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체질이 상처인 시인이 있었다

요리사 ·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1985년 당시, 나는 옷도 없어서 교련복 바지에 추리닝 상의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 춘삼월이라지만, 문창과가 있는 안성 캠퍼스에는 삭풍이 불었다. 다들 수업 따위는 작파하고, 새암집이니 서울집이니 하는 선술집에서 싸구려 막걸리를 퍼마셨다. 2학년이 되고, 신입생들이 들어왔다. 시를 잘 쓴다는 한 녀석의 소문이 돌았다. 막걸리집에서 녀석을 만났다. 우연찮게 560원짜리 시외버스 막차를 타고 이제는 없어진 용산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녀석이 꾸깃한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뭐니. 시예요.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모른다. 조비상입니다. 유치하여라. 그러나 그의 시는 유치하지 않았다. 많은 동급생들이 시 창작 시간에 그의 시를 듣고 시를 포기했다고 전한다. 더구나, 성우 뺨치는 그의 목소리까지. 여자들이 주변에 많았다. 언젠가는, 술자리에서 어떤 여자가 던지는 술잔 세례를 온몸에 받기도 했다. 류근인 줄 알았다잖아.

그는 늘 취해 있었다.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그때는 배고픈 주취였다. 어찌어찌 그는 졸업을 했다. 시 따위보다, 밥을 벌어야 했다. 선배가 어느 다단계 회사의 편집 사무원 자리를 주선했다. ‘핫 세일’ ‘미국 직수입’ 따위의 요란한 광고 카피가 가득한 전단지를 편집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실업자이던 나는 하릴없이 그가 드나들던 편집 사무실에서 놀면서 그를 다시 보았다. 쌈마이 다단계 회사의 전단지에 그는 죽여주는 카피를 썼다. 다단계 세포들이 이 전단지를 갖고 다니며 생필품을 팔았다. ‘마음까지 하얗게 해주는 00치약, 이제 닦지 말고 발라주세요’ ‘세탁소, 너희들 다 망했다, 표백성능의 최강자 00세제’ 따위를 낮술에 취해 썼다. 나는 몇 줄씩 보탰다. 그리고 일과가 끝나면, 찌그러진 냄비에 담긴 찌개에 소주를 마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같은 말을 두 번씩 하는 버릇이 있다.

“형형, 있잖아, 있잖아, 응응. 이 시 잘 썼지, 응응?”

예의 꼬깃한 종이, 시를 읽으면 그이가 버리고 버림받은 여인들이 등장했다. 버리고 버림받음으로써 구원받으려는 시인 족속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는 때로 나와 죽이 잘 맞았다. 대학 시절, 그는 어느 해적만화의 교열일로 먹고 살았다. 엉터리 싸구려 번역을 말 되게 고치는 일이었다. 학교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병을 찌그러뜨리면서 대사와 지문을 고쳤다. 아예 만화만 살리고, 대사와 지문을 창작하기도 했다. 주인공들이 갑자기 이혼했다가 재결합하기도 했으며, 미국으로 갔다가 전대미문의 사건에 휘말렸다가 도쿄로 돌아와 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림에 스토리를 맞추는 것, 아마도 주어진 대로 살아야 했던 그 시절 우리 인생의 반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만화는 마음대로 고칠 수 있었고, 주인공의 운명을 바꾸어버렸다. 졸업해서 겨우 삼류 출판사에서 아침에 마대질을 하거나, 누런 사각봉투를 들고 을지로나 피맛골 대폿집에서 소주나 마실 그런 편집쟁이의 운명을 저주했던 것이다.

그가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화일보의, 당시 돈 많기로 소문난 재벌회사의 기관지 같던 그 신문은 문예사계(이게 말이 되나)를 모집했고 그도 시인 타이틀을 걸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시인이 되기 전에도 ‘시인은 말이야’ 어쩌구 했으니까.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시인으로서 용서받고 시인으로서 규정되었다. 시인처럼 마시고 먹고, 시인처럼 연애했다. 그 와중에 상처입은 이들도 있었다. 어쩌랴, 시인이 그런 것이라는데.

만취한 날, 그의 집에 손목이 이끌려 갔다. 그가 에이포지에 인쇄한 시집 원고 뭉치를 내놨다. 신인 시절의 치기 어린 시도 있었지만, 감동 있는 구절도 나왔다. 그 시가 묶여 시집으로서 드물게 중쇄를 거듭하는 『상처적 체질』이 되었다. 맞다. 그는 본디 상처입은 존재다. 너무도 그 상처가 깊어 아물 수 없는가 보다. 그가 옆에 앉아 넓은 이마를 가리는 머리를 휙, 쓸어넘기며 한마디 할 것 같다. 형 형, 우리 어디 가서 계란말이에 소주나 한잔 할까. 그러고는 앞장서서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앞서갈 것이다. 나는 그가 상처 입은 체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이 치유될 것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리하여 그와 소주나 나누는 것이다.

 

6_박찬일박찬일
요리사 · 음식칼럼니스트. 서교동에서 로칸다 몽로(夢露)를 운영하고 있다.
『뜨거운 한입』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을 썼다.

박찬일이 고른 문지의 책
『상처적 체질』(류근)

 

 

 

 


문지, 단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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