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축사

영화평론가 · 영화감독 정성일

전화를 받자마자 떠오른 문장이 있다. 나는 책이 아니라 문장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는 좀 드문데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떠오른 문장 하나에 관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떠올린 문장은 『행복한 책읽기』에 들어 있다. 아마 책 제목을 듣자마자 누구나 알겠지만, 작고하신 김현 선생께서 1985년 12월 30일에 시작해서 1989년 12월 12일까지 쓴 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내가 갖고 있는 판본은 1993년 1월 15일에 나온 초판 4쇄이다. 이 책은 해제를 쓴 이인성 작가가 책 모두(冒頭)에 밝힌 것처럼 “사회문제 · 병 · 여행 · 등산 · 인간관계 · 영화감상 등, 독서를 떠난 생활에서 촉발된 삶에의 단상들은 자세히 읽어보면 독서 기록들 사이에 단단히 끼워져 맞물려 돌고 있다.” 내가 떠올린 문장은 이 판본의 145쪽, 그러니까 1988년 3월 23일에 쓴 메모의 일부이다. 그날 김현 선생께서는 “마누라에게 쫓겨나 갈 곳이 마땅찮아 임권택의 「아다다」(다모아극장)를 보러 갔다”라고 그날 본 영화에 관해 말씀하고 계셨다. 그런 다음 「아다다」를 본 소감을 적어나갔다. 그렇게 심각하게 읽히지는 않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쓴 것처럼 읽힌다. 나를 멈추게 만든 것은 사족이다.

사족: 그의 영화에는 가족에게 버림받아 방황하는 인물에 대한 편향이 은연중에 배어나온다. 왜?
_『행복한 책읽기』, 146쪽

나는 이 문장을 마주친 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 문장 앞에만 가면 그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아다다」. 영화감독 임권택이 1887년 가을에 찍은 다음 이듬해 3월 19일에 (지금은 없어진 세운상가 건물에 있었던)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1935년에 계용묵 작가가 발표한 소설 「백치 아다다」를 각색해서 만든 영화. 촬영 정일성. 주연에는 신혜수와 한지일, 이경영. 나는 그해에 이 영화를 보았다. 그때 막 임권택 감독님과 처음으로 그의 영화 전부를 인터뷰했고, 그 과정에서 그분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분 자신도 처음 이야기한다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그저 내가 죽은 다음에나 쓰세요.”

이제는 잘 알려진 이야기. 임권택 감독님의 부모는 빨치산이었고, 한국전쟁 이후 그의 가족들은 고향에서 유배당해 살다시피 했고, 그는 (감독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덤 같은 고향에서 숨도 쉴 수 없어서” 나이 열일곱에 가출을 했다. 그때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셈에 포함시키기 바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감독이 되고 나서도, 지방에 촬영을 가면서도, 감독님은 일부러 고향을 피해서 영화를 찍었다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1987년에 들었던 그 대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제는 고향에 내려가 친척 분들을 만나보시나요?” 감독님은 나를 흘낏 본 다음 지나치듯이 대답했다. “고향은 그냥 마음에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비평은 작품과 만나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는 그저 수사에 홀려서 언저리를 빙빙 돌면서 하나마나한 말장난으로 원고료를 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냥 단번에 작품 안으로 들어가서 그걸 창작해낸 사람의 밑바닥까지 단숨에 스며들어간다. 마치 두더지와 같은 비평. 나는 영화를 보고 나면 압지(押紙)처럼 스며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할까, 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때 김현 선생님의 그저 지나치듯,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언제 그렇게 본다는 듯, 쓴 단 하나의 문장이 그걸 내게 보여주었다. 그걸 정말 보는 사람이 있구나. 그때 나는 아직 어렸고,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으면 그걸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건 희귀한 재능이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건 전승이 불가능한 재능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제2의 김현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별이 떨어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유일무이한 책이다. 나도 그걸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4_정성일(미입고_교체 예정)

정성일
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정성일이 고른 문지의 책
『행복한 책읽기- 김현의 일기 1986~1989』(김현)

 

 

 

 


김현 지음
카테고리 교양인문서,산문 | 출간일 1992년 12월 5일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82쪽 | 가격 10,000원 | ISBN 9788932005850

문지, 단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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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얽힌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학과지성사의 책과 관련된 특별한 추억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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