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문학리뷰] 마르께스주의자의 종말의 서사시

서울

손홍규 장편소설, 『서울』(창비, 2014)

글_노대원(문학평론가)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어떤 재난도 낯설지 않다. 파국의 서사도 묵시록의 언어도, 더 이상 허구나 문학의 형태만으로 존재하는 특정한 방식의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대의 혈관에는 불안과 공포의 불길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어느새 우리는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손홍규의 장편소설 『서울』은 과도하게 현재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서사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소설에 담긴 세계가 완고한 리얼리즘의 규율이 아니라 ‘재앙 이후 이야기’나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 혹은 ‘좀비 소설’의 장르적 발상과 관습을 따르고 있다 해도 말이다.
손홍규의 『서울』은 폐허다. 도시가 폭격을 받았다고 하니, 아마도 이 재앙은 전쟁의 참혹한 결과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도 정확한 원인이나 책임을 누구도 알 수 없다. 증오와 분노, 끊임없는 질문만이 주어질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사산(死産)하거나 기형의 아이를 낳으니 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이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방사능 오염을 추정해보아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터. 게다가 신음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 아닌 자들이 대낮을 점령한 듯 거리를 짐짓 쾌활하게 활보하고 있으니, 이곳은 “납득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해”버렸고 “현실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났”(p. 30)다.
가까스로 이성적 추론을 수행하던 독자들은 어느 순간 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소설 밖의 독자들이 아무리 부지런히 음모론을 구성해보아도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미제의 사건․사고들에 가로막히듯 은폐된 진실 앞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모든 추측들이 답이 되어버리는 괴상하고 불편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처럼 『서울』의 디스토피아는 모든 징후적․현실적 해석을 끌어안는 동시에 특유의 모호성과 장르적 혼종성 탓에 명쾌한 해석과 독해는 불가능한 소설이 되었다. (이 점이 지금-여기를 환기하는 이 소설의 강력한 수사학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손홍규의 『서울』은 아비규환의 지옥도다. 이곳은 불타고 무너진 빌딩과 시체가 아니면 학살자들과 성난 짐승과 좀비들이 장악한 세계다. 그리고 그들에게 쫓기는 소수의 생존자들, 곧 소년과 동생, 노인, 여자와 소녀, 개와 말의 세계다. 전적으로 소수자minority들만이 살아 있고 그들만이 겨우 숨어 지내는 세계. 그러니 『서울』을 ‘두려운 낯설음the uncanny’의 세계라고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언캐니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따라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 한때는 익숙하고 친밀했던 것들의 기괴성을 의미한다.

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의 동료들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두 타고난 좀비였다. 세상사에 무관심했으나 무관할 수는 없었으므로 세상이 시키는 일만 의무를 수행하듯 꾸역꾸역 치러내면서 아무런 열망 없이―그러나 이 세상이 자신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좋겠다는 간절한 열망만은 잃지 않은 채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도 산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p. 233)

 살지도 죽지도 못한 좀비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유로운’ 노예로서의 노동자/소비자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해석이다.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결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러나 사람과 너무도 흡사하기에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부르기에도 어색한 저 새로운 종족들”(p. 197)은 기괴하게 신음과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매우 일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분주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작가가 보기에, 서울(자본주의적 삶의 시공)의 일상은 고통이며, 그 고통의 나날은 아무렇지 않게도 계속된다.
『서울』은, 그리고 작품 속에서 ‘서울’이라 통칭되는 동시대의 현실은, 예외적 비정상성이 일상적으로 구현되는 세계다. 이 소설에서 재앙의 원인은 모호하고 은폐되어 있는 반면, 생존자들이 느끼는 고통의 감각만은 지독하게 생생하며 구체적이다. ‘나는 고통받고 있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 부조리한 세계감(世界感)과 세계 인식은 『서울』 바깥의 독자들에게도 공통적인 것이리라. 세계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이나 불확실성과는 대조적으로, 이 소설 속에서 무참하게 파괴된 지역들은 서울의 특정한 실제 지명들로 명시된다. 이 구체성은 작가와 독자들이 발 딛고 있는, 거대 도시 속에서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전복하며 그 불안한 이면을 폭로한다.
그 모든 비관과 추악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시적 울림으로 충만해 있다. 폐허의 아름다움과 숭고처럼 진부한 것도 없겠지만, 생존자들이 폐허를 뚫고 어딘가로 자꾸만 나아가듯, 손홍규의 소설은 이 진부한 미적 구조를 통과해 침묵과 선(禪)적인 언어가 직조해낸 서늘한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언젠가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소년의 동생은 분명 새로운 세계에서의 시작(詩作/始作)을 꿈꾸었을 것이다. 또한 희망과 절망, 종말과 신을 향한 생존자들의 끝없는 질문은 이 종말의 서사시가 단순히 현실에 대한 비관과 공포의 (쾌락을 제공해주는) 극단적 버전만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서울』은 환상과 신화를 부조리의 역사극과 공존하게 하고, 반인간과 비인간의 상상으로 새 인간과 신세계의 가능성을 묻던 ‘마르께스주의자’ 손홍규의 소설적 여정과 고투에 이어지는 새로운 한 페이지다. 그것이 설령 사산될 꿈일지라도 기형의 존재로 태어날 꿈일지라도, 작가는 이 폐허의 도시에서 아름다운 종족의 꿈을 수태하고 있다.

손홍규 소설가

손홍규는 197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 『이슬람 정육점』 등이 있다. 자세히 보기

노대원 평론가

서강대에서 국어국문학과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동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고,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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