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김현은 예외다

평화학 ·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세월호 사건 이후 나는 매일 생각했다. 박완서가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김현이 살아 있다면 지금 한국문학과 출판시장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내게 김현(1942~1990)은 ‘문학’과 ‘지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문학만도, 지성만도 아니다. 문학과 지성이다. 요즘은 ‘인문학’이라는 용어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지만 ‘문학과 지성’이야말로 인문학을 요약한다.

나는 복잡한 인간형이었던 양친 덕분에 뭔가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성장했다. 나만의 세계에서 혼자인 것이 좋았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누굴 부러워하거나 질투한 적도 없다. 책은 좋은 친구, 장난감, 소지품이었다. 읽지도 않거나 읽어도 모르는 세로쓰기 고전들. 초등학교 6학년이 ‘버틀런드 러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몽테뉴’ ‘아들과 연인’을 들고 다녔다.

1980년대 초반 ‘할리퀸 로맨스’가 여학생 교실을 점령하기 시작했을 때다. 나는 또래들을 경멸하며 “나는 전혜린이며 빨리 죽을 것”이라는 사이비 사춘기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대학만 가면…… 대학만 가면……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을 읽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1986년 아시안 게임. 휴교는 일상이었다. 열아홉 살에 학교 밖에서 아무 맥락도 모른 채 ‘듣보잡’ 레닌을 읽어댔으니, 그때 이미 내 허접한 현재는 예고된 것이었다. 20대에 책을 읽지 못한 것이 가장 쓰라리다.

김현은 지금 내 나이, 48세에 생을 마쳤다. 나는 10대 때는 제도교육, 20대는 멋모르고 거리에서, 30대는 ‘서른 살’ 때 사건을 후회하느라, 40대는 지병으로 보냈다. 남은 삶도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만 살아도 되지만 책이 현실에 나를 묶어두는 중력이기를 소망한다. (김현은 ‘비평’이고) 나는 ‘독후감 일기’를 쓰면서 살고 싶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20여년 전이었는데, 읽었다는 기억조차 없다. 지금은 한 줄 한 줄 박힌다. 김현도 나랑 생각이 같네! 라는 착각과 함께.

“비평가의 가장 큰 고민은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 많고 거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너무나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급해지거나 게을러진다. 둘 다 좋지는 않은 태도이다(209쪽)” 나는 허겁지겁, 마음만 급한 편이다. 영화평론가도 글 쓸 생각에 정작 영화 감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가 읽는 대부분의 책도 독후감이든 데이터든, 읽기 이후의 일거리가 대기하고 있다.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한다. 필자 이전에 독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 읽거나 아예 서평류의 글은 쓰지 말아야지, 번번이 무릎을 꼬집으며 다짐을 반복한다.

김현은 그렇지 않다. 충실히 읽고 즐긴 것 같으면서도 문장은 버릴 것이 없다. 독서량이 없는 나의 처지를 감안하고 말한다 해도, 김현만큼 비평이 곧 창작임을 증거한 이가 또 있을까. 느낌에 대한 추구, 앎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의 진정성, 선의와 성실성 위에 지어진 그만의 집. 나는 그가 부러워서 죽을 것 같다. 푸코가 1984년에 죽었는데 그의 책에 이미 푸코는 물론 마크 포스터, 데리다가 자연스럽게(‘오독 없이’) 등장한다. 2015년 한국사회에도 그런 이가 드문데.

그는 현길언에 대해 쓰면서 예술가의 세계관을 이렇게 말한다. 삶은 운명이다.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쓰지만 좌절한다. 좌절하는 이야기를 하면 한이 안 된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큰 한이 있어야, 이야기가 잘 된다. 예술가가 그리는 인물은 ‘깊이’ 좌절하였으되 그것을 이기려 애를 쓰는 사람이다(159쪽).

양순석의 『저녁길』에 대한 의견도 인상적이다. 그는 “오정희보다 덜 절망적이다”고 썼다. 그녀에겐 “아직 자제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237쪽). 최근에 읽은, “요즘 여성작가들이 오정희의 여성주의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글이 생각났다. 정찬의 『수리부엉이』에는 한 페이지를 모두 할애한다. “막강한 권력 앞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싸움의 방법은 투항이냐 저항이냐가 아니라 말-변명이냐, 침묵-진실이냐의 양자택일이다. 침묵도 중요하고 그 침묵의 의미를 살아 증언하는 것도 중요하다(중략). 최인훈, 이청준, 이문열, 복거일의 뒤를 이를 또 한 사람의 작가가 나온 듯한 느낌이다(257쪽)”

김현의 시선은 비평의 기준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다. 나의 책읽기는 여유가 없고, 욕심이 많고,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행복한 책읽기』.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정원에 초대받은 느낌이다. 행복했다. 나는 오랜만에, 촛불이 켜진 차분한 한여름 밤의 정원을 거닐었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서 정신적으로 죽는다(136쪽)”. 김현은 예외다.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을 뿐 “정신적으로 죽지 않았다” 그가 남긴 책이 있지 않은가. 책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 대신 만질 수 있는 몸.

 

2_정희진(한겨레신문사)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평화학 ·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고른 문지의 책

『행복한 책읽기- 김현의 일기 1986~1989』(김현)

 

 

 

 

 

사진 ⓒ 한겨레신문사


김현 지음
카테고리 교양인문서,산문 | 출간일 1992년 12월 5일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82쪽 | 가격 10,000원 | ISBN 9788932005850

문지, 단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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