해진 방식에 따라 치러야 하는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땅을 갈아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집을 짓는 이유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방드르디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로빈슨이 배우고 경험해온 것들과 매우 다르다. 로빈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드르디는 가시투성이 선인장에 로빈슨이 아끼던 화려한 옷가지와 팔찌, 목걸이, 귀걸이 등의 보석으로 치장한다. 단지 재미를 위해서. 로빈슨에게는 더없이 값진 것들일지 모르지만, 방드르디의 눈에는 보물과 금화보다 색색깔의 조약돌이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 그를 로빈슨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방드르디의 실수로 폭발이 일어나 그동안 그들이 일구어놓은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된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원시 자연 속에 들어앉게 된다. 과거의 흔적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을 옭아매던 문명의 그늘이 말끔히 거둬진다. 이로써 엄격과 주인과 무력한 노예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로 재정립된다. 기존의 『로빈슨 크루소』가 로빈슨이 방드르디를 문명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투르니에의 작품 속에서는 방드르디가 로빈슨을 본연의 삶으로 이끄는 주체다. 로빈슨은 그를 통해 태평양의 무인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이제 그들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힘들여 사냥하는 대신 근처에 다가온 새들을 적당히 때려잡아 구워 먹는다. 햇빛에 맨살을 드러내는 일을 꺼려했던 로빈슨은 당당히 태양 아래 몸을 내보이고 구릿빛 피부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처럼 생기를 되찾는다. 두 사람에게 더 이상 무의미한 노동은 없다. 그들은 일을 하는 대신 모래사장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고, 수영, 높이뛰기, 물구나무서기 등 온갖 종류의 놀이를 즐긴다. 이러한 ‘유희’야말로 삶에 활기를 더하고 만족을 주는 본능적인 행위다. 이성이라는 잣대로 스스로를 통제해왔던 로빈슨에게 방드르디는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깨닫게 한다.

 

 2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한 장면

문명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것은 방드르디의 요리법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로빈슨에게 꼭 필요했던 접시와 냄비 같은 취사도구가 그에게는 필요치 않다. 날짐승을 익힐 때 적당히 흙반죽을 이겨 구워내면 털을 뽑을 필요도 없고, 고기 맛도 좋을뿐더러 따로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다. 재료를 조합할 때 이렇다 저렇다 할 원칙도 없다. 단순하게 자연 상태 그대로를 활용할 뿐이다. 방드르디가 화살을 만드는 목적도 사냥감을 더 깊고 강력하게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더 높이 더 오랫동안 날아가는 화살을 만드는 데 있다. 방드르디의 손에서는 화약마저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축제의 밤에 아름다운 불꽃을 감상하기 위한 놀이도구로 탈바꿈한다.

방드르디는 풀 속에서 팔락거리는 하얀 얼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데이지.”
“그래, 그건 데이지야” 하고 로빈슨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데이지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 버렸다.
“이봐! 우리가 틀렸어. 그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나비였어” 하고 로빈슨이 바로잡았다.
“하얀 나비야. 그건 날아다니는 데이지야” 하고 방드르디가 로빈슨의 말에 대꾸했다.

조개를 줍고 있던 방드르디가 맑고 깨끗한 모래밭에서 하얗고 둥근 얼룩 모양의 조그마한 자갈을 주워 로빈슨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달을 가리키며 로빈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달이 하늘의 조약돌이야? 아니면 이 작은 조약돌이 모래의 달이야?”
그러고는 로빈슨이 이 별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책을 읽다보면, 방드르디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과 태도는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내가 옳다고 믿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정말 그러한지, 한 가지 기준으로 타인과 나를 구분 짓고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까지 구속함으로써 수많은 갈등과 대립을 낳은 것은 아닐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이 벌어졌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에게 화를 내는 대신 로빈슨을 닮은 인형을 만들어 내동댕이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두 사람은 변장을 하고 역할을 바꿔 그들 사이의 있었던 일들을 재현하는 놀이를 벌인다. 이를 통해 서로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고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면서 상대에 대한 존중을 유지한다. 이러한 방식은 감탄을 자아낸다. 방드르디의 삶을 ‘야만’이라 부른다면, 로빈슨이 고수하고자 했던 ‘문명’ 생활-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노예 삼고, 총구를 겨누고, 모든 것의 가치를 금전적인 이익으로 환산하는-은 더 나은, 더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원고를 읽는 내내 이렇게 재미난 작품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책장을 넘기는 일이 못내 아쉬웠다. 반전(?)이라고 느껴질 만큼 인상적인 결말을 비롯해 곱씹어볼 만한 철학적 질문들이 가득한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의 신세계다. 무엇보다 기존의 로빈슨 크루소를 무색하게 할 만큼 방드르디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로빈슨의 그늘 아래 가려져 있던, 뜨거운 태양빛보다 강렬한 방드르디의 생명력에 흠뻑 취해보길 권한다.

미셸 투르니에 지음 | 고봉만 옮김
카테고리 문지 푸른 문학 | 출간일 2014년 7월 17일
사양 변형판 124x188 · 212쪽 | 가격 9,000원 | ISBN 9788932026350
수상/추천 아침독서운동본부 추천 도서 외 1건

미셸 투르니에 소설가

192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교와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67년 마흔세 살의 나이에 처녀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발표하여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수상했고, 1970년 『마왕』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살아 있는 자세히 보기

김뚠뚠 편집자

지속가능한 놂을 꿈꾸는 서울살이 4일차. 고양이와 카페인을 애정합니다. 문학과지성사 편집4부 에디터. 자세히 보기

3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