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문학리뷰] 박진성의 첫 시집 『식물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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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굳이 고통에서 시작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시의 동기가 명확한 감정이나 통점이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모든 시인이 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거나 그곳에다 자기 윤리를 견주어 불화의 사태를 개별 주체의 통증으로 인식하는 방식은, 상당수 시인들의 미적 전략이자 권리일 때가 많았다. 그것은 우리들이 인지하고 있는 시가 가진 실존적 표지나 혹은 시인에 의해 재현된 세계에 대한 핍진함과 같은 준거들이 그간 ‘시’와 ‘시인’의 거리를 좁혀서 보는데 집중하는 모멘트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울어버릴 수 있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한 시인의 ‘시인 됨’의 존재 양식인 양 왕왕 착각하는 시각 또한 늘상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좋은 시는 그 시를 둘러싼 ‘거리들’의 조율 속에서 입체적으로 우리에게 인지되는 것이지 명징한 시인의 서사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는 시를 쓰는 개별주체의 사연이 아니다.

나는 박진성의 시집 『식물의 밤』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곡비(哭婢)라는 상태에서 그의 시적 지향을 유추해보려 한다. 장례 때 상주와 가솔들을 대신해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울어주던 몸종을 일컫는 말인데, 당골이 성했던 전라도 지방에서는 무당이 곡비 역할을 하는 사례마저 잦았다고 하니, 우는 데는 이골이 난 집단이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곡비’란 우는 상태를 직업이나 생계로 삼아 감정 없는 울음을 이어 붙여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대부분은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남성인 경우는 희박했으며 여성이 대다수였다. ‘감정 없이 울음’을 잘 타는 곡비의 경우 이 집 저 집을 오가면서 울어주러 다니는 방랑을 했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곡비’는 영매인 무당과는 다르다. 감정을 결정하지 않고 일단 울어버리고 말겠다는 극단의 의지가 곡비에게는 모멘트로 작용한다.

박진성의 이번 시집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은 축축하고 낭자하게 ‘완결된 훼손’이 아니라, 봉합이 미처 다 되지 않은 상흔 아닌 상흔들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주체가 감각하는 고통이나 병증으로는 쉽게 귀결될 수 없는 외부에서 도약된다는 점에서, 발화가 되었으나 발화되지 못한 저마다의 몫을 숨기고 있는 침묵들에 가깝다. 물론 침묵이란, 말로 쏟아져 나오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사태를 배제하는 순간에만 우리에게 당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침묵 또한 다른 방식의 말의 서식지이자, 모든 말의 시작이고 끝이며 미결정의 상태를 은밀하게 끌어안고 있는 잠재태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택한 정념은 색채가 결정된 어떤 색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투명을 투명 그대로 내버려두는 데서 시작된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방랑과 배회의 시선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빈집에 들어가 빈 식탁에 물병을 놓고”(「방랑괴객」) 오고 싶은 시적 주체의 의지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의지를 따라 같이 겪다보면, 익명으로 “떠도는 귀들”과 “목소리들의 주인은, 움직이라고”(「익명에서, 익명에게」) 그렇게 움직이라고, 그저 방식이나 질서도 없이 방랑만 하겠다는 익명의 누군가가 희미하게 비친다. 그러고는 곧 “나는 누구입니까. 나의 질문은 정말 나의 질문입니까.”(「질문들」)하고 주체도 객체도 아닌 어떤 미결정의 밤이 흩어져 있다. 이런 익명의 주체들은 율동하며 타자의 아픈 자리들을 하나 둘 헤아리며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다시 돌아갈 자신의 장소가 없으니 어쩌면 이런 형태의 고백은 더 끔찍한 방랑이자 방어다.

타자들과 접촉하는 순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나 대신 꿈을 꾸는 모르는 여자”(「과일의 세계」)나 「장례식은 다 컸다」와 「꽃은 떨어지면서 성별을 갖는다」에서 등장하는 ‘누이’, 그리고 「변신」과 「창문」에서 연민하는 ‘안나’라는 존재 또한 각각 미결정의 의지를 가시화하는 여성 주체들이다. 이 시편들을 모두 남성 화자의 발화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여기서 타자가 된 여성 주체들은 향기만 있는 허상을 딛고 밀도화된 불가능한 여자이거나, 누이 또는 꽃이거나 ‘안나’처럼 이미 성별이 생략된 존재들이다. 그러니 그들을 남성적 시선에서 대상화하거나 명징한 주체의 의지 속에서 여성 콤플렉스female complex를 가진 시적 화자의 발화법이라고 한데 모아 규정하기 또한 힘들다. 다시 말해 발화 주체도 성별과 형체를 잃고 타자들도 미분화되어 혼란스러운 사태에서 발화자의 각각의 연민 상태만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시적 화자를 포함해서) 모두 헤어지고 떨어지고 분열되고 통증을 앓는 등의 고통의 좌표 위에는 나란히 서 있으나 그 고통의 질감에 있어서 강력한 주체가 누구인지, 이 슬픔은 누구의 것인지도 대개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으레 사태와 감정과 진술들의 율동들만 있을 뿐 어느 것도 겨냥하지 못하는 곳으로 분위기만 흐른다. 하물며 ‘안나’라는 대상 또한 그 호명 방식이 어쩌면 시적 주체 자신인 ‘나가 아닌 나’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박진성의 이번 시집에서 말로 쏟아진 것들의 종합된 정념들은 “결핍과 결핍이 교미”(「대화들」)하는 순간을 통과하고 있다. “잘못 배운 기도의 중심을” 무너트리고자 하는 「키스」에서도 지각의 순간보다 떠도는 것에 집중하고 있으며, 떠도는 말들의 경로를 따라 읽히는 「소문」의 경우도 결국 소문이 없는 소문들이다. 이런 경향 때문에 미결정 상태의 조각들이 맺는 복수들이 시편 전체에서 자주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런 복수들이나 ‘우리’에 대해, 박진성은 “국경 없는 잠”이나 “우리는 안과 밖이 없는 담장들”(「담장들」)이라고 수사를 하며 분유된 각각들에 대해 그저 그 자체의 자질대로 내버려두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 또한 명징한 주체의 장소나 대상들 간의 모멘트들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다만 “사지에서 세계가 튀어나오기 시작”(「최초의 기억에서」)하는 최초의 기억을 둘러싼 욕망이라든가 물의 세계를 복원하려고 하는 의지들, 그러니까 「물의 나라」 「물의 바람」 「갠지스의 바람」과 같은 시편들에서 보이는 복원 의지들은 주체의 근거가 되는 태초의 상태와 접몽하여 몽환적인 자기 의지를 각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처음 만나는 식물들”을 만나서 확인해보겠다는 결기가 아니라 “최초의 기억이 자주 바뀌었다”고 고백해버리는 내려놓음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말을 하되 말의 몸을 얻지 못한 침묵의 밀언이 아니겠는가.

그간 박진성의 시를 읽어내는 방식이 병(病)이라는 테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도 없지 않거니와, 그의 첫 시집의 경우 병증을 앓고 있는 시인과 시적 화자의 거리가 제법 가까웠다는 것, 정념의 대리자로 ‘나무’의 생리와 ‘꽃’의 생태 등이 사용되어 가족사적 내력을 쏟아냈다는 것이, 박진성의 시를 철저히 병 아래에서 오독하게 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한데 이번 시집에서는 박진성은 병을 앓고 있는 주체뿐만이 아니라 자리가 명징한 주체에서도 일정 부분 거리를 두려는 양태를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아있는 정념 자체는 쓰리고 아픈 자리를 융기시키는 독특한 시선이 묻어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말해지되 말 되는 순간 또 침묵이고, 최초이되 변화하는 진보 가능태로서의 최초다. 그 과정 속에서 어쩌면 이제 박진성이 시를 쓰는 이유는, 말에게 말의 본성을 돌려주려는 고된 길에 들어서려는 시인의 결기가 보인다. 시인과 시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아니 가까울 수밖에 없었던 명징한 고통의 자리를 지나 고통의 넓이나 깊이까지 만들어낸 이번 시집은 빼어나고 참혹하다. 그러므로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박진성의 이번 시집을 나는 그의 첫 시집이라 부르고 싶다. 그의 아름다운 사전이다.

 


 

새벽에 집을 나와 한참을 걸어야만 직성이 풀릴 때가 있었다. 구실을 삼을 만한 충분한 이유도 없이, 마냥 모르는 골목길로 들어서서 구불구불 큰길을 찾을 목적 아닌 목적을 마련해서 헤매보는 것. 아직 불을 놓지 않은 창문의 수를 헤아리다가 또 의미 없이 그쳐보는 것. 그러다가 막다른 길에서 낯선 집의 대문이 나오더라도 이윽고 몇 번이고 더 헤매보겠다는 각오로 걷고 또 걸어야 할 때가 좋았다. 아무도 없는 새벽길에 내 숨소리만 벅차져서 내 몫의 숨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를 만들고 있을 때가 좋았다.

그만큼 밤의 배회를 쓰리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의 지분을 나는 박진성 형에게 돌리고 싶다. 나는 아직 서로 같이 울었던 지난밤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형의 첫 시집 『목숨』이 한때 나를 살게 했던 희망이었다고 서툴게 고백을 했었다. 내게 그건 사실이었고 그뿐이었다. 또한 한 사람의 불행이었고 그뿐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아픈 자리인가. 그의 시를 병으로 읽는 방식에서 좀 벗어나 보자고 한 원고였으나 나는 여전히 그의 병을 연민하고 질투한다.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도 나는 다르게 울음이 돌았다. 다행히도 그가 아직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줘서 아프고 고맙다.

박진성 지음
카테고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 출간일 2014년 5월 28일
사양 변형판 128x215 · 138쪽 | 가격 8,000원 | ISBN 9788932026275

박진성 시인

시인 박진성은 1978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현대시』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 『목숨』『아라리』와 산문집 『청춘착란』이 있다.  자세히 보기

박성준 시인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였으며,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었다. 시집 『몰아 쓴 일기』가 있다. 2015년 시 「뜨거운 곡선」으로 제16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는’ 동인으로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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